278화. 복수의 시작 ― 재밌을 것 같네 (2)
모든 것은 천무진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일부러 놓아준 일부 뇌룡검대의 무인들은 도주에 성공하였고, 잠시 몸을 감추고 있다가 틈을 봐서 십천야의 비밀 거점으로 움직인 것이다.
생존자들을 이끌고 도망쳤던 곡균상은 곧바로 주란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고, 그녀를 통해 곧장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말이 회의지, 모인 십천야는 꽤나 볼품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 회의장에 모인 건 단 셋뿐이었으니까.
언제나 휘장 안에 자리하고 있는 천지광, 그리고 이번 임무에 투입되지 않았던 자운과 주란이 전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회의가 열리면 내부는 꽉 찬 느낌이 들었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자리했고, 또 여러 목소리들이 뒤섞였던 장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건 깊은 침묵과 텅 빈 공허함뿐이었다.
휘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천지광이 보고를 받은 직후 잠시 침묵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모두 죽었다고?”
“네, 생존자는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뇌룡검대 무인들 중 일부에 불과해요.”
두 사람을 죽이기 위해 움직인 대가치고는 그 피해가 실로 막심했다.
혈기군단과 적풍대의 괴멸.
우내이십일성에 속한 추풍량과 여명 전사.
거기다 그 둘보다도 무력이 뛰어났던 야율인뿐만 아니라 십천야인 반조와 매유검도 숨졌다.
다른 타격이야 그렇다 쳐도 십천야인 두 사람이 죽은 건 실로 엄청난 문제였다. 특히나 반조는 십천야 내에서도 실질적인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이다.
그러던 반조가 죽었으니 십천야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고 많은 부분에서 그의 빈자리를 느끼게 될 것이 자명했다.
점점 줄어드는 자리를 볼 때마다 주란은 불안했다.
이렇게 조금씩 십천야의 힘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안쪽에 있는 천지광이 입을 열었다.
“표적이었던 둘은?”
“적화신루의 그 두 사람이 죽은 걸 매유검이 확인했다고 해요. 다만 그 말을 전한 이후 나타난 대홍련의 련주 단엽과 그의 수하들에게 매유검도 당했다고 들었어요.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대홍련에 대한 조치를…….”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백아린과 한천이 죽었다는 대답을 듣는 순간 더는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없다 생각이 든 천지광이 말을 끝내며 휘장 안쪽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번 일의 목적은 천무진의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모충에 대한 조사를 하던 두 사람을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굳이 그 이후의 일에는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천지광의 관심사는 천룡혼, 오직 그거 하나뿐이었으니까.
이야기를 쏟아 내던 주란은 자신의 말을 자르고 이 자리를 떠나려는 천지광의 모습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약해져 가는 십천야의 힘.
그런데 그 수장인 천지광이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하물며 십천야의 두 명과 내부의 커다란 세력 몇 개가 박살이 난 지금까지도.
평소라면 절대 토를 달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주란이 소리쳤다.
“어르신! 이대로 있다가는 십천야가 흔들릴 거예요. 지금이라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만 가득한 말을 쏟아 낸 직후였다.
쏴아아!
갑자기 밀려드는 천지광의 기운에 주란뿐 아니라 그 옆에서 아무런 말 없이 자리하고 있던 자운까지도 움찔해서 뒷걸음질 쳤다.
십천야인 두 사람이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 치게 만들 정도로 위협적인 살기였다.
주란의 입을 닫게 한 천지광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냥 기다리거라. 곧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천지광은 휘장 안쪽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그가 사라지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주란이 참지 못하고 바닥을 내려쳤다.
쿵!
그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좋은 소식? 대체 그 좋은 소식이 뭔데?”
말과 함께 주란은 회의실 내부에 비어 있는 자리를 쓰윽 훑어봤다.
천지광과 천무진을 제외하고 여덟 개의 자리가 있었거늘 이제는 그중 여섯 개가 공석이다.
천무진이 나타나고 고작 일 년.
그동안 십천야는 점점 파멸의 길로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같은 편이 된 지금까지도.
그때 조용히 자리하고 있던 자운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회의실을 나가려는 듯한 그의 모습에 주란이 서둘러 소리쳤다.
“넌 아무 생각 없어?”
“무슨 생각?”
“흘러가는 꼬락서니를 봐. 십천야가 이렇게 되고 있는데 넌…….”
“지금 이게 어때서?”
“……뭐?”
자운이 몸을 돌려 주란과 시선을 맞춘 채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말대로 십천야 자체적으로 많은 숫자의 고수들이 죽어 나갔지만…… 사실 자운의 입장에선 크게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심 반기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조와 매유검.
그 둘은 자운으로서는 넘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둘 모두 자운보다 천지광과 더욱 밀접한 관계였고, 실력 또한 분하지만 자신보다 반 수는 앞서 있었다.
그랬기에 자운은 언제나 일인자가 될 수 없었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천지광을 제외하고서라도 천무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났으니까.
사실 그로 인해 자운은 내심 불만을 가지지 않았던가.
십천야 내에서 자신의 서열이 더욱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차피 천무진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
그리고 자신은 예전부터 어르신을 모셨던 위치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낼 수만 있다면…… 다음 십천야의 수장 자리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게다.
‘무림맹의 일을 하루빨리 정리해야겠군.’
자운은 무림맹을 집어삼키는 일을 도맡았던 인물이다. 그랬기에 여태까지 차근차근 일을 진행시켜 왔는데…… 아무래도 그 속도를 더욱 높여야 할 때가 온 느낌이었다.
어르신에게 있어 최고로 점수를 딸 방도가 그거라 생각한 자운은 다시금 방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가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주란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각자의 일을 하는 것뿐 아닌가? 빈 십천야의 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채우면 그만이고. 너도 쓸데없는 불만을 가지기보다는 십천야를 위해 뭔가를 할 생각부터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자운은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렇게 혼자만 남게 된 주란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은 채 중얼거렸다.
“정말…… 엉망진창이야.”
* * *
수하들이 있는 거처를 나선 천지광이 은밀히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천무진이 있는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에 도달한 천지광이 마주하게 된 건 남윤이었다.
장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거늘 남윤은 바로 그를 알아보고는 짧게 포권을 취했다.
“오셨습니까.”
“됐고, 천무진은?”
물어 오는 질문에 남윤이 뒤편에 위치한 연무장을 슬쩍 바라봤다. 실내에 위치한 연무장이었지만 창문을 통해 내부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그곳에는 눈을 감은 채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천무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천무진의 몸 주변으로 고리 모양의 새하얀 기운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천지광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호오.”
천룡성의 절기를 얻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평소와는 달라진 모습에 때가 더욱 가까워져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천지광의 몸은 가볍게 떨려 왔다.
다시 한번 더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천룡성의 진짜 힘인 천룡혼!
그것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날이 머지않은 느낌이었다.
잠시 천무진의 상태를 살펴보던 천지광이 남윤을 향해 따라오라는 듯 슬쩍 손짓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은 연무장과 다소 떨어진 곳까지 함께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에서 천지광이 물었다.
“운기조식을 하는 과정에 변화가 있는 것 같던데 언제부터 저렇던가?”
“그게 대략 다섯 시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래?”
천지광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다 이내 남윤에게 물었다.
“혹시 일이 벌어지는 동안 뭔가 보고할 일은 없었느냐?”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천지광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남윤이 곧바로 답했다.
“걱정하실 일은 없었습니다. 적화신루의 두 명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움직이는 내내 여기 연무장에만 계셨으니까요.”
남윤에 대답에 천지광은 별다른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건 천무진이 자신의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가질 수 있는 확신이었다.
천지광이 천무진이 있는 연무장 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말했다.
“계속 보고 있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목표하신 바는 이루셨습니까?”
“다행히도. 표적인 둘을 제거하는 건 성공했는데 좀 귀찮게 되었다.”
“귀찮게 되었다 하시면…….”
“반조와 매유검이 죽었거든.”
“예? 그 두 사람이 말입니까?”
남윤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천지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는 천무진이 내가 벌인 일에 대해 끝까지 모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반조와 매유검이 죽은 일 또한 천무진이 알지 못하도록 네가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해라. 의심을 할지도 모르니.”
“그리하지요.”
“그럼 계속 감시하면서 뭔가 보고할 것이 있으면 연락 주도록 해라.”
말을 끝마친 천지광은 곧장 자신의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비록 장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긴 하지만 그는 이 상태가 된 이후부터 바깥에 나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게 천지광이 사라지자 남윤은 곧장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남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고, 그의 기척에 눈을 감은 채로 운기조식을 하는 흉내를 내고 있던 천무진이 눈을 떴다.
천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영감, 어떻게 됐어?”
그의 질문에 남윤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주인님의 계획이 완벽히 먹힌 듯합니다.”
“그래? 다행이네.”
자모충의 조종에서 벗어난 천무진이 내린 선택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는 자신의 발로 직접 이곳 십천야의 비밀 거점으로 돌아오는 걸 선택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
오랜 시간 십천야와 싸워 왔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이들의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거다.
이곳 비밀 거점에만 해도 꽤나 많은 숫자의 무인들이 대기하고 있다. 그냥 무작정 치고 들어오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허나 그것만이 문제였다면 지금처럼 스스로 돌아와 천지광을 유인해서 승부를 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천무진이 원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유로워진 천무진은 자신의 복수만이 아닌 천룡성의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 또한 매듭짓고자 정한 것이었다.
십천야의 숨겨진 엄청난 힘.
그들의 수뇌부는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다.
천지광과 나머지 십천야인 자운과 주란.
하지만…… 그들이 죽는다고 해서 십천야가 끝이 날까?
물론 십천야라는 이름 자체는 사라질 수 있다.
허나 그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었다. 십천야는 무림맹과 마교 모두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만큼 무림의 중요한 위치 곳곳에 이미 십천야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거다.
이번에 백아린과 한천을 죽이기 위해 나섰던 우내이십일성 두 사람만 해도 그렇다.
그 정도의 거물들조차도 십천야의 휘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 둘만이 아닐 게 분명했다.
십천야의 축이 되어 주었을 또 다른 곳곳의 수뇌부들. 그들을 파악해 내고, 최대한 그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무림을 지켜 온 천룡성의 주인으로서 행해야 할 책임이었다.
천무진은 그 모든 일을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 이렇게 아직까지 자모충에 휘둘리는 척하며 비밀 거점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천지광이 빠져나가지 못할 함정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일을 완벽하게 매듭짓는 건 천무진 혼자만의 힘으론 불가능했다.
그간 쌓아 왔던 관계.
그리고 그걸로 인해 얻게 된 신뢰를 바탕으로 천무진은 엄청난 병력을 움직이게 될 것이다.
천무진이 팔짱을 낀 채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슬슬 연락을 보냈으려나.”
백아린을 통해 움직이려고 하는 세력.
그건 바로…… 무림맹과 마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