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원래의 자리 ― 어쩌지? (2)
의선이 있는 곳은 천무진이 지내고 있던 십천야의 비밀 거점과도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백아린이 지내던 형동 인근으로 의선의 거점을 마련한 탓에, 거리상으로는 천무진이 있던 곳과도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의선의 거점은 당연히도 극비로 누구나 쉽사리 찾지 못할 곳에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남윤은 사전에 이곳에 대해 알고 있었다.
미리 백아린을 통해 전해 들은 덕분이다.
물론 백아린 또한 자신이 보내는 그 정보가 남윤에게 가는 줄은 알지 못했다. 그저 천운백을 통해 천무진을 돕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니, 그쪽으로 모든 정보를 넘겨 놓으면 후에 도움이 될 거라는 조언이 있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백아린은 그 조언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고.
덕분에 천무진은 의선이 있는 비밀 장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었다.
남윤의 안내로 도착한 의선의 거처.
그곳에서 몸을 웅크린 채로 연구에 한창이던 의선은 갑작스러운 외부인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이가 아닌 천무진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람을 금하기 어려웠다.
의선은 천무진을 이곳까지 안내한 남윤과도 구면이었다.
천운백을 따르는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었으니까.
가볍게 남윤과 눈인사를 주고받은 의선이 천무진을 향해 놀란 말투로 물었다.
“아니 대체 여길 어떻게…….”
천무진의 사정을 아는 그다.
그랬기에 천무진 본인 또한 의선과의 만남을 억지로 피했고, 그 또한 그러한 사실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돌연 천무진이 이곳에 직접 찾아왔다.
여태까지는 없었던 일.
의아해하는 의선을 향해 천무진이 서둘러 답했다.
“자세한 설명을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백아린과 한천이 위험합니다.”
“예? 그 둘이 말입니까?”
물어 오는 질문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의선은 왜 이리도 천무진이 다급히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천무진과는 그리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백아린과는 이제 제법 친해진 의선이다.
그랬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천무진이라는 사내를 얼마나 위하고 있는지를. 그렇다면 그 반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여겼다.
상황을 전해 들은 의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그를 향해 천무진이 물었다.
“혹시 뭔가 치료 방법을 찾으신 것이 있습니까?”
“……어디까지 전해 들으셨습니까?”
“이곳에서 십천야에 합류한 이후 딱히 전해 들은 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 여왕자모에 대해서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게 뭡니까?”
물어 오는 천무진을 향해 의선은 백아린을 만나 전했던 적이 있는 새로운 사실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천무진의 몸 안에 있는 것은 일반 자모충이 아니라 여왕자모로 의심되고 있으며, 그건 보다 강한 효능과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보통 자모충이었다면 검산파에서 훔쳐 온 보석을 가까이에 둔 채로 고통을 참아 내던 그때 사라졌을 거라는 것도.
새로운 사실을 전해 듣는 천무진은 그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간단한 설명이 끝난 이후 천무진이 물었다.
“그럼 그 여왕자모를 몸 안에서 제거할 방법에 대해 뭔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쉽게도 아직은 없습니다.”
의선의 말에 천무진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물론 이곳에 온다 해서 확실한 해결 방법을 찾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만약 그런 방법을 알아냈다면 이미 자신에게 연락이 왔을 테니까.
하지만 뭐라도 가능성을 걸어 볼 건 의선뿐이었고, 그랬기에 남윤을 통해 이곳까지 달려온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왔는데도 불구하고 얻은 건 아무런 것도 없었다.
그저 몸 안에 있는 것이 여왕자모라는 사실 말고는.
천무진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젠장!”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천무진은 고통스럽다는 듯 얼굴을 감싸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천무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백아린이 죽는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마음 같아선 복수를 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자신은 백아린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천지광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그에게 곧 완성될 천룡혼을 가져다 바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걸 알기에…….
천무진의 시선이 슬그머니 자신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천인혼으로 향했다.
이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복수를 하지 못하는 건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살아서 천지광에게 이용당하고 그에게 천룡혼을 넘겨줄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
목숨을 끊을 결심까지 하는 바로 그 순간.
“다만 하나 생각하는 바가 있긴 한데…….”
의선의 그 말에 천무진이 물었다.
“생각하는 바라뇨? 그게 뭡니까?”
“그것이…….”
말을 꺼내긴 했지만 의선은 쉽사리 다음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그만큼 불확실했고, 선뜻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천무진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어르신! 시간이 없습니다.”
천무진은 급했고, 분명 의선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선은 자신이 없었다.
의원으로 살아온 오랜 삶,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의선이 말했다.
“천 공자님에게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 될 겁니다. 제 가정이 틀린다면 분명 죽게 되실 거고요. 이런 도박에 가까운 일에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는 의선.
그런데 그때 천무진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이내 손을 뻗은 천무진이 의선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고개를 숙였던 의선이 놀란 듯 천무진과 시선을 맞췄다.
양어깨를 움켜쥔 채로 천무진이 말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녀가 없다면 어차피 저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부탁합니다, 의선 어르신.”
말을 내뱉는 천무진의 눈동자를 마주한 의선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과 마주친 눈빛에서 느껴지는 그 절절한 마음이 와 닿아서였다.
사람을 가지고 직접 실험을 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의선이었지만…… 도저히 저 간절한 눈동자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의선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지만 실패하면 죽을 겁니다.”
“압니다.”
“가능성은 일 할의 반도 안 됩니다. 여왕자모를 얼마 구하지 못해 몇 차례 실험해 보지도 못했고, 그조차도 약간의 가능성만 보았을 뿐 모두 실패했으니까요.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실험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실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선 이것 말고는 딱히 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실험.
그걸 해 보겠냐는 물음에 천무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진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의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내 그가 중얼거렸다.
“무모한 건 천룡성이라는 문파 내력인가 봅니다.”
천운백에 이어 천무진까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에 그 둘 모두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 무모함에 의선은 결국 두 손을 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의선이 말을 이었다.
“말씀드린 것처럼 여왕자모는 보통 자모충보다 훨씬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실험해 보셨지만 가까이 보석을 두고 몸 안에 있는 자모충이 죽기를 기다리며 버티는 건 한계가 있지요.”
당시 몸 안에 있는 여왕자모가 죽기도 전에 천무진 먼저 숨이 끊어질 뻔했었다.
다시금 그런 도전을 해서 더욱 버텨 볼 수도 있었지만 사실 일전에 실패한 방법이고, 어떠한 변화 없이는 성공할 가능성 역시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랬기에 의선이 생각한 또 하나의 방법.
그건 바로 검산파에서 훔쳐 온 보석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보다 빠르게, 또 더욱 강하게.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천 공자께서 그 보석을 직접 드시는 겁니다.”
직접 먹어야 한다는 말에 천무진은 움찔했다.
왜 의선이 그토록 위험하다며 이번 일을 멈추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여태까지의 실험은 보석을 가까이에 둔 채 고통을 견디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고통이 극에 달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보석을 멀리 떨어트려서 목숨을 부지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지만 먹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절대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그 말은 곧 이 방법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천무진은 이곳에서 바로 죽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 보석을 옆에 뒀을 때 밀려오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천무진이었다.
보석을 가까이 두는 것만으로 받아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지독했던가.
모든 장기가 끊어지고, 근육들이 찢겨 나가는 고통.
수많은 고통을 경험해 봤던 천무진조차 다시는 느껴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먹는다면 어떻게 될까?
고통 또한 더할 것이고, 결국 이 방법이 틀렸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지옥불 속에 있는 듯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숨을 거둘 게 분명했다.
그 모든 것이 너무도 끔찍했지만…….
“준비해 주시죠.”
천무진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전혀 흔들림 없는 천무진의 모습에 의선 또한 더는 별다른 말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멀리 위치한 상자에 두었던 검산파의 붉은 보석을 꺼내 들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커다란 보석.
이건 직접 먹기엔 너무 컸다.
천무진이 물었다.
“그냥 먹기엔 크기가 너무 큰 거 아닙니까?”
그의 질문에 의선이 곧장 답했다.
“당연히 그냥 먹을 순 없지요. 크기도 문제지만, 그보다 몸 안에서 보다 빠르게 흡수가 될 수 있도록 일부를 부숴서 가루로 만들 생각입니다.”
검산파에서 가져온 이 붉은 보석의 사분의 일가량을 떼어 내서 그걸 잘게 가루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천무진은 그걸 먹으면 됐다.
가까이에 있으면 천무진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기에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채로 의선이 말했다.
“그럼 전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금방 끝날 겁니다.”
겉보기엔 제법 단단해 보였지만 그리 강도가 높은 편은 아니라 부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방 한쪽에서 의선이 작업을 시작한 사이.
천무진은 널찍한 공간에 가서 섰다.
그가 작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몸 안에 있는 이 지독한 자모충을 없애고 두 사람을 구해 내기 위해 위험한 실험을 선택한 천무진이다.
선택에 있어 후회나 망설임은 없었지만, 곧 찾아올 지독한 고통을 알기에 다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천무진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옆에 있어 주었던 남윤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남윤은 천무진의 모든 선택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옆을 지키는 중이었다.
천무진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영감.”
“예, 작은 주인님.”
“혹시라도 말이야 내가 잘못된다면 영감이 뒷일을 좀…….”
“작은 주인님이 죽으실 일 따위 없습니다.”
천무진의 말을 딱 자르며 남윤이 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천무진이 남윤을 바라볼 때였다.
남윤이 말을 이었다.
“저의 큰 주인님이나, 작은 주인님 모두 대단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주인님은 잘 이겨 내실 겁니다. 뭐든 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말을 끝낸 남윤이 빙긋 웃었다.
남윤은 전혀 걱정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걱정이 되지 않아서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자신에게 더욱 큰 희망을 주고자 하는 남윤의 마음이 느껴졌다.
천무진이 천천히 손을 뻗어 남윤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이내 그를 끌어안았다.
천무진을 키워 준 두 명의 사람.
천운백, 그리고 남윤.
어린 시절의 기억엔 언제나 이 둘이 있었다.
긴 시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신을 지켜 온 그 두 사람. 그런데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천무진은 단 한 번도 이 말을 하지 못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생각지도 못한 천무진의 발언에 놀란 듯 품에 안겨 있던 남윤이 움찔하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고 때마침 의선이 다가왔다.
“천 공자님, 준비 끝났습니다.”
그 말에 천무진은 남윤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중 천무진이 짧게 말했다.
“다녀올게, 영감.”
천무진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서일까?
남윤 또한 웃으며 답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작은 주인님.”
그 말을 끝으로 천무진은 의선에게 다가갔다. 의선의 손에는 하얀 종이 한 장이 들려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붉은색의 가루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천무진은 거침없이 의선의 앞에 도착해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건네받았다.
망설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아린과 한천은 조금씩 위험해지고 있을 테니까.
거기다가 이 보석 가루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점점 몸 상태가 좋지 않아질 걸 알았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종이를 건네받기 무섭게 그걸 입가에 가져다 댄 채로 기울였다.
그러자 종이 위에 쌓여 있던 보석을 부순 가루들이 천무진의 입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가루가 입에 들어오고, 이내 그것을 꿀꺽 삼키기 무섭게…….
두두두둑!
천무진의 몸이 기괴하게 비틀리며 그의 목이 뒤로 꺾였다.
번쩍!
천장을 올려다보는 천무진의 두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피가 쏟아져 나올 것처럼 붉게 변한 눈동자. 그 상태로 천무진이 기괴한 비명을 토해 냈다.
“꺼윽! 커어억!”
끔찍한 고통이 천무진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