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허락 ― 여기는 우리가 맡는다 (2)
한천이 한참 반조와 야율인, 그리고 혈기군단과 싸우던 그 시각, 백아린 또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십천야의 한 명인 매유검과, 우내이십일성인 추풍량. 거기다 추풍량이 이끄는 적풍대까지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이들의 싸움은 꽤나 거칠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쾅!
백아린의 대검이 적풍대가 모여 있는 정중앙으로 떨어져 내렸다. 검에서 쏟아진 기운에 적풍대 무인들이 휩쓸리듯 밀려 나갔다.
순간 그녀의 위쪽으로 매유검이 날아들었다.
파앙!
백아린이 빠르게 몸을 회전하며 날아드는 그의 공격을 받아 냈다. 매유검의 일격은 꽤나 강렬했다.
주변에 그의 아군인 적풍대가 있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만큼 말이다.
퍼버벅!
괜히 말려든 적풍대 무인들이 매유검의 일격에 튕겨져 나갔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매유검은 그들이 어찌 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하나.
백아린의 목숨이었으니까.
그 덕분에 함께 싸우고 있는 추풍량은 죽을 맛이었다.
자신의 수하들이 매유검의 공격에 휩쓸려 피해를 입고 있는 걸 보고 있기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적풍대 무인들 사이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격돌이 연달아 이어졌다.
카카카캉! 캉캉!
백아린의 대검이 사방팔방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휘몰아쳤다. 커다란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한 공격에 매유검의 몸이 마구 뒤로 밀려 나갔다.
연신 뒷걸음질 치던 매유검이 불만스러운 소리를 토해 냈다.
“큿!”
실로 믿기 어려운 힘이었다.
한 손으로 저런 대검을 장난감처럼 휘두르고 있거늘, 막상 막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천근의 쇠망치를 받아 내는 기분이었다.
그 정도의 힘을 지닌 공격이 연달아 쏟아져 나온 탓에 검을 쥔 손바닥은 터질 것처럼 얼얼했다.
날아드는 대검의 반동을 이용해 슬쩍 뒤편으로 움직인 매유검이 검을 움직였다.
스윽.
날카롭게 날아든 검기가 백아린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공격을 흘려 낸 그녀는 곧장 대검을 땅에 박아 넣으며 그대로 내력을 분출했다.
콰드드득!
땅이 터져 오르며 매유검을 덮쳤다.
매유검이 그 공격에서 빠져나가는 사이 수하들에게 최대한 뒤편으로 자리 잡으라는 수신호를 보내던 추풍량이 따라붙었다.
추풍량은 권사였다.
권법과 장법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고, 그의 손바닥은 부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이야기할 정도로 파괴적인 무공을 구사하는 인물이었다.
한빙구유장(寒氷九幽掌)이라는 이름의 장법이 추풍량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착각이 일었고, 이내 추풍량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장력이 백아린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건 날카로운 얼음 칼이 되어 주변을 뒤덮었다.
파앙!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며 공격을 피해 낸 백아린이 곧장 추풍량을 향해 대검을 내려쳤다. 맹렬하게 떨어져 내리는 대검의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추풍량은 공격을 받아 내기보다는 피하는 걸 선택했다.
가까스로 옆으로 비켜서는 순간 백아린의 발이 움직였다.
쩌엉!
얼굴을 그대로 적중당한 추풍량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허나 치명타는 아니었기에 그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런 망할!”
화가 나는지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추풍량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지만 백아린은 그런 그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어지는 매유검의 공격에 반응했다.
스스슥!
매유검이 검을 내뻗는 순간 검 끝이 흔들리며 일곱 개의 잔영들이 백아린을 덮쳐 갔다. 동시에 검이 기기묘묘한 변화를 보이며 피하기 어려운 방위로 파고들었다.
백아린은 뒤로 껑충 뛰면서 거리를 벌렸지만, 매유검의 공격은 집요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따라붙는 검 끝에서 검기가 폭발했다.
파파파팡!
땅으로 쏟아지는 검기로 인해 흙먼지가 일어나는 찰나, 그 안쪽에서 새하얀 백의를 입은 백아린이 날아올랐다. 그녀는 너무도 멀쩡한 상태로 곧장 대검으로 아래를 겨눴다.
백아린의 몸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회전했다.
동시에 그녀의 몸 주변으로 나선형의 고리 일곱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왕의 무공인 나선칠선파(螺旋七線波)였다.
콰콰콰콰쾅!
그녀의 대검이 휘둘러진 방향에 있던 이들 모두가 박살이 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곳에 있던 매유검은 너무도 멀쩡하게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아슬아슬하게 나선칠선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그를 확인한 백아린이 애써 아쉬움을 달랬다.
‘역시 그때 붙어 본 십천야랑은 실력 자체가 다르네.’
주란에게는 꽤나 치명적이었던 나선칠선파였거늘 매유검은 이 공격을 어렵지 않게 빠져나왔다. 고작 가벼운 생채기 한두 개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 공격은 매유검만 노리고 펼친 게 아니었다.
매유검에게도 타격을 줬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이 실패한다 한들 그곳에 있던 적풍대에겐 치명타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백아린의 예상대로였다.
쏟아지는 강기에 꽤 많은 적풍대 무인들이 휩쓸려 나가떨어졌으니까.
백아린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파라라락! 팡!
백아린이 매유검을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대검을 흔들어 댔다. 그때 매유검이 손바닥으로 대검의 옆을 밀쳐 내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피잇!
매유검은 백아린의 복부를 향해 강하게 검을 찔러 넣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공격, 그렇지만 백아린은 이미 그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녀가 빠르게 양팔을 움직였다.
대검을 든 팔을 아래로 향했고, 반대편 팔은 곧장 거리를 좁혀 온 매유검의 얼굴로 내뻗었다.
캉! 파앙!
전혀 다른 두 개의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멈추어 선 백아린과 매유검은 서로의 공격을 막아 낸 상태였다. 백아린은 대검으로 찔러 오는 검을 막았고, 매유검은 그녀의 날아드는 팔꿈치를 손바닥으로 받아 낸 것이다.
거리가 좁혀진 상황에서 둘은 상대방을 향해 박투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서로 물러서지 않는 두 사람의 근거리 접전은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부웅! 팍! 팍팍!
서로를 노리고 수십 합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었다. 간단한 주먹질과 발길질로 보였지만, 그것이 빗겨 나가는 곳에 있는 물건들은 모조리 박살이 나서 나뒹굴었다.
그만큼 둘의 공격엔 큰 힘이 실려 있었다.
어느 순간 반 바퀴 회전한 백아린의 팔꿈치가 결국 매유검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컥!”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매유검의 얼굴로 번개처럼 백아린의 발이 휘감아 왔다.
장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탓에 눈으로 확인하는 건 늦었지만 이미 감각으로 그녀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음을 눈치챈 매유검이다.
그가 서둘러 상체를 뒤로 젖혔고, 백아린의 발은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핏!
그렇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백아린의 발에 실린 내력 때문이었는지 가볍게 스쳤을 뿐이거늘 매유검의 코에서는 피가 터져 나왔다.
그가 서둘러 뒷걸음질 치며 코를 어루만졌다.
자리에 착지한 백아린이 대검을 머리 위쪽으로 올려 회전시키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얼마 안 남은 거 같네. 그 거추장스러운 장포를 걷어 내는 거 말이야.”
백아린의 도발에 매유검이 이를 갈며 받아쳤다.
“헛소리하긴.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말과 함께 매유검은 손바닥으로 코를 스윽 문댔다. 피로 인해 얼굴이 다소 엉망이 되긴 했지만 큰 타격은 아니었다.
매유검은 자신의 장포를 더욱 깊게 잡아당겼다.
신기하게도 그는 언제나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건 십천야의 거점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랬기에 천무진 또한 아직까지 성장한 후 매유검의 얼굴은 보지 못한 상태였다.
대체 그토록 얼굴을 가리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었지만…….
장포에 대한 생각을 접으며 슬쩍 주변을 둘러본 백아린의 속내는 사실 좋지 못했다.
꽤나 많은 숫자의 적을 쓰러트렸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몇백은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무인들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매유검과 추풍량까지.
백아린은 자신과 떨어진 한천이 무척이나 걱정됐다.
‘어떻게든 빨리 뚫고 도우러 가야 하는데.’
재밌게도 한천이 그러했던 것처럼 백아린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로가 어떻게든 상대방을 돕기 위해 움직이려 하는 모습. 그만큼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신뢰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천을 생각하자 백아린은 더욱더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가 대검을 잡고 있는 자세를 바꿨다.
상체를 낮추고 무거운 대검을 앞으로 뻗은 형세는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기운이 돌변했다.
촤르르륵!
마치 연꽃잎 사이에 있는 것처럼 백아린 주변으로 피어오른 검은 색의 검기들. 칼날을 연상케 하는 검기들이 피어올랐고, 그것들이 백아린을 지킬 것처럼 감싸 안았다.
지금 그녀가 펼치려는 무공의 정체는 다름 아닌 잔마폭멸류.
천무진에게서 받은 바로 그 무공이었다.
그리고 백아린은 일전에 이 잔마폭멸류로 십천야의 한 명인 왕도지의 목숨을 거둔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피어오른 이 검 형상을 한 검은 기운의 숫자는 열두 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무공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면서 잔마폭멸류의 기운 또한 늘어났다.
열여덟 개.
당시엔 열두 개를 소환해 냈으니, 그때보다 무려 절반이 더 늘어난 것이었다.
최대치인 스무 개에 거의 근접한 경지까지 다다른 셈이었다.
백아린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순간 바닥에 박혀 있던 검은 색의 검기들이 뽑혀져 나왔다.
티티티티팅!
동시에 검은 색을 한 검 모양의 기운들이 허공으로 뻗어져 일렬로 늘어섰다.
백아린을 향해 자신 있게 달려들던 추풍량을 멈칫하게 만들어 버리는 묘한 박력이었다.
‘……저건 뭐야.’
추풍량은 백아린이 펼치는 무공을 보며 이상하게 위화감을 느꼈다.
검기는 검강보다 아래 단계다.
그렇다 보니 검기를 피어 올리는 것에 대해 추풍량이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물론 검기라는 것도 일류 이상의 무인 정도는 돼야 구사할 수 있는 나름 고강한 경지였지만, 어차피 그거야 우내이십일성 중 하나인 추풍량에겐 관심 밖의 이야기였다.
그런 추풍량이거늘 지금 백아린이 만들어 낸 저 정체불명의 검기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그저 얕봐서는 안 될 것 같은 수상쩍은 기운.
바로 그때였다.
장포를 눌러 쓴 매유검의 입가가 비틀렸다.
“뭐야, 잔마폭멸류잖아.”
백아린은 무공의 정체를 너무도 빠르게 알아차린 상대의 반응에 움찔했다.
잔마폭멸류는 결코 쉬이 알아볼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하물며 오랫동안 사라졌던 무공, 그 정체를 이리 쉽게 알아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백아린의 생각을 읽어서일까?
매유검이 비웃듯 말을 이었다.
“잔마폭멸류를 알아봐서 꽤나 놀란 모양이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잖아?”
말과 함께 갑자기 매유검 또한 검을 쥔 자세를 바꿨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파파파팡!
그의 주변으로 피어오르는 새카만 검의 형상을 한 검기들.
그걸 보는 순간 백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매유검이 펼친 무공은 백아린과 똑같은 잔마폭멸류라는 걸.
다만 하나 차이가 있다면 열여덟 개의 형상을 만들어 낸 백아린과는 달리 매유검은 완벽한 스무 개의 힘을 불러냈다는 것이다.
그건 매유검이 백아린보다 몇 년 이상은 더 빨리 이 무공을 익힌 덕분이었다.
땅에 박혀 있던 검은 기운들이 곧바로 뽑혀 허공으로 치솟았다.
창창창!
검의 형상을 한 스무 개의 검은 검기들이 수평으로 선 채로 백아린을 겨누고 있었다.
똑같은 무공으로 서로를 겨누고 있는 그 와중에 매유검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