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허락 ― 여기는 우리가 맡는다 (1)
한천의 몸 주변으로 다시금 몰려들기 시작한 기운이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손에서 이상 신호가 느껴졌고, 이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지금 어떻게든 빨리 처리를 해야만 했다.
스윽.
바닥을 향해 내려트린 검이 작게 떨려 왔다.
몰려들기 시작한 힘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천이 펼치려고 하는 무공은 아까 전 혈기군단의 무인들 오십여 명을 일격에 쓸어버린 금황천이라는 초식이었다.
그걸 눈치챈 반조는 빠르게 내력을 끌어모으며 응수할 준비를 했다.
금황천이 어떠한 초식인지 알고 있는 반조다.
그랬기에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는지도 얼추 알고 있었다.
반조가 빠르게 야율인에게 전음을 날렸다.
『단주, 절초로 상대해야 합니다.』
그의 전음에 야율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이 금황천을 몸으로 받아 봤던 야율인이다. 그런데 지금 모여드는 내공은 아까보다 더욱 강대했다.
아마도 경험해 보았던 것보다 더 강렬한 공격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게다.
반조에게서는 새하얀 기운이, 야율인에게서는 붉은 기운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반조의 음살마혼강기(陰殺魔魂罡氣)와 야율인의 혈류신강(血流神罡)이 동시에 발현되기 시작했다.
음살마혼강기나 혈류신강 모두 두 사람의 무공들 중에서 파괴력으로는 첫손에 꼽히는 것들이었다. 그 같은 초식으로 상대해야 할 만큼 금황천이라는 초식이 지닌 힘은 커다랬다.
스윽.
한천이 몸을 굽히는 듯싶더니 이내 검을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검에 실린 힘을 쏟아 냈다.
금빛 물결이 출렁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반조와 야율인 또한 자신들의 무기에 실린 내력을 전력을 다해 쏘아 보냈다.
그런데…….
부아아앙!
앞으로 요동쳐 나오는 듯했던 금빛 물결이 갑자기 다시금 한천에게로 몰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음살마혼강기와 혈류신강을 쏘아 낸 두 사람의 안색이 굳어졌다.
어느덧 금황천의 기운을 검으로 완전히 빨아들인 한천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야율인.
그가 있는 쪽이었다.
자신의 손에 조금씩 이상 신호가 온다는 걸 감지한 순간 한천은 이미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위험하더라도 승부를 본다.’
이대로 계속해서 둘과 동시에 손을 섞는다면 결국 자신이 질 거라는 걸 알고 있던 한천이다. 그랬기에 한천은 자신이 다칠지언정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수법을 생각했다.
결국 자신이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조나 야율인 둘 중 하나를 먼저 무너트려야 한다.
그렇다면 둘 중 조금이라도 약한 야율인을 표적으로 삼아 확률을 높이기로 한 것이다.
한천은 금황천을 검에 실은 채로 야율인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쏘아져 오는 혈류신강을 반으로 갈랐다.
쩌엉!
손바닥이 찢겨 나갈 것만 같은 강렬한 기운.
그렇지만 한천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밀려 나가면 모든 것이 끝이다.
사실 지금 이런 식의 공격을 가하는 건 또 하나의 위험이 따랐다.
그건 바로 지금 뒤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묵직한 무엇인가였다. 급히 방향을 튼 반조의 음살마혼강기가 한천을 뒤쫓고 있었다.
기회는 찰나!
손에 들린 검이 야율인의 강기를 반으로 갈라냈고, 그는 그 틈으로 이미 상대를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들어간 한천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검 주변으로 회오리치는 금빛 강기를 보며 야율인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금황천(金皇天) 진(眞)!
금황천의 힘을 검에 실어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변형된 초식이었다.
야율인은 밀려드는 공격을 받아 내기 위해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쾅!
“커어억!”
그의 몸이 피를 뿌리며 뒤로 꺾였다.
치명상에 가까운 공격이 야율인에게 적중했고, 그로 인해 수십여 개의 상처들과 함께 짜릿한 손맛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한천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미 지척으로 다가온 반조의 강기가 한천을 뒤덮고 있었다.
예상보다 더욱 빠른 공격.
한천은 서둘러 내력을 끌어올리며 손으로 그 강기를 받아 냈다.
퍼엉!
폭음과 함께 한천 또한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반조의 막강한 내력이 실린 일격을 정면으로 받아 냈으니 그 타격이 큰 건 당연했다.
갑작스러운 한천의 선택으로 인해 한참 싸움을 벌여 대던 세 사람 중 둘이 거의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한천에게 당한 야율인은 바닥에 누운 채로 연신 피를 토해 내고 있었고, 그대로 뒀다가는 곧 숨이 끊어질 정도의 치명상을 입은 듯 보였다.
마찬가지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한천을 바라보며 반조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무슨 멍청한 작전이지?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너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런 몸으로 나머지 인원들은 어떻게 상대하겠다고…….”
반조가 자신 있게 말하는 그때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한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피투성이였고, 이미 신체의 곳곳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천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다.
한천이 이토록 무모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귀명신단.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단환이니, 서로 타격을 입어 움직이기 힘들게 된다면 자신이 이득일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거다.
어차피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고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한천의 이 결정은 무모해 보였지만, 결국 지금 자신이 처한 입장을 잘 알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엉망이 된 몸으로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검을 들어 올리는 한천의 모습은 다소 기괴하기까지 했다.
한천이 아무렇지 않게 반조를 향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어이, 이번엔 당신 차례…….”
말을 하던 한천이 갑자기 멈칫했다.
방금 전까지는 괜찮았던 신체. 그런데 갑자기 배를 시작으로 하여 작은 고통이 파문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순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한천은 억지로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귀명신단의 효과가 그리 길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그만큼 한천이 격렬한 싸움을 벌이며 신체에 부담이 갈 정도로 많은 내력을 사용했고, 또 그만큼 많은 타격을 입은 탓이었다.
한천은 분한 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대장…….’
백아린을 구해야 했다.
그녀는 한천에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과연 지금의 몸 상태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조금씩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게 체감되고 있지만, 한천은 애써 정신을 집중시키며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 순간 입에서 한 줄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새카만 피는 한천이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반조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상태가 엉망이야. 그런데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한천에게 버틸 만한 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다.
함께 싸우던 야율인이 쓰러진 지금 반조는 다른 방식의 싸움을 선택했다.
“혈기군단 전원 나의 명을 따른다!”
그들을 이끄는 야율인은 전투 불능의 상태였고, 생존해 있는 반수가량의 혈기군단은 자신들의 격돌에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오십 장 정도 뒤에 대기시켜 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다시금 혈기군단이 움직일 때가 된 것이다.
엉망이 된 한천, 이제 혈기군단으로 마지막 마무리를 할 시기였다.
반조는 곧장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눈앞에 있는 표적을 사살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자신들의 상관이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던 그들이 매섭게 달려들었다.
남아 있는 혈기군단의 숫자만 대략 팔십에서 구십 명 사이.
그 많은 무인들이 한천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빠져나가는 힘과 흐릿해져 가는 시야를 느끼며 한천은 간신히 두 발로 버티고 섰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한 명이라도 더.’
번쩍!
한천의 검이 순식간에 혈기군단의 무인들을 베어 넘겼다.
동시에 옆에서 찔러 들어오는 공격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한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으로 상대의 목을 비틀었다.
그가 시야를 가리는 피를 소매로 닦아 내며 적들을 향해 다가갔다.
‘한 명이라도 더!’
그렇게 혈기군단의 무인들을 마구잡이로 휘젓고 있던 그 순간.
퍼억!
한천이 누군가를 쓰러트리는 사이 그 틈을 파고들어 온 검이 그대로 한천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뻗어져 나온 검은 무릎을 쑤시고 들어왔다.
한천은 양손으로 더욱 깊게 박히려는 검들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날을 그대로 쥔 탓에 양손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날을 쥐고 있는 한천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으아아아!”
곧 고함 소리와 함께 한천은 자신에게 검을 찔러 넣은 두 명의 상대를 팔꿈치로 강하게 쳐 냈다.
동시에 몸에 박힌 두 자루의 검을 뽑아내며 그대로 자신에게 공격을 가했던 그들을 베어 넘겼다.
지금 한천의 모습은 흡사 한 마리의 상처 입은 맹수와도 같았다.
다 죽어 가는 것처럼 비틀거리는 와중에서도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베어 넘기는 그의 모습에 혈기군단 무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뒷걸음질 쳤다.
그렇지만 이내 그들은 또 한 번 휘청이는 한천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
혈기군단의 무인들이 다시금 한천의 앞을 막아섰다.
허나 그는 거침이 없었다.
촤악! 촤악!
한천의 검이 길을 막아 대는 그들의 숨통을 연달아 끊어 냈다. 물론 한천 또한 멀쩡하기는 힘들었다. 그들 또한 그에게 공격을 가했고, 지금의 상태로는 그 모든 걸 피해 낼 수 없었기에 한천의 몸에는 연달아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났다.
피잉. 핑.
팔과 다리, 그리고 볼에서도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하지만 한천을 건드린 대가로 달려들었던 그들 모두는 곧바로 숨통이 끊어졌다.
한천은 비틀거리다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쓰러져서는 안 됐다.
한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반조가 있는 곳이었다.
그 순간 그의 시야로 혈기군단 무인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가 한천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죽어!”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한천은 있는 힘껏 몸을 틀어 피해 냄과 동시에 상대의 목을 그어 버렸다.
엉망인 몸으로도 혈기군단의 무인들을 휩쓸어 버리는 한천의 모습에 결국 뒤편에 있던 이들은 다른 선택을 내렸다.
바로 암기였다.
슈슈슈슈슉!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 암기들을 보며 한천은 내력을 끌어올려 그것에 저항했다.
그렇지만 개중 일부가 빈틈을 헤집고 들어와 한천의 몸에 틀어박혔다. 치명타가 될 만한 곳은 어떻게든 지켜 냈지만, 온몸 곳곳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몸 상태에서 암기까지 박히자 한천은 거의 쓰러질 정도로 비틀거렸다.
그렇지만 한천은 그 와중에도 억지로 몸을 지탱하며 검을 휘둘렀다.
검에 맺힌 금빛 검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콰콰쾅!
암기를 뿌려 댔던 이들이 있는 곳을 순식간에 초토화 킨 한천이 소리쳤다.
“뭐야 이 분위기는! 다 죽은 사람 하나에 겁이라도 먹은 건가!”
한천의 외침에 혈기군단이 움찔하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자신들이 고작 한 명에게 이토록 쩔쩔맨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을 경험해 본다면 누구라도 이해할 것이다.
저처럼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이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고 있는지.
한천이 멈춰 서 있는 이들에게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난 곧 죽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 전에…… 다 죽여 줄게.”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이들 모두를 죽인다.
그것이 지금 한천이 하고자 하는 마지막 임무였다.
비틀거리는 한천이 백아린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미안합니다, 대장. 아무래도 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한천은 간절히 바랐다.
자신은 비록 이렇게 죽게 될지라도 백아린 그녀만큼은 반드시 무사히 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조그마한 희망을 위해서 한천은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다.
이 엉망인 몸을 이끌고.
반송장처럼 힘들어하면서도 혈기군단을 곤란하게 만드는 한천의 모습에 반조도 재차 이 싸움에 끼어들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한천이 비틀거리며 혈기군단의 무인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바로 그때.
“죽긴 누구 마음대로 죽는다는 거야.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죽으려고?”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한천이 움찔했다.
순간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도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숲.
그리고 그 숲 안쪽에서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천은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가물가물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단엽?”
말을 내뱉는 한천을 확인한 단엽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천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손은 심하게 부어올랐고, 온몸에 성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피투성이에 엉망이 된 신체까지.
거기다 몸 곳곳에는 아직까지도 자잘한 암기나, 무기가 박혀 있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지만 단엽은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다가오는 단엽을 발견한 반조는 처음엔 당황했다. 이곳에 그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내 반조는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단엽의 등장은 분명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자신은 건재한 상태였다.
거기다가 혈기군단 또한 적당히 남아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이 정도 인원이 뒷받침해 준다면 자신이 다소 부상을 당했다 한들 단엽 정도 꺾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반조가 말했다.
“어리석군. 굳이 죽을 곳을 찾아오다니. 쥐 죽은 듯이 살았다면 조금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반조의 말에 단엽이 이죽거렸다.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뭐?”
곧바로 터져 나온 욕설에 반조가 반문하는 그때였다.
단엽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호랑이한테 쥐새끼처럼 살라고? 그게 되겠냐? 이 머저리야.”
“큭큭! 하여튼 여전하네.”
단엽 특유의 자신만만한 말투에 한천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온몸이 조금씩 차갑게 식어 갔고, 숨을 쉬기도 힘들어졌다.
그래도 이상할 정도로 유쾌했다.
단엽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기분이 좋았다.
한천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단엽,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곧장 우리 대장을 도와주러…….”
“시끄러워. 재수 없게 죽긴 누가 죽는다는 거야?”
약한 소리를 하려는 한천을 향해 단엽이 괜히 더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이내 그가 말을 이었다.
“망할 자식, 죽으면 용서 못 한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티고 있어.”
말을 마친 단엽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반조를 노려보며 천천히 덧붙였다.
“이제부터 여기는 우리가 맡을 테니까.”
“우리?”
의미심장한 단엽의 말에 반조가 되물었던 그때였다.
스스스슥.
단엽의 뒤편 멀리에서부터 일련의 무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숫자는 순식간에 백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붉은 글씨로 홍(紅)이라는 글자가 박힌 무복을 입고 있는 이들.
대홍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