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혈투 ― 그대의 이름은 (2)
검은 든 채로 다가서던 반조가 소리쳤다.
“단주! 나도 개입하겠습니다.”
여태까지 혈기군단과 야율인이 싸우는 걸 관전만 하던 그다. 그렇지만 이제 궁금했던 모든 것에 해답을 찾았고, 야율인 혼자서도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까지 확인했다.
자신까지 나서는 건 최후의 선택으로 미뤄 뒀었지만…….
반조의 말에 야율인이 맞대고 있던 한천의 검을 거칠게 밀어냈다.
파앙!
허공에서 폭발음이 터짐과 함께 두 사람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거리를 벌린 둘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 그렇지만 둘 모두의 기운은 여전히 강렬했고 눈빛 또한 조금도 죽지 않았다.
빠르게 야율인의 옆으로 다가온 반조가 주변을 포위하려 하는 혈기군단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반경 오십 장 바깥으로 물러나라!”
지금 이 상태로 싸웠다가는 십천야가 자랑하는 혈기군단이라는 이름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반조는 우선 그들에게 물러나라 명했다.
이미 혈기군단의 절반가량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여기서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는 없었다.
한천의 실력은 직접 눈으로 확인을 끝냈다.
생각보다 더욱 뛰어난 실력, 다만 문제는 중간에 갑자기 기운이 돌변하며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거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의 피해는 전혀 예상치 못했고, 그로 인해 방심한 대가로 혈기군단은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반조가 손에 들린 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전장이 아닌 마치 밤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유유자적한 모습에서는 여유와 함께 고수로서의 느낌이 은은히 풍겨 나왔다.
반조가 한천과 마주한 채로 말했다.
“방금 그거 금황천이지?”
한천이 펼쳤던 무공을 언급하며 그가 물었다. 금황천을 단번에 꿰뚫어 본 반조의 말에 한천이 움찔했다. 아무리 무림에 몸담은 인물이라 해도 황궁의 무공까지 아는 경우는 드물다.
하물며 그것이 일부의 사람에게만 전해지는 비기라면 더더욱 그랬다.
한천이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반조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가 말을 이었다.
“대장군부의 숨겨진 절초인 금황천을 익힐 수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 반조가 곧바로 덧붙였다.
“황제 아니면…… 대장군.”
말을 끝낸 반조가 슬쩍 한천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피투성이의 야수와도 같은 그를 보며 반조가 작게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황제가 이곳에 나와 있을 리는 없고. 작금의 황제는 무공에도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쪽 정체는 대장군이라는 건데. 그런데 그것도 이상하단 말이야. 난 지금 대장군의 얼굴을 알거든.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지?”
하지만 한천은 반조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도 없었고, 한가로이 수다를 떨 여유도 없었으니까.
한천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피잉!
날아오른 그가 반조를 향해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캉! 카카캉!
두 사람의 검이 연신 충돌하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고작 한 번의 숨을 내뱉을 정도의 짧은 순간, 한천과 반조의 검이 서로를 향해 수십 차례 움직였다.
그사이 한천의 검이 빠르게 반조의 팔뚝을 베고 지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스쳐 지나가던 반조 또한 한천의 옆구리를 벴다.
반조는 팔뚝이 베이는 감각에 움찔했다.
반면 귀명신단 덕분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한천은 달랐다.
그가 다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몸을 비틀며 검을 휘둘렀다.
휘익!
뒤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반조가 눈으로 좇을 때였다.
카앙!
옆에서 야율인이 서둘러 공격을 받아 냄과 동시에 반조의 검이 빈틈을 헤집고 한천을 향해 쑤시고 들어갔다.
창과 충돌하며 검이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간 상황.
그 상황에서 한천은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 쪽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바닥을 움직였다.
타앗.
손바닥으로 가볍게 검을 밀쳐 낸 한천의 몸이 반보 정도 앞으로 기울었다.
동시에 그의 팔꿈치가 반조를 파고들었다.
퍼억!
정확하게 명치를 노리고 날아든 공격. 그렇지만 반조는 이 또한 팔뚝으로 막아 냈다. 그러고는 가까이 붙어 있는 한천을 향해 재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휘잇!
한천이 위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반조의 검을 뒤로 몸을 젖히며 피해 낸 사이, 옆에서 야율인이 다가왔다.
부웅, 붕.
창이 앞뒤로 회전하며 한천의 좌우를 공격했다. 한천은 재빨리 균형을 잡음과 동시에 검을 수평으로 세워 간단하게 공격을 밀쳐 냈다.
그러고는 창을 휘두른 야율인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한천의 발끝에서 뿜어져 나온 각풍이 회오리처럼 밀려 나갔다.
동시에 그의 검에 다시금 금빛 기운이 맺혔다.
서걱.
귀신처럼 움직이는 한천의 움직임에 따라 야율인의 어깨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건 치명상은 아니었고, 야율인도 지지 않고 한천의 발등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푹!
발등을 꿰뚫리는 걸 피해 내긴 했지만, 창이 발목을 베고 지나갔다. 그걸 보는 순간 야율인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발목을 베는 순간 서둘러 창의 방향을 바꾼 야율인이 거칠게 찔러 들어갔다.
‘좋아! 균형이 무너졌으니 곧바로…….’
당연히 몸을 지탱해 주는 발을 다쳤고, 그로 인해 주춤할 거라 여겼다. 그렇지만 그건 보통 인간이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고통을 모르는 한천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으니까.
창을 내뻗던 야율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너무도 멀쩡하게 버티고 서 있던 한천이 오히려 자신보다 빠르게 공격을 펼치면서, 검이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대로는 치명상을 입게 될 만한 위기였다.
순간 야율인은 선택을 내렸다.
그는 밀려드는 검을 향해 어깨를 들이밀었다. 서둘러 호신강기와 모든 내력을 집중하긴 했지만, 한천의 검은 거칠 것 없이 야율인의 어깨를 꿰뚫었다.
푸욱!
터져 나오는 피와 함께 야율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그 상태에서도 야율인은 다음 움직임을 이어 가고 있었다.
쉽사리 검을 뽑지 못하도록 몸을 비트는 순간 옆에 있던 반조가 사이로 파고들었다.
서컹.
검이 한천의 배를 그으며 스쳐 지나갔다.
한 치만 더 깊었어도 치명타가 되었을 공격.
그래도 이번엔 꽤 깊은 상처였고 당연히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했거늘…….
부웅!
재차 공격을 이어가려던 반조가 예상치 못하게 날아드는 한천의 검에 서둘러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간신히 피해 낸 반조는 순간 당황스러운 듯 한천을 살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고는 해도 배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다니…….
배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천은 아무렇지 않게 야율인과 붙고 있었다.
카카카캉!
튕겨져 나가는 야율인을 향해 한천의 검과 손에서 동시에 공격이 퍼부어졌다.
“푸웃!”
검을 막아 냈지만 결국 비집고 들어온 손바닥은 피하지 못한 야율인이 입에서 거칠게 피를 토하며 주춤거렸다.
그가 균형을 잃은 몸을 간신히 창으로 지탱하는 그때, 한천이 날아올랐다.
파파파팟!
수십여 개의 금빛 검기가 야율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 반조가 빠르게 야율인의 앞으로 다가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을 기점으로 하여 새하얀 검막이 피어오르며 쏟아져 내리는 검기를 막아 냈다.
콰앙!
순식간에 주변이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반조가 치솟아 올랐다.
부웅!
검이 떨어져 내리는 한천을 향해 날아들었고, 한천 또한 질세라 재빠르게 반응했다.
카앙! 캉!
빠르게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던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바닥에 착지했다. 발이 닿는 순간 한천과 반조는 서로를 향해 몸을 튕겼다.
서로를 향해 뻗어진 두 개의 검.
그렇지만 상대에게 먼저 닿은 것은 한천의 검이었다.
피잇!
검이 허벅지를 벴고, 반조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으읏.”
반조가 짧은 비명을 토해 내는 사이 한천이 재차 공격을 쏟아부으려 했지만, 이번엔 야율인이 대신해서 길을 막아섰다.
뒤이어 날아드는 창이 길목을 막는 걸로 모자라 빠르게 한천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피잉! 핑!
한천의 허벅지 한쪽을 훑고 지나갔다.
그 때문에 다리에서도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번쩍!
뛰어오른 한천의 주먹이 곧장 야율인을 후려쳤다.
황급히 창을 세우며 막아 낸 그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자이기에 이리도 멈출 줄을 모른단 말인가.’
부상이 생기고말고 계속해서 밀어붙여 대는 한천의 모습은 흡사 앞만 보고 달리는 말처럼 느껴졌다.
순간 한천의 몸이 회전했다.
파라라락.
날카로운 금빛 강기들이 주변으로 흩어지며 근방의 것들을 파괴했다. 그런 그의 공격에 반조와 야율인은 동시에 호신강기를 불러일으켰다.
거칠게 밀려오는 강기의 사이에서 반조와 야율인 또한 움직였다.
파앙!
둘이 쏘아 올린 강기가 동시에 한천이 있는 곳을 뒤덮었다. 두 사람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 낼 수는 없었기에 한천은 빠르게 자리를 이동하며 공격을 이어 나갔다.
슈슈슈슉.
한천 특유의 날카롭고 실용적인 검술이 빠르게 밀려들었다.
세 사람이 뒤엉킨 싸움에서 두 개의 빛줄기들이 연신 한천을 조여 들어갔다. 결국 한천은 반조의 발길질에 복부를 맞고 뒤로 밀려 나갔고, 그에 맞춰 창을 휘두르는 야율인의 공격에 황급히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다.
“후우.”
한천이 짧게 숨을 토해 냈다.
연달아 밀려드는 두 사람의 공격을 혼자서 막아 내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는데…….’
저 둘과의 싸움이 길어질수록 한천은 점점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반조의 심정 또한 복잡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이 싸움은 자신들에게 더 유리하긴 했다. 두 사람도 꽤나 큰 부상들을 입긴 했지만, 혼자서 싸워야 했던 한천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것이 공정한 대결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내이십일성의 수준에 도달한 야율인과, 십천야에서도 손꼽히는 초고수인 반조까지.
그런 자신들이 동시에 상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크게 밀리지 않고 있었다.
스윽.
반보 정도 발을 뒤로 뺀 반조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검에서 크고 매서운 강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하늘을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우우우웅!
울려 대기 시작한 검명.
그리고 그런 반조의 움직임에 맞추어 야율인 또한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창에도 강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무기에서 피어오르는 강기를 보며 한천 또한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금색 빛이 그의 검을 감싸 안았다.
반조와 야율인이 먼저 강기가 휩싸인 무기를 든 채로 한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듯 한천 또한 앞으로 내달렸다.
콰앙! 쾅!
세 사람이 뒤엉킨 싸움터에서는 연신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강기가 휩싸인 무기들의 충돌은 그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검과 검이 닿을 때마다.
검과 창이 충돌할 때마다.
마치 폭탄이 터진 것과도 같은 굉음과 함께 주변의 많은 것들이 박살 나 버렸다.
길어지는 세 사람의 싸움으로 인해 이곳은 점점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쏴아아아!
밀려드는 힘에 결국 한천이 그대로 밀려나며 반대편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콰드드득.
땅을 부수며 파고들었던 한천이 그 안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피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전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금빛 강기가 주변으로 고리처럼 회전했다.
한천이 재빠르게 검을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주변으로 돌고 있던 고리 모양의 검환들이 기다렸다는 듯 요동쳤다.
쏟아지는 금빛 검환들.
반조가 그것을 향해 자신의 힘을 뿜어냈다.
크르릉.
낮게 울리는 지축. 그에 맞춰 높게 치켜든 반조의 검이 검게 물들었다.
그가 강하게 검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그러자 반조의 검에 맺혀 있던 검은 강기가 마치 벼락이라도 된 것처럼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두 개의 힘이 충돌하며 그 가운데 공간에는 커다란 충격파와 함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근처에 있던 세 사람을 곧장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렬한 회오리가.
콰콰쾅!
세 사람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그대로 처박혔다.
개중에 가장 먼저 일어난 건 이번에도 한천이었다.
고통을 모르는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앞을 향해 내달리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울컥.
갑자기 입을 통해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동시에 한천의 입술 사이로 한 사발은 족히 될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푸우우웃.
허공으로 피를 뿜은 한천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피를 토한 탓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천이 슬쩍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확인하는 순간 한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른손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미세한 경련.
한천은 곧 오른손의 상태가 나빠질 거라는 걸 직감했다.
그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망할 오른손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버텨다오.’
평생 오른손을 쓰지 못해도 좋았다.
설령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