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혈투 ― 그대의 이름은 (1)
두둑, 두두둑.
귀명신단을 복용한 한천은 기괴한 경험을 맛보고 있었다.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기운이 전신을 짜릿하게 만들었고, 온몸의 뼈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귀명신단을 복용한 탓에 잠시간 고통을 망각한 탓이라는 걸.
그리고 귀명신단의 약효가 끝나는 순간 지금 체감하지 못한 이 모든 고통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아올 거라는 것도 알았다.
또한 그 고통은 여태까지 겪어 왔던 그 어떤 것보다 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모든 걸 감내하고 내린 결정.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몸을 타고 흐르는 거대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던 한천이 이내 호흡을 골랐다.
찰나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거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는 방금 전까지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한천의 시선이 슬쩍 자신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물론 부상을 당한 이후에도 간단한 용무는 처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상태는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꿈틀거리는 손가락에 담긴 힘이 느껴졌다.
마치…… 예전처럼.
그렇게 한천이 잠시 감회에 젖어 있던 찰나, 야율인의 명령이 떨어졌다.
“약점을 이용한다 해서 비겁하다 생각지 마시오. 저자는 오른팔을 쓰지 못하니, 그쪽을 집중 공략하라!”
야율인의 명령에 혈기군단 무인 중 십여 명이 재빠르게 오른쪽으로 회전했다. 동시에 다른 네 명이 방어하기 힘들게 하려는 듯 왼쪽으로 치고 들어갔다.
부우웅!
바람을 가르며 네 사람의 신형이 한천의 좌측을 기준으로 사방을 점하며 치고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에서 검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사삭.
귓가를 파고드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하지만 더욱 위험한 건 오른쪽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는 십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는 맹수와도 같은 사내, 야율인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창을 치켜세운 그가 매섭게 날아들었다.
그들은 한천의 약점을 파악했다 판단해서인지 대놓고 오른쪽의 공격에 집중했다. 반면 왼쪽은 한순간만 한천의 손을 잡아 둘 정도의 병력을 배치해 둔 상황.
분명 방금 전이었다면 위험했을 것이 분명한 공격이었지만…….
피잉.
한천이 쥐고 있던 검을 가볍게 허공으로 던져 버리더니, 이내 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다. 그의 손바닥에서 뻗어져 나온 장력이 왼쪽에서 달려들던 이들을 매섭게 덮쳤다.
순간적으로 주변을 물들이는 금빛 기운.
그 금빛 기운은 날아드는 검기들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걸로도 모자라 뒤편에 달려들던 이들까지 휩쓸었다. 동시에 한천은 손을 뻗어 허공으로 던져 올렸던 검을 움켜쥐려고 했다.
순간 오른편으로 달려들던 무인들도 그에 맞춰 반응했다.
몸을 회전하는 바람에 방향이 바뀌긴 했지만, 그 정도를 뒤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굳이 곧바로 공격할 수 있는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몸을 튼 건 그곳이 한천의 약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한천이 허공으로 띄어 올린 검을 움켜쥐는 것도 왼손일 거라 여겼다.
그런데…….
움찔.
달려들던 야율인의 눈썹 끝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일순 거짓말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밀려드는 알 수 없는 불안감, 그리고 떨어져 내리는 검을 향하는 한천의 손은 바로…….
‘오른손!’
야율인은 앞장서서 달려드는 수하들을 향해 서둘러 소리치려고 했다.
멈추라고. 당장 멈추고 옆으로 피하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오른손이 상대의 약점이라 확신한 탓에 자신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탓이다.
야율인은 서둘러 창을 정면으로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한천의 손에서 시작된 금빛 강기가 파도가 되어 주변을 덮쳐 왔다.
콰콰콰콰쾅!
바닥이 물결처럼 치솟아 올랐고, 그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박살 났다.
우두두두두.
하늘로 솟구쳤던 돌들이 매섭게 쏟아져 내렸다.
마치 비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런 한천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게 된 십여 명에 달하는 혈기군단의 무인들은 그 행적을 찾을 수도 없었다.
단 한 명.
창을 세운 채로 버티고 선 야율인을 제외하고는.
그렇지만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 낸 야율인의 상태 또한 멀쩡하지는 않았다.
양쪽 소매가 터져 나갔고, 그의 창을 기점으로 하여 양옆으로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그곳에 버텨 선 야율인의 입으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금빛 강기로 주변을 휩쓸어 버린 한천이 검을 어깨에 걸쳤다.
툭.
검을 쥐고 있는 그의 손.
다시 한번 확인해도…… 오른손이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야율인이 입을 열었다.
“분명 그 오른손은…….”
못 쓰지 않았냐는 말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 그때. 한천이 검을 쥔 자신의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오른손 말입니까? 보시다시피 멀쩡한 것 같은데.”
파바바박!
한천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으로 혈기군단이 빠르게 포위망을 재구성했다.
순간적으로 열 명이 훌쩍 넘는 이들을 쓸어 버렸지만 그건 아직 일부에 불과했고, 그것에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내서 지금까지 벌어진 수차례의 격돌.
그 과정에서 혈기군단의 무인 중 서른 이상이 죽었다.
최소 일류에서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로 구성된 정예 부대인 혈기군단이 한 명을 상대로 이리도 쩔쩔매고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가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야율인이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중원에 이런 숨겨진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사실 그는 자신했었다.
중원에서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기껏해야 다섯이 안 될 거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처음 보는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자신이 짓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야율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혈기군단 모두가 뛰어난 무인들인 만큼, 그들은 방금 전 한천이 뿜어낸 무위가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지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다.
적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한천에게도 느껴졌다.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그들의 눈빛에 있는 건 두려움이었다.
한때는 익숙했지만, 이제는 잊고 있었던 그런 분위기였다.
‘이 기분 오랜만이네.’
기분이 썩 괜찮았지만, 아쉽게도 이런 감정에 취해 있을 여유는 없었다. 백아린을 구해야 했고, 귀명신단의 약효가 얼마나 갈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장에야 자신이 이들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부를 십 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도 뒤편에 선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자.
십천야의 반조.
‘우선은 저자부터 싸움터로 끄집어 내려야겠군.’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우웅.
황금색의 빛이 한천의 검 끝으로 밀려들었다. 이내 그 기운들이 커다란 구슬이 되어 허공으로 갈라졌다.
금력대환파(金力大丸破).
스스스스스!
내력이 가득 담긴 구슬들이 한천의 주변으로 빼곡하게 차올랐다.
순간 한천이 땅을 강하게 내리밟으며 주변으로 내공을 폭발시켰다. 그러자 주변에 생겨났던 금색 구슬들이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쏟아져 나갔다.
피잉! 핑!
동시에 한천의 몸이 회전하며 남아 있던 구슬들이 마치 바람에 휩쓸린 것처럼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그곳에는 이들을 이끄는 야율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야율인은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금색 단환 모양의 공격을 보며 서둘러 창을 움직였다.
츠츠츠!
창끝에 맺힌 강기가 날아드는 공격을 갈랐다.
파바바방.
미칠 듯이 회전하는 그의 창이 수십여 개가 넘는 단환 모양의 기운들을 막아 냈다. 그렇지만 야율인과는 달리 혈기군단의 무인들 대부분은 그걸 막아 낼 능력이 없었다.
쿵!
사방에서 혈기군단 무인들이 금색 기운에 적중당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즉사를 한 이들도 제법 됐고, 부상자들은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나자빠지는 수하들의 모습을 본 야율인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평소 그리 흥분하지 않는 그답지 않게 지금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것이다.
공격을 받아 내기 위해 주춤거리며 물러섰던 야율인이 살기를 띠운 채로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그의 손에 들린 창이 움직였다.
순간 여덟 갈래의 거대한 기운이 기다렸다는 듯 땅을 가르며 한천을 향해 밀려들었다. 뒤쪽에 있는 혈기군단을 베어 넘기던 한천은 서둘러 몸을 비틀며 검을 휘둘렀다.
카카카캉!
두 개의 힘이 충돌하는 순간 주변으로 커다란 충격파가 생성됐다. 동시에 한천과 야율인의 몸이 서로 뒤편으로 밀려 나갔다.
그사이 한천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혈기군단의 무인들 중 세 명이 밀려나는 그를 기습했다.
스스슥.
빠르게 베고 지나가는 검.
한천은 빠르게 피해 냄과 동시에 세 사람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공격을 가했던 세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사이 한천은 슬쩍 자신의 허벅지를 바라봤다. 셋 중 한 명의 공격이 허벅지를 베고 지나가고야 만 것이다.
검기가 실린 공격이었기에 상처는 제법 깊었지만, 한천은 아무렇지 않게 자세를 잡았다.
귀명신단의 효과로 고통도 잊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 약이군.’
고통을 잊는다는 것, 그건 그만큼 무모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모를 정도로 무감각해지는 상태로 어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랬기에 황궁에서도 실험을 중지한 이 귀명신단의 위험성을 한천은 자신의 몸을 통해 똑똑히 체험하고 있었다.
한천의 시선에 창을 강하게 쥔 채 옆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기는 야율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러자 한천 또한 덩달아 반대로 움직이며 그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귀명신단을 복용해서 신체의 능력도 올라갔고, 예전처럼 오른팔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만만치 않은 자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야율인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름은?”
반조가 그러했던 것처럼 야율인 또한 오늘 자신이 죽이기 위해 온 한천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저 적화신루의 부총관이라고만 알았고, 그거면 충분하다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알고 싶었다.
저 사내의 이름을.
그 목소리에 담긴 마음을 알아서일까?
한천이 씩 웃으며 답했다.
“한천.”
“그 이름 기억하겠소.”
말과 함께 창을 고쳐 잡는 야율인을 향해 한천이 특유의 어투로 말했다.
“기억은 내가 해야지 않겠습니까. 죽는 건 당신일 텐데.”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소.”
자세를 고쳐 잡은 그의 등 뒤에서 성난 맹수와도 같은 섬뜩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생각보다 피해가 컸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 온 것은 혈기군단과 자신.
그리고 반조까지 있었으니까.
그런 야율인에 맞서 한천 또한 자신의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금빛 기운이 한천을 뒤덮었다.
이미 상대의 실력을 안 이상 야율인 또한 모든 걸 걸 생각이었다.
끓어오르는 기운.
동시에 몸 주변으로 폭발하듯 힘이 터져 나갔다.
쿠카카캉!
그리고 그 힘을 몸에 담은 채로 야율인이 내달렸다. 야율인의 창끝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던 붉은 기운이 곧장 수십여 개의 형체로 돌변했다.
적파아수라(赤波阿修羅)라는 이름의 초식이었다.
야율인이 자랑하는 절초 중 하나였고, 이 무공의 파괴력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주변의 것들이 그런 야율인의 기운에 반응하듯 빨려 들어갔다.
공격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혈기군단 또한 약속되어진 절초들을 펼치며 한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몰려드는 날카로운 공세들 속에서 한천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검을 쥔 오른손의 핏줄이 꿈틀했다.
오른손을 다치고 수십여 년간 봉인해야만 했던 무공이 한천의 손을 따라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장군부 무예 십이식 절초.
금황천(金皇天)!
우우웅!
허리와 무릎을 반쯤 굽힌 상태로 뒤로 움직인 한천의 검에서 커다란 금빛 기운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밀려들었다.
그리고 적들의 공격이 한천에게 닿으려는 그 찰나!
번쩍!
금빛 기운을 담은 검이 허공을 갈랐고, 순간 주변으로 금빛 물결이 출렁였다.
콰아앙!
일순 주변의 모든 것이 흔들렸고, 동시에 커다란 폭발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하늘로 수많은 이들이 솟구쳐 올랐다가 고꾸라졌고, 그들 가운데로 무수히도 많은 충격파들이 연이어 밀려 나왔다.
콰콰쾅! 콰앙!
그렇게 큰 소란과 함께 모든 것이 씻겨 나갔을 때, 인근에 자리하고 있던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지형지물도 아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순간적으로 달려들었던 혈기군단의 수많은 무인들 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먼지가 걷힌 그곳에는 검과 창을 맞댄 채로 서 있는 두 사내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쏟아지는 수백여 개에 달하는 공격을 받아 내야만 했던 한천은 이마에서 터져 나온 피로 얼굴을 적셨고, 입고 있는 옷 또한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너덜너덜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그의 신체 곳곳은 깊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물론 그런 한천과 마주한 야율인의 상태 또한 좋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창을 쥔 손은 아예 가죽이 벗겨졌는지 피투성이였다. 거기다가 그 또한 몸 곳곳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특히나 목과 어깨 부분에는 꽤나 깊은 상처를 입어 연신 피가 쏟아져 나왔다.
겉보기에 상태가 더 나빠 보이는 건 한천 쪽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입은 부상의 대가는 톡톡히 받아 준 상태였다.
이번 공격 하나만으로 달려들던 혈기군단의 무인들 오십여 명을 쓸어버렸으니까.
이제 혈기군단의 남은 인원 숫자는 고작 백여 명에 불과했다. 처음 나타났을 때에 비하면 반밖에 되지 않는 숫자였다.
엄청난 격돌.
그 격돌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저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바라보고만 있던 반조의 눈동자에 확신이 서렸다.
궁금했다.
한천이 펼치는 무공의 정체가 무엇인지.
군부의 무공인 것 같다는 건 아까부터 생각 중이었지만, 이번 격돌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반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찾았다.”
쥐고만 있던 검에 힘을 불어넣으며 반조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전장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며 중얼거림을 이어 나갔다.
“재밌네. 이런 곳에서 대장군부 무공 금황천을 보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