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263화 (262/293)

263화. 선택 ―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1)

매유검을 뒤로한 채 적진으로 뛰어드는 백아린의 선택은 언뜻 보면 판단 착오로 비칠 수도 있었다.

일대일 대결을 포기하고 다수를 혼자서 상대하게 되는 모양새였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백아린이 내린 최선의 결단이었다.

상대가 매유검 하나였다면 선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우내이십일성 중 한 명인 추풍량까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오히려 이런 위험해 보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말만 일대일의 대결이지 자신이 매유검을 압박해 나가면 결국 추풍량이 도우러 나설 게다.

그렇다면 백아린은 이미 힘이 빠진 상황에서 둘을 상대해야만 했다.

물론 그 또한 버거운 일이지만 더욱 큰 문제는 추풍량과 함께 압박하고 들어올 저 많은 숫자의 무인들이었다.

내공 소모가 큰 상황이라면 그 많은 숫자를 감당해내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백아린의 무공은 파괴적이고 범위 또한 크다.

이런 내공 소모가 심한 무공이니, 펼칠 수 있을 때 그 장점을 십분 발휘해야만 했다.

그랬기에 백아린은 힘이 빠지기 전에 다소 위험하더라도 상대의 숫자를 최대한 줄여 놓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알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쿠웅!

허공으로 치켜들었던 대검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일부 무인들이 휩쓸려 나갔다. 백아린의 대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한쪽 공간을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퍼엉.

추풍량이 이끄는 적풍대의 무인들 중 공격을 버텨 내지 못한 이들이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순식간에 십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쓰러졌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순 없었다. 아직 이곳에는 이것의 수십 배에 달하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가 이제부터는 이토록 방해 없이 공격을 펼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매유검과 추풍량이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감히!”

부웅!

그녀의 뒤편에서 매유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날아드는 기민한 검의 움직임을 읽어 내며 백아린이 서둘러 몸을 옆으로 피해 냈다.

스윽.

검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직후 백아린은 다가온 매유검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파아앙!

마찬가지로 손바닥으로 받아쳐 낸 매유검은 반대쪽 손을 휘둘렀다. 그 손에 들린 검이 순식간에 공간을 찢어발겼다.

부아아악!

기괴한 소리와 함께 파고드는 날카로운 검기들, 백아린은 망설임 없이 내력을 폭발시켰다. 대검을 감싼 기운들이 사방으로 팍 하고 퍼져 나갔다.

동시에 주변으로 커다란 불기둥이 치솟았다.

쾅! 쾅쾅! 쾅!

백아린이 서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하여 원형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불꽃의 고리들.

매유검은 검을 곧추세운 채로 검막을 형성해 밀려드는 폭발을 막아 냈다.

주르륵.

몸은 밀려 나갔지만 그는 폭발 속에서 멀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백아린이 노린 건 매유검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폭발에 주변의 적풍대 무인들 일부가 피해를 입고 쓰러졌다.

쓰러져 나가는 수하들의 모습에 추풍량은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이이이!”

“뭣들 해! 어서 뒤로 물려!”

매유검은 혼자서 백아린을 꺾고 싶었기에 적풍대를 전장에서 이탈시키기를 원했다.

상관인 매유검의 명령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추풍량은 수하들에게 포위망만 유지한 채 뒤로 물러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물러나도록 놔둘 백아린이 아니었다.

적풍대 무인들이 뒷걸음질 치는 그사이를 백아린이 파고들었다.

우우웅!

낮게 울기 시작한 대검에 맺힌 새하얀 검강.

그 검강은 커다란 폭풍이 되어 주변에 있는 이들을 끌어당겼다.

“으아앗!”

몇몇 이들의 비명이 터져 나온 사이.

쾅!

폭발과 함께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무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밀려 나갔다.

연달아 적풍대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가는 백아린의 모습에 매유검은 그녀의 저의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일부 무인의 숫자를 줄이는 정도로 그칠 생각이 아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들을 싸움에 개입시킨 채로 자신과 맞설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순간 추풍량의 외침이 들려왔다.

“무리입니다! 계속 그냥 피하기만 하면서 거리를 벌리다가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매유검으로서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상대의 술수에 놀아난다면 자신의 꼴이 어찌 되겠는가.

결국 이긴다 한들 모두에게 우스운 모양새가 되고야 말 게다.

그렇게 매유검이 생각을 정리한 직후.

주변에 있는 적풍대를 향해 다시 백아린이 움직이고 있는 그때였다.

부우웅!

밀려드는 강한 기운을 감지해 낸 그녀가 다급히 옆으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마음먹고 시작한 매유검의 공격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의 검이 계속해서 빈틈을 파고들었다.

카앙! 캉!

재빠르게 검을 밀쳐 내는 사이 매유검의 몸이 빠르게 위치를 바꾸었다.

순간적으로 뒤로 움직인 매유검의 검이 갑자기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스산한 기운.

그걸 감지하는 순간 백아린은 직감했다.

위험하다고.

곧 매유검의 검이 폭발하듯 힘을 뿜어냈다.

지옥은환검(地獄隱煥劍)!

앞으로 내질러진 그의 검에서 붉은 기운이 마치 커다란 폭포처럼 밀려 나왔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파괴적인 일격.

백아린은 매유검이 이런 공격을 펼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백아린이 물고 늘어지고 있던 적풍대의 인물들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매유검은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치명적인 공격을 쏟아 냈다.

그들의 생사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밀려드는 커다란 힘, 그 폭발 속으로 주변 무인들이 휘말려 가는 걸 보며…….

백아린 또한 대검을 치켜들었다.

바라던 바였으니까.

그녀의 대검이 밀려드는 거센 기운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쩌엉!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그들이 딛고 있던 땅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주변을 시작으로 하여 곳곳이 터져 나갔다.

쿠쿠쿵!

연달아 터져 나오는 충격음이 주변을 휩쓸고 갈 무렵. 대검으로 밀려드는 공격을 받아 냈던 백아린이 입을 오물거리다 침과 뒤섞인 피를 뱉어 냈다.

겉보기에는 멀쩡했지만 급하게 내력을 끌어올리며 막아 내야만 했기에 몸 안쪽에 제법 타격이 있었던 모양이다.

피를 뱉어 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자기편까지 같이 공격하다니 정말 너도 어지간히 미친놈이네.”

백아린의 말에 장포 안쪽에 자리한 매유검의 입꼬리가 비웃듯 꿈틀댔다.

“네가 원하던 게 이거잖아. 원한다면 얼마든지 맞춰 주지. 나도 이제 이딴 놈들은 신경 쓰지 않고 널 공격할 생각이거든.”

섬뜩한 선전포고.

하지만 백아린은 그런 그의 경고에 내심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아군을 신경 쓰지 않고 공격하겠다는 매유검의 말은 어찌 생각하면 백아린 입장에서는 호재로 보일 수도 있다.

백아린의 적들 중 일부는 매유검의 공격으로도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그건 단순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는 꼴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지금 매유검의 결정은 백아린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이들을 족쇄로 이용하여 최대한 숫자를 줄일 때까지 매유검이나 추풍량의 움직임을 제한시키는 쪽이 백아린에게는 더욱 이득이었으니까.

그 둘이 아니라면 백아린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만한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매유검이 이제 아군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백아린에게 모든 공격을 쏟아붓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은 곧 이제 백아린이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을 제압하는 데 쏟아부을 힘이 줄어들었다는 의미고, 동시에 더욱 치명적인 공격이 날아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상대를 바라보는 백아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 * *

반조와 마주한 한천은 주변을 가볍게 둘러봤다.

주변은 이미 순식간에 몰려들기 시작한 무인들로 가득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한천이 입을 열었다.

“설마 우리 대장한테도 사람을 보냈습니까?”

“당연한 질문을 하네.”

대답을 듣는 순간 싸늘하게 변해 있던 한천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덩달아 순간적으로 주변의 공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오묘한 변화를 코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반조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가 흥미 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 대체 누구야?”

여태 감춰 왔던 한천의 진짜 눈빛을 보는 순간 반조는 그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했다.

이런 눈빛과 이런 분위기.

결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천이 말했다.

“내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다더니 이제 와서 궁금해진 모양입니다? 그새 이름을 까먹을 정도로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 진짜 네 정체를 물어보는 거야. 적화신루 사 총관의 부총관 한천이라는 작자 말고, 진짜 네가 누구냐고.”

“그건 모르셔도 되고, 우리 대장한테는 어느 정도나 간 겁니까?”

“너한테 온 것과 전력상으론 비슷하겠지? 물론 숫자는 그쪽이 훨씬 많겠지만.”

반조는 두 사람을 죽이기 위해 모인 인원들을 네 개로 나눴다.

우선은 두 사람이 있는 이 지역을 크게 포위한 이들이 있다.

이 일에는 뇌룡검대의 절반 가까이가 투입됐다.

혹시라도 외부에서 도움이 오거나, 둘 중 하나라도 도망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후의 보루로 대기시켜 놓은 병력인 셈이다.

그리고 뇌룡검대의 나머지 절반과 그들의 수장인 여명은 대기조에 속해 있다.

대기조는 상황을 보고 있다가 입구 쪽에서부터 지원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말이 대기조이지 위치상 백아린이 있는 곳과 가까워서 실질적으로 그쪽에 투입될 인원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그리고 백아린을 죽이러 간 매유검과 적풍대. 거기다가 추풍량까지.

매유검과 두 개의 부대는 그렇게 쓰였고 그 외의 나머지가 모두 이곳으로 왔다.

십천야인 반조.

그리고 우내이십일성인 두 사람조차 눈치를 볼 정도의 실력자이자, 십천야 최고의 무력 단체라 불러도 손색없을 혈기군단을 이끄는 야율인.

혈기군단은 빠르게 한천의 주위를 좁혀 오고 있었다.

반조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한 거 같은데. 당신 대체 진짜 정체가 뭐…….”

스릉.

말을 내뱉던 반조가 움찔했다.

한천이 자신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아 들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인상만이 감도는 얼굴을 한 그가 짧게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겠군요. 비켜 주면 좋겠는데 역시 그러진 않겠죠?”

한천의 말에 반조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지금 그의 말투는 흡사 이곳을 빠져나가, 백아린을 돕겠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반조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이마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내 눈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은데. 이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지금 네가 그쪽 걱정을 할 땐가? 본인 목숨부터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안 비켜 준다는 말로 듣고.”

“이봐, 지금 내가…….”

처음부터 반조의 말 따위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는지 한천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 순간.

훅.

갑자기 거리를 좁혀 온 한천의 검이 반조의 목을 찌르고 들어왔다. 말을 이어 가고 있던 그로서는 기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당장에 목이 꿰뚫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상황이었지만…….

휘잇! 퍽!

재빠르게 목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주먹을 들어 한천의 어깨를 후려쳤다.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선 반조가 서둘러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으로 미약하긴 하지만 축축한 피가 느껴졌다.

종이에 베인 정도의 얇은 상처.

그렇지만 반조는 꽤나 놀란 눈치였다.

아무리 말을 하고 있는 상황에 펼친 급습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한천을 바라보는 반조의 눈동자가 빛났다.

‘내 예상대로 보통 놈이 아니었어.’

그리고 놀란 건 비단 반조만이 아니었다.

공격을 펼쳤던 한천 또한 적잖이 놀란 상황이었다.

이걸로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제법 깊은 상처 정도는 낼 거라 생각했는데…….

순간적인 기습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거의 완벽에 가깝게 공격을 피해 내는 상대라니. 십천야 중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라 들었거늘 그 말이 허언은 아닌 듯싶었다.

일전에 백아린이 꺾은 십천야인 주란이나 왕도지보다 조금 뛰어난 정도이길 바랐거늘 아쉽게도 이 반조는 그들과 완전히 다른 수준의 무인이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지닌 반조의 모습에, 그를 바라보는 한천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가능하면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짓고 백아린을 도우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듯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