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거짓과 거짓 ― 입맛이 없어서 (1)
천무진이 십천야의 본거지에 몸담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천무진의 생활은 더욱 단순하게 변해 있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연무장에서만 보내야 했고, 그 외의 활동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천룡비공을 익히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건 천무진의 의지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천룡비공을 완성시키고, 그로 인해 천룡성의 진짜 힘인 천룡혼을 얻고자 하는 천지광의 욕심이 개입되어 있었으니까.
천무진이 천운백에게서 천룡비공의 비기까지 전수받은 그날 이후로 그는 세상의 어떠한 일에도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천룡혼을 건네받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이 모든 건 순식간에 사라질 신기루와도 같은 것들이다.
지금 천지광의 관심을 끄는 건 오로지 하나.
천무진이 천룡비공을 완성시키는 것뿐이었다.
오늘도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연무장에 박혀 있던 천무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계속해서 이어진 내공심법으로 인해 천무진은 무척이나 지친 상태였다.
천룡비공의 절초인 천추나락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보통 무공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기운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양의 내공을 움직일 수 있도록 혈도를 넓히는 게 기본이었다.
천운백은 천무진에게 두 시진 이상 이 심법을 펼치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그만큼 몸에 부담이 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지광은 달랐다.
한시라도 빨리 천룡혼을 완성시키길 바라는 그였기에 천무진의 몸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더욱 많은 시간을 내공심법에 투자하기를 바랐다.
그의 명령이라면 뭐든지 따를 수밖에 없는 천무진으로서는 최대한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내공심법에 쓰는 시간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에 세 시진 반 이상이나 혈도를 넓히는 데 사용했다.
몸 안에서 계속 폭발하듯 충격이 일었고, 천무진은 그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힘겹게 눈을 뜬 천무진이 슬쩍 입을 열었을 때였다.
주르륵.
한 줄기 피가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천무진이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젠장.”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 심각한 내상을 입거나, 큰 문제가 생긴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무리하게 상황을 진전시키는 만큼 돌아오는 그 모든 피해는 오롯이 천무진의 몫이었다.
몸을 일으켜 세운 천무진은 힘겹게 팔을 들어 올렸다.
사지가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였고, 입안에서는 계속해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머리는 어질어질했고, 속에서는 구역질이 치밀었다.
지친 탓에 점점 시야가 어지러워지자 억지로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그가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더는 몸이 버텨 내지 못할 것 같아 조금이나마 침상에 몸을 눕히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천무진이 막 연무장을 벗어났을 때였다.
그가 나오기 무섭게 입구 바깥쪽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상대가 갑작스레 다가왔지만 천무진은 별반 놀라지 않았다.
그가 누군지 알았으니까.
상대는 사십 대 중반 정도의 사내였다. 평범한 얼굴의 그는 언제나 이곳에서 무표정하게 천무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처럼 커다란 쟁반 하나를 든 채로.
사내가 말했다.
“드시지요. 어르신이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가 내미는 쟁반 위에는 커다란 약사발을 비롯한 몇 가지 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친 속을 달래기 위한 각가지 약들과 몸에 좋은 영약들이었다.
천지광은 천무진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걸 누구보다 원치 않았다.
그랬기에 이처럼 몸에 좋은 약들로 최대한 상태를 관리해 주고 있었다.
억지로 자신을 쥐어짜면서 약까지 챙겨 주는 행태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천무진은 별다른 말 없이 쟁반 위에 자리하고 있는 약 사발을 들어 올렸다.
꿀꺽꿀꺽.
약사발에 담긴 것을 단숨에 목으로 넘긴 천무진이 단환 하나를 입에 넣고 내상을 회복시키고 있는 그때였다.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공자님을 옆에서 모실 분이 오셔서 소개시켜 드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나한테?”
누군가를 옆에 붙이겠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리고 말로는 모신다고 하지만, 옆에 붙일 그 당사자가 감시자와 다를 바 없을 거라는 사실을 천무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누군가가 옆에서 모실 거라는 사내의 말이 그리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사내가 뒤편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오시지요.”
승낙이 떨어지자 그제야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안쪽으로 조심히 들어섰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관심 없고, 그저 천지광이 자신의 옆에 감시자를 붙였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던 천무진이다. 하지만 막 상대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표정이 급변했다.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천무진이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천무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감이 왜 여기에…….”
“오랜만에 뵙습니다. 작은 주인님. 아니 이제는 다르게 불러야 할까요?”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상대는 다름 아닌 남윤이었다.
잠시 당황했던 천무진이었지만 이내 그의 표정은 싸늘하게 변했다.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의미는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영감도 배신자였군.”
말을 내뱉는 천무진의 목소리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것은 사부인 천운백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가장 믿고 지냈던 측근인 두 사람 모두가 십천야였다니…….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천무진을 옆에서 봐 온 남윤은 지금 그의 심기가 어지럽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물론 남윤은 배신자가 아니었고, 현재 천무진이 어떠한 상황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속아 주셔야겠습니다. 작은 주인님.’
남윤은 자신의 진짜 정체를 천무진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건 지금 천무진의 상황 때문이었다.
천무진에게 이 진실이 들어간다는 건 곧 천지광에게도 알려질 가능성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그랬기에 남윤이 사실은 이중 첩자로 천운백과 천무진을 뒤에서 돕고 있던 조력자라는 사실은 감춰야만 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상황이 이러했기에 오히려 남윤은 더욱 뻔뻔하게 나섰다.
“이렇게 다시 모시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쪽에서의 일이 어찌 되었든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리지요.”
“……그러든지.”
미묘하게 변해 있는 말투가 의미하는 감정이 자신에 대한 분노라는 걸 알면서도 남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옆으로 비켜선 남윤이 짧게 말했다.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남윤과 함께하는 것이 무척이나 불편했지만, 지금은 천지광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지내는 게 목적이었다.
그리고 설령 그럴 필요가 없다 한들 천무진은 남윤에게 화를 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자신 또한 배신자인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그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은가.
그랬기에 천무진은 들끓는 속을 꾹 참으며 자신의 거처를 향해 나아갔다.
그의 뒤로 따라붙은 남윤이 천무진의 안색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요즘 통 못 드신다던데 특별히 좋아하시던 음식으로 제가…….”
“아니.”
평소 천무진은 남윤의 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일행들에게 그의 음식 실력을 자랑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남윤의 말을 잘라 낸 천무진이 슬쩍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입맛이 없어서.”
* * *
천무진과 떨어지게 되긴 했지만 백아린은 여전히 바빴다. 그녀는 비밀리에 천무진을 위한 일들을 하고 있었고, 그뿐만이 아니라 십천야 쪽에서 들어오는 의뢰 또한 전담하는 상태였다.
아직까지는 적화신루를 신뢰하지 않는 건지 자잘한 의뢰들이 전부긴 했지만, 이 또한 꽤나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것들이었다.
덕분에 백아린의 하루는 쏘아진 화살처럼 지나가기 일쑤였다.
“하아.”
의자에 걸터앉은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천이 웃는 얼굴로 농담을 던졌다.
“어휴, 며칠 못 보셨다고 그리도 보고 싶으십니까?”
천무진과 헤어진 지도 열흘이 훌쩍 지났다.
종종 서찰을 통해 연락을 보내오긴 했지만, 얼굴을 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실 백아린은 이미 그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서찰이 날아왔고,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대충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천의 장난기 어린 말에 백아린이 답했다.
“그러게. 밥은 잘 먹고 지내는지 걱정이네.”
한천은 농담을 던졌거늘 백아린은 진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사실 적진으로 스스로 들어간 천무진의 판단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외부에 있는 자신으로선 전혀 도울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천지광이 천무진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도 알 수 없었다.
허나 이것이 천무진의 선택이었고, 가장 위험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만큼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천무진과 헤어지고 난 이후 백아린과 한천은 새로운 거처로 안내받았다.
장소는 그대로 형동이었고, 그곳은 세 채의 건물이 있는 자그마한 장원이었다.
현재 두 사람은 몇 명의 식솔이 딸린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과 식솔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
그렇지만 사실 백아린이나 한천 두 사람 모두 그곳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식솔들로 보이지만 그들 또한 십천야의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그들의 수장에게 보고가 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랬기에 천무진을 위한 뭔가를 할 때는 외부에 자리한 곳에서 일을 처리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끼이익.
문이 열리기 직전부터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던 두 사람이다. 그리고 이내 열린 문을 통해 죽립을 쓴 방문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오늘 이곳으로 오기로 한 사람.
바로 의선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백아린과 한천이 동시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셨습니까?”
한천이 먼저 상대를 반갑게 맞았고, 이내 의선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죽립을 벗었다.
“다들 기다리고 있었군.”
의선은 현재 이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을 맡아 주고 있었다.
천무진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자모충.
그것에 대해 더욱 알아내고, 또 그것을 고칠 방도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에 의선은 마교를 떠나 천무진과 가까운 이곳으로 새로운 거점을 잡은 상태였다.
물론 이건 아주 은밀히 진행되었고,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의선의 움직임이 십천야에게 들키지 않은 것은 바로 그들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던 귀문곡이 적화신루에게 먹혀 버린 덕이다.
그리고 현재 십천야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또한 적화신루였으니 이 정도의 건수를 감추는 건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현재 천지광은 천룡혼을 제외하고는 주변의 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상황.
덕분에 의선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은밀히 움직일 수 있었다.
백아린이 준비해 둔 비밀 거처에 들어선 의선이 물었다.
“준비는 다 되었는가?”
“네, 필요하신 것들의 준비는 다 끝내 놨어요.”
의선은 미리 연구를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 백아린에게 의뢰를 해 두었고, 덕분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구비되어져 있었다.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향해 백아린이 물었다.
“혹시 뭔가 더 알아내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있네.”
물어 오는 질문에 의선이 곧바로 답했다.
검산파에서 훔쳐온 붉은 보석과 자모충에 대해 계속해서 조사를 이어 오던 의선이었다. 천무진의 치료에 있어 가장 막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그가 무언가 더 알아냈다는 말에 백아린이 눈동자를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뭐죠?”
“일전에 자네도 그 자리에 함께해서 알 걸세. 그 붉은 보석으로 인해 천 공자가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했던 걸.”
“기억해요. 그런데요?”
“그 사실에 대해 연구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네. 제아무리 몸 안에서 살고 있는 자모충이라고 해도 그렇게 긴 시간 붉은 보석에 노출되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어야 할 정도였거든. 그런데도 자모충은 살아 있었지. 그 부분이 이상하다 싶어 조사를 해 봤는데…… 자모충 중에 특별한 놈이 있더군.”
자모충은 일반적으로 어미와 새끼로 구성된 한 쌍의 벌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 특별한 존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여왕자모일세.”
“그런 게 있어요?”
“그렇다네. 자모충 자체가 구하기 힘든 벌레인데, 개중에서도 여왕자모는 아주 특별하지. 그만큼 대단한 생명력과 더욱 강한 효과를 발휘하는 놈이야. 아마도 천 공자의 몸 안에 심어져 있는 자모충은…… 여왕자모가 아닐까 싶네.”
보통의 자모충이었다면 붉은 보석을 훔치던 당시나, 자신과 함께 실험을 했던 그날 천무진의 몸 안에서 사라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왕자모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제거하는 것에 있어 더욱 어려울 게 분명했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가능을 어떻게든 해내는 것.
그것이 지금 의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백아린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탁할게요. 의선 어르신.”
그런 그녀를 향해 의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맡겨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