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진정한 목적 ― 처음부터 원하는 건 하나였다 (2)
십천야의 거점.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조용한 그곳이었지만 내부에선 커다란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천무진에 대한 일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목적을 위해 떠나보내 놨던 천무진.
봉인해 두었던 그의 기억을 돌려놓기로 결정을 내린 이후 십천야를 이끄는 수장인 어르신이라는 존재는 계속해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무진의 기억을 되돌리는 건 그에게도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천무진과 그의 동료들의 맹활약에 십천야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으니까.
무척이나 늦은 밤이었지만 어르신이라는 그 존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침상에 누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잠들지 못하던 그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장 안에 자리하고 있던 어르신이 이내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술상을 들여라!”
“예, 곧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명령에 바깥에 있던 수하가 재빠르게 답했다. 그리고 이내 술과 안주로 가득 찬 술상을 든 수하가 방 내부로 들어섰다.
그는 휘장 바로 앞에 술상을 내려놓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휘장 안쪽에서 어르신의 손이 움직였다.
스윽.
그의 손바닥 안에서 휘몰아치는 내공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에 맞춰 술상이 휘장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공섭물로 술상을 휘장 안쪽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그렇게 술상을 앞에 둔 어르신의 그림자가 휘장 너머에서 꿈틀거렸다.
쪼르르.
술을 따르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그 그림자가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렇게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들이켰을 무렵.
술잔을 입에서 뗀 어르신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주란.”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주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부복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잠이 오지 않으시는 것 같아 잠시 뵈러 왔어요.”
“……그런가.”
짧은 말과 함께 휘장 안쪽의 그림자가 다시금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방 안을 단숨에 향기로 가득 채워 버릴 정도로 값비싼 술이었다.
휘장 안쪽에 있는 어르신의 눈치를 살피던 주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속이 복잡하신 모양이에요.”
“잘 모르겠구나. 이것이 복잡한 건지 아니면 기대감이 밀려오는 것인지.”
천무진의 기억을 되돌리며 이번 싸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로서는 기대감과 걱정이 반씩 뒤섞인 느낌이었다.
사실 천무진이 십천야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주란은 이번에 알게 됐다.
그만큼 극비 사안이었기에 십천야 중에서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어르신을 통해 천무진은 절대 죽여선 안 되고, 추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정도의 언급만 들어왔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 일이 시작되며 어르신은 그간 감춰 왔던 진실을 드러냈다.
천무진이 십천야의 한 명이었다는 사실에 주란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르신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려 이십여 년이 넘게 준비된 계획이었고, 현재로선 그것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무진은 천룡성의 제자로 자랐고, 십천야의 가장 큰 적인 천운백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 이런 와중에 천무진의 기억이 돌아와 자신들이 편으로 돌아선다면…….
‘전설의 천룡성이 무너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천룡성은 무림의 전설이었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천외천의 존재.
그들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무림의 정파와 사파, 마교까지도 앞다투어 그들의 부탁에 응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역시나 천룡성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 무림에 쌓아 온 업적 때문이리라. 무림의 문파들 중 그들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이들이 없고, 그들에게 은혜를 갚지 않아도 될 이들이 없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그토록 강건한 천룡성을 상대하기 위해 십천야는 오랫동안 힘을 키워 왔다.
무림 곳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십천야의 힘.
그것은 시간이 흐르며 커다란 결실을 보았고,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강대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상대가 천룡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닌 특별함, 그 앞에서는 제아무리 커다란 힘을 지녔다 할지언정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룡성의 후계자인 천무진이 자신들의 편이라니 이보다 좋은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주란은 내심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천무진과 직접 마주한 적이 있었고, 그의 뒤를 캐며 어떠한 인물인지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된 상태였다.
그랬기에 주란은 알고 있었다.
천무진과 그의 동료들의 끈끈함에 대해서.
주란이 걱정되는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어르신, 천무진이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도 과연 우리 편에 설까요?”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사실 그 녀석이 아무리 어릴 때 어르신이 심어 둔 간자라고 해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잖아요. 그동안 심경의 변화도 있을 수 있고, 또 여러 가지 이유로 변심을 할 가능성도…….”
“그럴 일은 없다.”
어르신이 딱 잘라 말했다.
그저 단순히 아닐 거라 생각해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투에는 확신이 있었다.
천무진이 결코 돌아서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매유검은 스스로가 지옥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매유검뿐일까?
분명 다른 종류의 것이었지만 지옥에서 살았던 건 천무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룡성으로 보낼 아이를 뽑기 위해 아이들을 선별했고, 그곳에서 어르신은 천무진을 선택했다.
그로부터 일 년.
천무진은 이곳에 갇혀서 살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어린 소년 하나를 바꿔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계속된 세뇌, 그건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천무진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정신을 파괴시켰고, 강제로 새로운 생각들을 주입시켰다.
그렇게 해서 탄생시켰다.
자신이 죽으라면 죽고, 하라고 하면 그게 무엇이라도 하는 꼭두각시. 그렇게 완성된 것이 바로 천무진이었다.
비록 긴 시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그 기억이 깨어난 이상…… 천무진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몸은 성장했을지 모르나 그 정신은 결국 이십여 년 전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어린아이였다.
어르신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한들 그놈은 결국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녀석이니까.”
그의 확고한 말투에 주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믿고 따르는 어르신이라는 존재는 결코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는 건 그만한 믿을 구석이 있다는 의미였다.
주란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축하드려요. 곧 그토록 바라시던 무림일통이라는 업적을 이루게 되실 테니까요.”
주란의 그 말에 휘장 속에 자리한 어르신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무림일통이라…….’
무림의 주인?
물론 그것 또한 그가 원하는 일들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무림일통 같은 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그것을 얻으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에 불과했다.
어르신을 따르는 십천야들은 그가 원하는 것이 천룡성을 꺾고 무림의 주인이 되는 거라 생각하고 있다.
허나 틀렸다.
진정으로 그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휘장 안쪽의 어르신이 입을 열었다.
“혼자 있고 싶구나. 이만 물러가거라.”
“예, 어르신.”
머리를 숙인 주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녀가 사라진 직후.
갑자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큭! 큭큭큭!”
휘장 안쪽에서 들려오는 미친 듯한 웃음소리.
그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은 채로 중얼거렸다.
“……싱거운 소리를 하는군.”
정체 모를 말을 던진 어르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그가 앞을 향해 움직였다.
스윽.
항상 닫혀 있던 휘장이 걷히며 안에 자리하고 있던 어르신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한 명의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 노인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척이나 말랐고, 피부는 마치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얼굴은 균형을 잃은 듯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얼굴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흡사 괴물을 연상케 하는 추한 외모.
얼굴이 이토록 기괴하게 변한 건 이 노인의 나이가 많은 탓도 있었지만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노인의 이름은 천지광(天志光).
그리고 그는…… 천룡성의 무인이었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천지광은 현재 천룡성의 주인인 천운백의 사형이라고 봐야 옳았다. 물론 일인전승의 문파인 천룡성에 두 명의 제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천지광은 파문당한 천룡성의 무인이라고 봐야 옳았다.
아주 오래전 천운백의 사부이자 전대 천룡성의 주인인 천명환은 어린 천지광을 제자로 거뒀다.
그의 아래에서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던 천지광이다. 하지만 어떠한 모종의 사건들로 인해 천룡성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실질적인 후계자의 자격을 잃게 된 것이다.
천지광은 욕심이 많은 자였다.
무공에 대한 욕망과 자신을 쫓아낸 사부 천명환에 대한 원한까지 겹쳐 그는 수많은 마공들에 손을 대고 말았고, 그 부작용으로 지금처럼 신체가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망가진 건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신체의 고통. 그 또한 매번 천지광을 힘들게 만들었다.
흡사…… 저번 생의 천무진처럼.
천지광은 주란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섬뜩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겨우 무림 따위 가지겠다고 이런 긴 시간을 보냈을 리가 없지 않느냐.’
처음부터 원하던 건 하나.
바로…… 천룡성의 진정한 힘이었다.
사람들은 천룡성의 믿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무공이 그들의 진정한 힘이라 생각한다. 물론 천지광 또한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긴 했다.
확실히 천룡성의 무공인 천룡비공은 말도 안 되는 무공이었다. 그건 천룡비공을 직접 익힌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겠는가.
물론 어린 나이에 파문을 당하게 되면서 반쪽짜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천룡성의 진짜 힘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닌 진정한 힘의 원천.
그건 인생을 다시 한번 되돌리는 그 힘, 바로 그것이었다.
그랬다.
천지광이 진짜 원하는 건 바로 천룡성 고유의 능력을 이어받아, 지금의 이 삶을 다시 사는 것이다.
천룡성에서 쫓겨나기 전으로, 그리고 지금처럼 망가져 버리기 전의 시간으로 말이다.
되돌리고 싶었다.
그 모든 걸.
천지광은 방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그곳에는 자그마한 문이 하나 있었다.
그의 손이 닫혀 있던 문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드러난 내부의 공간.
그리고 그곳에는 놀랍게도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하나같이 혈도를 점혈당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못하는 이들.
천지광은 그들 중 한 명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젊은 사내의 몸이 두둥실 떠서 천지광을 향해 날아들었다.
팍!
자신을 향해 끌어당긴 사내의 얼굴을 움켜잡은 천지광의 몸에서 수상쩍은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망가지고 있던 천지광의 몸이 조금씩 균형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반대로 천지광의 손에 얼굴이 잡힌 사내는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마치 목내이(木乃伊:미라)처럼.
눈을 감은 채로 사내의 정기를 빨아들이던 천지광이 이내 손안에 잡혀 있던 상대를 내동댕이쳤다.
쿵.
바닥에 쓰러진 사내는 이미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삐쩍 말라 있었고, 숨 또한 끊어진 상태였다.
천지광은 옆에 있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까의 괴물 같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나름대로 괜찮은 얼굴의 노인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천지광은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이제는 나흘을 못 가는군.”
예전만 해도 한 달에 한 명 정도 정기를 흡수하는 걸로 몸을 유지했었다. 그러던 것이 점점 주기가 짧아지더니 지금에 와서는 나흘을 버티기가 어려웠다.
점점 빨라지는 주기.
그만큼 자신의 몸 또한 나빠지고 있다는 의미리라.
하지만 상관없었다.
천무진이 천운백을 통해 그 힘만 받아 낸다면 자신은 결국 과거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젊음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던 천지광이 중얼거렸다.
“젊음이라…….”
그 말을 내뱉은 천지광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씨익.
젊음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