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기억의 파편 ― 같이하자 (1)
자신에게 다가온 상태에서 내뱉은 매유검의 말에 천무진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눈을 치켜떴다.
동생이라니? 십천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뭐? 그게 무슨 개소리…….”
허나 천무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뇌까지 흔드는 극심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던 그다. 그리고 이내 힘겹게 눈을 뜬 천무진의 앞에 펼쳐진 장소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넓게 펼쳐진 들판, 정체를 모를 허름한 몇 채의 집들까지.
눈을 감기 전과 변한 것이 하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지금 보고 있는 이곳은 방금 전 진법에서 본 풍경과는 다른 몇 가지가 있었다. 먼저 주변에 가득하던 시체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해 대던 십천야 중 하나인 그 상대도 보이지 않는다.
같은 장소, 그렇지만 또 다른 장소이기도 한 이곳은…….
그 순간 천무진의 귀청을 때리며 누군가의 거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십삼 호! 어서 들어가!”
십삼 호라는 외침에 천무진은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거칠게 생긴 사내 한 명이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런 그자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은 아주 작은 어린아이였다.
이건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이것은…… 천무진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십삼 호라 불렸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으니까.
* * *
십삼 호.
그것은 이곳에 사는 아이들 중 하나인 이 소년에게 붙여진 호칭이었다. 대략 육십여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기거하는 이곳에선 이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숫자들이 그 이름이라는 것을 대신할 뿐.
그건 소년 또한 다르지 않았다.
십삼 호라는 호칭으로 불린 소년은 그 나이가 여덟 살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어렸다. 그렇지만 그토록 어린 소년의 얼굴엔 또래의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장난기나, 해맑음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지저분한 행색을 한 소년이 있는 이 커다란 방은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갇혀 있는 아이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들부터 계속해서 시끄럽게 우는 아이들까지. 그리고 이토록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모든 걸 포기한 듯 체념한 얼굴로 있는 아이들도 보였다.
이토록 많은 아이들이 지내고 있는 것만 보면 이곳을 고아원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이 장소는 그런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납치를 당한 입장이었으니까.
그랬기에 이들은 갑작스럽게 변해 가고 있는 지금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십삼 호라 불리는 소년은 조금 달랐다.
소년은 애초에 고아였다.
그랬기에 처음부터 이름이 없었고, 딱히 집이라 부를 만한 곳도 없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체 모를 자들에게 납치를 당해 끌려온 게 바로 산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장원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곳저곳을 떠돌며 식은 밥이나 얻어먹고 다니던 불우한 삶이었다. 음식을 훔치다 들켜 얻어맞은 것만 해도 셀 수가 없을 정도였고, 쏟아지는 비를 피하지 못해 뜬눈으로 밤을 새운 적도 제법 있었다.
그 덕분에 이토록 어린 나이임에도 세상이란 곳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았다.
물론 소년이라고 해서 변한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해 어딘가로 끌려갔는데, 납치범들은 그곳에서 일차적으로 자신의 몸을 조사했다.
소년의 몸을 이곳저곳 만져 보고 손바닥을 등 뒤에 댄 채로 뭔가를 해 대던 그자가 한 말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명했다.
그자는 소년을 바라보며 비웃듯 말했다.
“꼬마야, 넌 운이 좋구나.”
십삼 호는 당시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두 개로 나뉘어 있던 무리 중 인원수가 적은 곳으로 가서 섰을 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소년은 알게 됐다. 운이 좋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그 사내는 납치한 아이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고 있었다.
무공을 익힐 만한 근골을 지녔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뛰어난 근골을 지녔고, 당연히 무공을 익히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 반대로 재능이 없던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실험에 사용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운명이었다.
물론 그건 어린 소년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무공을 익히기 위해 끌려간 그곳에서도 소년은 다시 한번 장소를 옮기게 됐다. 그건 소년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었다.
여덟 살부터 열 살까지의 아이들이 모여 있던 그 안에서 소년은 독보적인 재능을 보여 주었다.
소년의 신체를 자세히 조사하던 사람은 놀란 눈으로 엄지를 추켜세웠다.
무공을 익히기 너무도 좋은 뛰어난 신체를 지녔다고.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소년은 무공에 대한 이해도도 뛰어났다. 무공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가지고 치른 시험에서 엄청날 정도로 빼어난 이해력과, 응용력을 내비친 것이다.
소년이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모두 선보인 이유는 간단했다. 좋은 성적을 내는 아이에게는 그에 맞는 선물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그 말에 아이들은 제각기 그 시험에서 좋은 성과를 내려 애썼다.
아직은 어린아이들.
대부분이 그것에서 좋은 결과를 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여겼던 것이다. 그에 반해 소년이 바라는 건 간단했다.
음식이었다.
배를 곯지 않을 정도의 음식.
결국 소년은 그 천 명이 넘는 무리에서 가장 압도적인 신체와 무공에 대한 지능을 선보이며 이곳으로 오게 됐다.
이곳에 모인 육십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
남녀 구분 없이 모인 이 아이들 모두가 십삼 호와 마찬가지로 그 같은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었다. 뛰어난 근골과 무공에 대한 이해력을 가진 아이들.
한마디로 무인으로서의 재능을 갖춘 뛰어난 아이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으로 오게 된 이후 소년은 후회 중이었다. 이곳에는 자신이 원하던 배부른 삶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십삼 호라는 소년이 벽에 기댄 채로 중얼거렸다.
“실컷 배부르게 해 주겠다더니.”
걸음마를 뗄 때부터 구걸을 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보내 온 그다. 그런 아이에게 가장 두려운 건 다름 아닌 굶주림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그런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소년이 온 이후로도 계속해서 하나둘씩 끌려오더니 마침내 육십 명 정도의 숫자가 찬 지금.
처음엔 제법 넓었던 방도 이제는 좁게 느껴졌다.
그때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소년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야, 십삼 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십삼 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소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십삼 호가 오기 전부터 이곳에 있던 아이.
칠 호라고 불리는 소년이었다.
들어오는 순서대로 번호가 붙었으니, 이 칠 호라는 소년이 이곳에 있은 지는 꽤 오래됐다고 봐야 했다.
십삼 호만 해도 이곳에 온 지 어느덧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흘러 있었으니까.
칠 호라는 소년은 무척이나 선한 인상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또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그 아이는 이런 곳에서도 잘 웃고, 주변과 담을 쌓고 지내는 십삼 호에게도 살갑게 대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칠 호를 향해 십삼 호가 짧게 대꾸했다.
“무슨 일인데, 칠 호.”
자신을 향해 칠 호라고 부르는 십삼 호의 모습에 그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칠 호라고 부르지 말라고,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숫자도 앞이잖아.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그러는 너도 나를 십삼 호라고 부르잖아.”
“아, 그런가? 그건 좀 불공평한가?”
“그걸 이제 안 거야?”
“흠 그러면…… 내가 형이니까 넌 동생으로 하면 되겠네. 앞으로 널 동생이라 부를게. 넌 날 형이라고 부르도록 해.”
칠 호의 말에 십삼 호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굳이 자신이 동생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표정에서 그런 속내가 느껴져서일까?
그 순간 칠 호라 불리는 소년이 품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소년이 꺼내어 든 건 자그마한 주먹밥이었다.
그건 오늘 저녁에 배식받았던 것이 분명했다.
칠 호가 그걸 내밀며 말했다.
“자, 이거.”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주먹밥을 바라보며 십삼 호가 당황스러운 듯 물었다.
“이건 왜?”
물어 오는 그를 향해 칠 호가 답했다.
“너 먹으라고.”
“나한테 이걸 준다고? 왜?”
십삼 호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이곳에서의 식사는 결코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최대한 조금의 양으로 얼마나 버티는지를 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적은 양만 제공됐다.
겨우 하루에 한 끼.
어린아이의 주먹보다 자그마한 이 주먹밥이 이들에게 지급되는 전부였으니까. 당연히 이곳에서 식사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실제로 일부에서는 다툼을 벌이며 음식을 빼앗는 일까지 벌어졌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알면서도 이곳을 감시하는 어른 중 누구도 그 같은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감시는 하고 있지만, 그들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왜 자신에게 주먹밥을 주는 거냐고 물어 오는 십삼 호를 향해 칠 호가 웃는 얼굴로 답했다.
“왜긴. 내가 형이니까 당연히 동생을 챙겨 줘야지. 안 그래?”
말과 함께 어서 받으라는 듯 주먹밥을 손에 쥐여 주는 상대의 행동에 십삼 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 번도 가족의 정이라는 걸 느껴 본 적이 없는 십삼 호에게 자신을 챙기려고 하는 칠 호의 행동은 무척이나 생소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얼결에 받아 든 주먹밥.
차갑게 식어 버린 그 주먹밥에서 온기가 느껴진다는 생각이 든 건 대체 왜일까?
손에 쥐고 있던 주먹밥을 말없이 바라보던 십삼 호가 이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싱겁긴.”
말과 함께 십삼 호가 입에 주먹밥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건네받은 주먹밥을 한입 물어 우물거릴 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칠 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준 거 먹었으니까 이제 내 동생 하는 거다?”
“겨우 이런 주먹밥 하나로 형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싫으면 이 주먹밥 원래대로 돌려놓든지.”
말과 함께 칠 호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 모습에 십삼 호는 싫다는 듯 곧바로 입안에 주먹밥을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이내 몇 번 우물거리던 주먹밥을 꿀꺽 삼키고는 빈손을 보여 주며 말했다.
“주먹밥 하나에 이렇게 된 게 분하긴 한데 아무래도 이젠 되돌리기 힘들 것 같은데?”
십삼 호의 그 말에 칠 호가 입을 가리고는 킥킥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마음을 터놓고 지낸 지 약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조금씩 늘어나던 번호는 팔십사 번에 이르러 멈추어 섰고, 이곳에 있는 무리도 몇 개로 나뉘었다.
무공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진 어린아이.
거기다가 무공을 익힌 상태도 아니었다.
그저 아직까진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한곳에 모아 둔 것에 불과한 상태였기에 상대적으로 덩치가 좋고 힘이 센 아이들이 유세를 부리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하지만 그 아무리 힘이 좋은 이들이라고 해도 십삼 호에게 시비를 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덟 살부터 열 살 정도로 구성된 무리.
당연히 가장 어린 나이인 여덟 살에 속한 십삼 호는 상대적으로 덩치도 작고 힘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아로 자라나며 모진 경험을 한 그를 평범하게 자란 아이들이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시비를 걸었던 이들이 모두 십삼 호에게 나가떨어졌고, 결국은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게 된 것이다.
설령 많은 숫자로 덤벼들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흠씬 두들겨 맞아도, 결국 어떻게든 복수를 해내고야 마는 그 독한 성격에 모든 이들이 두 손을 들어 버리고야 만 것이다.
거기다가 이쪽에서 건드리지 않는 이상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성격을 지닌 십삼 호였기에 괜한 긁어 부스럼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렇게 산 위에 위치해 있는 장원에 팔십 사 번의 아이로 무리의 수가 고정된 그 무렵.
조용했던 그곳에 커다란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산을 오르고 있는 한 명의 중년 사내.
이곳을 지키고 있던 모두가 긴장한 채로 그를 맞았다.
회의실에 나타난 사내는 이곳을 관리하는 이와 마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가 내뱉은 한마디.
“팔십 명이라…… 너무 많군.”
그 한마디는 이곳에서 지내고 있던 아이들에게 일어날 피바람의 전조였다.
사내의 말에 수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을까요?”
“한 다섯 명 정도로 줄여. 그중에서 고를 테니까.”
팔십 명이 넘는 이들 중 단 다섯 명만을 추스르기 위해 펼쳐질 시험. 그건 어린아이들이 감당해 내기 어려운 수준의 것이었고, 실패자에겐 그만한 대가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하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럼 망가진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쓸모가 없어진 낙오자에게 정해진 운명은 하나 아닌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어투로 그자가 말을 이었다.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