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진법 ― 보기 역겹다고 (2)
소교주 악준기가 보내온 사람과 동행한 천무진은 곧장 마교 외성으로 나섰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며 천무진은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다. 얼마 전 있었던 마교 소교주 암살 시도 사건. 물론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그 일이 벌어진 후 악준기는 더욱 바빴다.
주변을 호위하는 인원도 늘었고, 암살 사건과 관련된 이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무진 또한 그런 악준기와 함께 움직였지만 그날 이후 그를 직접 대면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아예 사건이 벌어진 초창기였기에 이후 진행된 많은 상황들에 논의가 필요한 때이긴 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악준기의 연락.
천무진은 그렇게 그가 보내온 사내와 함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무진을 이곳까지 안내한 사내가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말에 천무진은 슬쩍 시선을 돌려 앞에 자리한 장원을 바라봤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고, 위치 또한 외곽 부분에 자리하고 있어 중심부에 비해서는 적은 인원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악준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장원을 향해 천무진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이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밀어젖혔다.
끽.
소리와 함께 드러난 내부의 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천무진은 곧장 장원 안으로 들어섰고, 이내 그가 열었던 문이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닫혔다.
쿠웅.
바로 그때였다.
천무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슬쩍 뒤편을 바라봤다. 닫힌 문은 너무나 평범해 보였다.
그런데 왜일까?
천무진의 시선이 뒤편에 위치한 문에서 떠나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뭐지?’
정말 별거 아닌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문이 닫히는 순간 주변에 흐르던 기운이 흔들렸다. 정말 작은 변화, 그리고 어쩌면 그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거늘 천무진은 이상하게 찜찜했다.
천무진이 천천히 손을 뻗어 허공으로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 주변으로 가볍게 내공을 흘려보냈다.
스스스.
피어오르는 연기가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동시에 천무진은 눈을 감고 주변에 움직이는 모든 기운들에 감각을 집중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귓가로 파고드는 바람에도, 가슴 깊이 밀려드는 공기까지도.
전신을 타고 느껴지는 모든 감각들.
그 어떠한 것에도 이상한 건 없었다.
단 하나…… 냄새가 없다는 것 빼고는.
고개를 치켜든 천무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법인가.”
특별한 뭔가를 확인한 건 아니지만 천무진은 지금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지금 자신은 진법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고개를 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모양인데.”
정말로 소교주 악준기가 이 장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럴 확률은 일 할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리 중요한 만남이라고 할지언정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부를 리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이건 소교주 악준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준비한 진법이라는 건데…….
현재 자신이 진법에 갇혔다는 걸 알았지만 천무진의 얼굴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지금 이 상황이 위험하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법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됐든 이런 진법으로 천무진을 잡아 두는 건 한계가 있었다. 이것이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는 살진인지, 아니면 시간을 끌기 위해 준비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진법에는 생문(生門)이 있는 법이지.’
아무리 잘 만들어져 있는 진이라 할지라도, 그곳에는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져 있다.
거기다 지금 당장에 봤을 때 이 진법은 그렇게 위협을 가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기껏 해 봤자 시간 끌기용.
허나 그것도 천무진 정도의 실력자라면 결코 소기의 목적조차 달성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진법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지만 최대 반나절이면 박살을 내고 나갈 수 있었다.
잠시 진법의 흐름을 읽어 내던 천무진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진법을 펼친 자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진법으로 자신을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결국 시간을 끄는 것이 그 목적일 확률이 높을 텐데, 그런 그들의 계획에 놀아나 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진법을 파훼하기 위해 나서는 천무진의 얼굴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다.
사실 이렇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건 지금 약속 장소로 잡힌 곳이 마교의 바깥도 아닌 외성에 위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설령 이것이 함정이었다고 한들 천무진에겐 상관이 없었다.
적어도 그 함정이 마교 내부에 자리한 곳이라면.
천무진은 엄청난 무인이다.
그 말은 곧 천무진을 꺾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 절대고수들의 싸움이 아무런 소란 없이 끝날 리가 있겠는가?
마교의 한쪽이 아예 박살 날 정도로 큰 싸움이 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그 같은 큰 소란이 인다면 마교 무인들이 오는 것은 당연했다. 설령 그 누가 온다 한들 마교의 무인들이 달려오기 전에 천무진이 쓰러질 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이처럼 움직였거늘 그것이 이런 함정이었다니…….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천무진은 언제라도 뽑아낼 수 있도록 허리에 걸려 있는 천인혼에 손을 얹어 두고 있었다.
동시에 주변에서 느껴지는 모든 기운의 움직임들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혹시 모를 기습이나, 진법의 변화를 읽어 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도중 갑자기 주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진법이 천천히 움직이며 뭔가를 벌이고 있었다.
장원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스스스스!
커다란 모래로 된 것들이 사라지듯 모든 건 가루가 되어 사라지며 그곳에는 새로운 장소가 나타났다.
그곳은 다름 아닌 천룡성의 본거지였다.
변해 버린 주변의 모습에 천무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이건.”
허나 주변의 풍경이 변하는 건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눈앞에 사부인 천운백과 가솔 남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익숙한 천룡성의 모습, 그리고 그곳에 자리한 두 사람까지.
그런데 그 둘 또한 갑자기 모래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사라졌다.
화악!
주변에 바람이 휘몰아치며 또 풍경이 무서운 속도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이내 나타난 것은 무림맹에서 활동하기 위해 지냈던 사천성에 있는 천룡성 비밀 거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도 한 사람씩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술을 마시고 있는 한천.
뭐가 그리도 화가 났는지 잔뜩 성을 내고 있는 단엽.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백아린까지.
바로 얼마 전까지 같이 있던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천무진이 그쪽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였다.
촤르륵.
그들의 몸과 주변의 광경들이 다시금 모래처럼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천무진의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마치 그들이 하나둘씩 죽어 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천무진이 중얼거렸다.
“슬슬 짜증 나는데.”
말과 함께 천무진은 천인혼을 뽑아 들었다.
변해 가는 진법의 변화는 빠르고 복잡했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힘의 변화를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장난질을 할 건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말과 함께 천무진은 천룡무극심법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천인혼이 흔들렸다.
천무진은 힘껏 치켜든 천인혼을 곧바로 땅에 박아 넣었다.
그 순간 모래처럼 흩어지며 변화를 보이던 주변 광경들이 마치 유리처럼 금이 가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콰앙!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는 유리 조각들.
그 안에 있는 천무진은 알고 있었다.
아직 이 진법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걸. 하지만 일부분의 깨어져 나가는 그 순간 여태까지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바로 냄새였다.
처음 진법에 빠지고는 냄새를 느끼지 못했거늘, 그 일부가 흔들리며 묘한 향기가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변해 버린 세상.
그곳은 정체 모를 장소였다.
커다랗고 넓은 들판.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몇 채의 남루한 집까지.
곳곳에 보이는 시체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진한 피 냄새가 코로 밀려들었다.
천무진은 그 시체들 사이를 걸었다.
그런데 시체들을 바라보는 천무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죽어 있는 무인들.
그리고 그들 사이사이에는 마찬가지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기괴했다.
어른들의 싸움에 어린아이들이 피해를 입은 형상이 아니었으니까.
마치 어른들과 어린아이들의 싸움.
그런 말도 안 되는 싸움이 있었던 걸로 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시체는 어른들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체 왜 이런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는지 모르겠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던 천무진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의 감각 안에 누군가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천무진이 시선을 들어 먼 곳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낡은 초가집 지붕 위에 한 명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긴 장포를 펄럭이며 서 있는 상대.
천무진이 자신을 본 걸 알아차린 그가 성큼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십천야의 한 명인 매유검.
그가 천무진과 함께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 천무진.”
진법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듣게 된 누군가의 목소리.
상대를 확인한 천무진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장포를 뒤집어 쓴 모습도, 그리고 들려온 이 목소리까지도.
그 모든 것이 기억에 있었으니까.
그걸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무서울 정도의 살기가 터져 나왔다.
천무진이 주먹을 움켜쥔 채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천무진은 매유검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의 얼굴은 알지 못했다. 과거의 삶에서도 그를 본 건 단 한 번이었고, 그때도 지금처럼 장포를 눌러쓰고 있었으니까.
단 한 번뿐이었던 만남.
그리고 그날…… 저자의 손에 자신은 죽었었다.
죽어 가는 천무진을 바라보며 병신 같은 새끼라며 경멸 가득한 조소를 날렸던 바로 그자.
과연 언제 그자를 만나게 될까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말에 순간 멈칫했던 매유검이지만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순간 날 아는 건가 했는데 두 번째 삶이라고 했지, 참.”
“이 진법이 누구 짓인가 했는데 네가 벌인 일이군.”
“왜? 마음에 좀 들어?”
“그럴 리가. 저번 생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생에서도 넌 여전히 하는 짓이 영 구리네.”
말과 함께 천무진은 천인혼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저번 생에서 싸워 본 상대였기에 그가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천무진은 자신 있었다.
저자를 이길 자신이.
자신을 향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천무진을 바라보던 매유검의 입이 비틀렸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 또한 저 대결에 응해 주고 싶었지만…….
스윽.
매유검은 품 안에 가지고 있던 뭔가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머리통 크기만 한 정체불명의 광석이었다. 순간 매유검이 번개처럼 반대편 손으로 단검을 뽑아 들더니 이내 그것을 광석에 꽂아 넣었다.
카앙!
귀청을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
그리고 그 순간 손바닥 위에 자리하고 있던 그 광석이 깨지는 걸로 모자라 아예 가루가 된 듯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천무진이 이해가 가지 않는 매유검의 행동에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바로 그 순간 매유검이 소리쳤다.
“움살타알리만!”
뜻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말이 들려오는 그 순간이었다.
쿠웅!
천무진이 주저앉았다.
“크윽!”
갑작스럽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고, 동시에 심장을 쥐어짜는 것만 같은 고통이 연신 밀려들었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몸은 마치 쇳덩이를 단 것처럼 무거웠다.
천무진은 갑자기 찾아온 이 같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숨을 헐떡이며 천무진이 힘겹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매유검을 향해 이를 갈며 말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살기를 쏟아 내는 천무진의 모습에 매유검은 광석을 부수기 위해 들었던 단검을 든 채로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거리를 좁혀 오던 매유검이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언제까지 착한 척이나 하고 있을 거야? 더는 보기 역겹다고.”
“그게…….”
“이젠 기억해 내라고. 네 진짜 정체를.”
정체 모를 말과 함께 걸어오던 매유검이 천무진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진 상황에서 매유검은 천무진을 내려다봤다.
장포 사이로 유일하게 보이는 그의 입이 웃음으로 인해 비틀렸다.
비웃음 가득한 매유검의 입이 열렸다.
“오랜만이다. 나의 동생, 그리고…… 열 번째 십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