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진법 ― 보기 역겹다고 (1)
긴 장포를 눌러쓴 매유검이 마교 외성의 후미진 곳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외성 한편에 위치한 자그마한 장원이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먼저 이곳에 온 몇몇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유검이 나타나서 방 안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앉아 있던 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일어섰다.
방 안에 먼저 자리하고 있던 이는 정확하게 여섯 명이었는데, 그중에 몇 명은 마교 내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매유검의 등장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릎을 꿇었다.
“십천야를 뵙습니다.”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걸음을 옮긴 매유검이 상석에 자리했다. 그러고는 이내 자신을 바라보는 여섯 명을 향해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바로 계획을 실행할 생각인데 다들 준비는 차질 없게 됐겠지?”
“물론입니다.”
막심무(莫心无)라는 이름의 중년 사내가 곧바로 답했다. 그는 현재 이 여섯 명을 대표하는 자였고, 지금 매유검이 진행하려는 모종의 계획에도 깊게 관여되어 있었다.
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명하신 대로 곧바로 적화신루의 두 사람부터 떨어트려 놓겠습니다.”
“……그렇게 해.”
대답을 하는 매유검의 말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사실 그는 이번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에 앞서 백아린과 한천부터 완벽하게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는 명령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나 두 사람 중 백아린.
그녀에 대한 매유검의 원한은 꽤나 깊었다.
백아린으로 인해 천무진을 잡아 오려던 계획이 망가졌고, 그 때문에 적련화가 죽게 되었으니까.
적련화의 복수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매유검의 성격상 이런 싸움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르신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천무진과 백아린, 그리고 한천까지. 세 명이 함께 움직이면 이번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고 보았다.
그랬기에 아예 둘을 떨어지게 만들고 그 이후에 천무진에게 준비한 계획을 펼친다.
사실 단엽 또한 눈엣가시였거늘, 현재 그는 스스로 마교를 떠난 상태다.
한마디로 적화신루의 두 명만 떨어트려 놓으면 된다는 의미였다.
천무진과 관련된 작전에 대해 짧게 설명을 끝낸 수하들은 이내 마교의 일들을 보고했다. 매유검은 대충 상황들을 전해 듣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그 외의 것은 자신이 아닌 어르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모든 보고가 끝나자 매유검을 제외한 여섯 명의 인원들은 곧장 자리를 떴다. 최근 들어 마교 내부의 분위기가 자신들에게 좋지 않게 흐르고 있었다.
의심을 사지 않도록 같이 있는 모습조차 최대한 감춰야 하는 때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진 방 안.
매유검은 그곳에 혼자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천무진.”
일이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적련화에게 조종당하며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기를 바랐다.
그게 최상의 결과였으니까.
허나 이미 그건 불가능해진 상황…….
결국 모든 일들이 매유검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어르신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어도, 매유검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죽은 적련화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매유검은 다시금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그 화를 억눌렀다.
‘우선은 천무진 그놈부터.’
백아린은 그다음 문제다.
우선 첫 표적은 어르신의 명령대로 천무진이다. 그를 계획대로 처리한 후에, 그다음에 백아린을 제거해도 늦지 않는다.
홀로 남은 방 안에서 매유검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콰드득.
탁자를 움켜쥐는 순간 그 일부분이 마치 종이처럼 찢겼다. 동시에 손가락 사이로 뜯긴 탁자의 일부분이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매유검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남은 것은…….
“한 놈씩 잘근잘근 찢어 죽여 주지.”
잔인한 복수뿐.
* * *
천무진과 백아린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그 이튿날.
식사를 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그곳에서 한천이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둘 사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는 그다.
한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신수들이 훤하십니다?”
“…….”
백아린이 별다른 말도 없이 젓가락질만 하자 한천이 재차 말했다.
“이거 제가 불청객 같네요. 오붓하게 단둘이 식사도 좀 하시고 해야 할 텐데. 아니면 제가…….”
그때 한천의 말을 자르며 백아린이 말했다.
“알고 있나 보네. 마침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우리 둘이 시간 보내게 부총관이 대신 일 좀 해 주면 될 것 같은데? 몸도 다 나은 것 같고.”
“에에? 그건 좀…….”
생각지도 못한 백아린의 반격에 한천이 당황했다. 그러고는 이내 서둘러 밥그릇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닫고 식사에 열중했다.
백아린이 그런 한천을 가볍게 흘겨보았지만…….
사실 이같이 짓궂어 보이는 농담에도 백아린은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상대가 한천이어서이기도 했지만, 뭣보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두 사람을 위해서라는 걸 알아서다.
오히려 이런 일을 가지고 어색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기에 일부러 심하지 않은 정도로 먼저 장난을 걸어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도록 말이다.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가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한천은 더는 농담을 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 그를 향해 이번엔 백아린이 장난을 걸었다.
“그런데 단엽 주먹이 생각보다 덜 아픈가 봐. 벌써 다 나은 걸 보면.”
“다 낫긴요. 아직까지 온몸이 욱신거린다니까요?”
“정말? 겉보기엔 완전히 멀쩡해 보이는데.”
“원래 그런 주먹은 외상보다는 내상이 문제인 겁니다.”
“그래? 그냥 일하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백아린의 말에 한천은 움찔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천무진과 백아린은 짧게 시선을 맞춘 채 둘 다 피식 웃었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슬쩍 확인한 한천 또한 덩달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백아린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
이게 바로 한천이 가장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서로를 향해 두 사람이 웃어 보이는 사이 갑자기 바깥에서 뭔가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였다면 식사에 열중했을 한천이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탓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탁자 위에 있는 만두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제가 나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올 테니 두 분께서는 즐겁게 식사하고 계시죠.”
말을 마친 한천이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한천이 나가고 단둘이 남게 된 상황.
천무진이 서둘러 물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저녁에요? 왜요?”
“……같이 나갈까 하고.”
뭔가 부탁할 게 있나 했던 백아린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다시금 느꼈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관계가 어제부터 달라졌다는 것을.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어떻게든 시간 낼게요.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낼게요.”
신이 난 듯 말하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이 픽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까지 무리할 건 없고.”
“무리는요. 제가 좋아서 하려는 건데요 뭐.”
솔직하게 말하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시선에 다시금 백아린의 입가에 미소가 걸릴 때였다.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모습을 드러낸 건 방금 전에 나갔던 한천이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서찰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대장.”
“응?”
여전히 천무진을 응시한 채로 웃고 있는 백아린이 반문할 때였다. 그런 그녀의 기분을 망가트릴 말이 한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며칠 어디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요?”
한천의 그 한마디에 천무진과 백아린의 표정이 동시에 와락 구겨졌다.
적화신루 쪽에서 날아온 다급한 연락.
그것은 적화신루의 입장에서는 제법 중요한 일이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백아린은 직접 움직여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처리를 하는 데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거리 또한 그리 멀지 않아, 왕복하는 데도 큰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을 듯싶었다.
약 삼 일가량.
백아린과 한천은 그렇게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아, 왜 갑자기 일은 벌어져 가지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내내 백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툴툴거렸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모습.
그리고 그 이유를 한천은 알고 있었다.
막 시작된 두 사람의 연애다. 그런데 며칠을 떨어져 있게 되었으니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재밌게도…… 그건 저 무뚝뚝한 부분이 있는 사내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한천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세 사람은 곧 마차에 도착했고, 한천이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이어 마차에 오르려던 백아린이 멈칫하더니 천무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요.”
“그렇게 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저랑 가려고 했던 곳 절대 먼저 가지 말고요.”
백아린의 당부에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옆에서 쉬이 발을 못 떼고 있는 백아린의 모습에 결국 참다못한 한천이 입을 열었다.
“대장, 이러다가 해 떨어집니다.”
“……알겠어.”
말을 마친 백아린은 다시 한번 천무진을 쳐다보고는 이내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 올라타서 문까지 닫았지만, 그녀는 창문을 통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천무진과 시선을 맞춘 채로 말했다.
“식사 잘 챙겨 먹고 있어요.”
“당신도. 일한다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렇게 두 사람이 한마디씩 주고받았을 무렵 대기하고 있던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창문 안쪽으로 쉬이 고개를 넣지 못하고 있던 백아린이 점점 멀어지는 마차 안에서 손을 저으며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천무진 또한 손을 들어 보였다.
계속 그 자리에 선 채로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천무진은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온 천무진의 거처인 귀림원은 조용했다.
단엽에 이어 두 사람까지 사라지니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곳 같은 휑한 느낌까지 풍겼다.
“삼 일이라…….”
천무진은 두 사람이 돌아오기로 한 날짜를 떠올리며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아직까지 중천에 떠 있는 시각.
아무래도 그 삼 일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더디게 갈 것만 같았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천무진은 이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백아린과 한천이 자신들의 일을 하기 위해 떠난 것처럼 그 또한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교에 아직까지 남아 있을 십천야와 관련된 자들을 최대한 뿌리 뽑는다. 거기다 의선을 통해 흑주염의 해독약을 만들어 내고, 그걸 통해 마교 교주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사부는 대체 언제 연락을 주시는 건지 모르겠군.’
곧 연락을 주겠다던 사부는 아직까지 전해 온 말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사부가 한 말이 있으니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질 경우 천무진 쪽에서 먼저 연락할 방도를 찾을 계획이었다.
천무진은 책상 한편에 쌓아 둔 서류 더미들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서류 더미들 사이에 가서 자리한 천무진은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천무진이 마교 내에 남아 있을 십천야 쪽의 적들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귀림원에서 잡일을 맡고 있는 젊은 사내가 천무진의 거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서류에서 시선을 뗀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손님이 한 분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고?”
손님이라는 말에 천무진의 눈동자가 빛났다.
사부가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천무진이 곧장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어 보였지?”
“대충 사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습니다.”
나이를 듣는 순간 천무진의 얼굴엔 순간적으로 실망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허나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적화신루 쪽에서 보내온 연락망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승낙이 떨어지자 사내는 곧장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명의 무인이 방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천무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잠시 고민하던 천무진은 이내 그가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교주 악준기의 옆에 따라다니던 무인들 중 하나였다.
상대를 알아본 천무진이 짧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물어 오는 천무진의 질문에 사내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전음을 날렸다.
『소교주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중요한 일이시라며 직접 모셔 오라고 명 받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악준기의 연락.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만남을 자제하던 상황에서 악준기가 이렇게 연락을 해 온 거라면 뭔가 중요한 일일 확률이 컸다.
잠시 상대를 바라보던 천무진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안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