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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26화 (225/293)

226화. 진심 ― 당신이니까 (2)

마교에 숨어 있던 십천야와 그를 따르는 일부 무인들을 쓰러트린 이후 백아린은 더욱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다가 단엽까지 일행에서 빠져나가 버리니,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도 문제였다.

단엽이 전면에 나서서 적화신루의 일을 도왔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고수였고, 때에 따라 중요한 일에 투입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단엽은 대체 불가능에 가까운 존재였기에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백아린이 직접 발로 뛰어야만 했다.

거기다가 한천까지 부상을 입는 바람에 그가 처리하던 잡일까지 대부분 백아린이 도맡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도 여러 가지 일들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적화신루에 들러 필요한 정보들의 확인까지 끝마친 그녀가 자신의 앞에 놓인 차로 입술을 축였다.

모든 일을 마무리했으니,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

그녀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총관님.”

다급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이곳의 지부장 일을 하고 있는 사내였다.

방금 전에 대충 일을 매듭지은 상황에서 그가 다시 나타나자 백아린은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급해 보이는데.”

“천룡성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천룡성이요? 천 공자님에게서 무슨…….”

천룡성이라는 말에 백아린은 자연스레 천무진을 떠올렸다. 그러자 지부장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분 사부님의 연락입니다.”

“아…….”

그제야 백아린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천무진에게서 급한 연락이 온 줄 알고 놀랐는데,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내 백아린이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연락이요?”

“저도 내용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서찰을 전해 달라고 하셨답니다.”

말과 함께 지부장은 백아린에게 천운백이 보내온 서찰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걸 받아 든 그녀는 서둘러 안의 내용을 살폈다.

뭔가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했는데…….

내용을 확인한 백아린은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찰에는 그저 추후에 시간이 될 때 백아린과 단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건지는 당장에야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지금 적화신루는 백방으로 천룡성을 도와오고 있는 입장이다.

천운백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에서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백아린이 지부장에게 물었다.

“이것 말고 따로 더 보내오신 건 없고요?”

“예, 이 서찰 한 장만 날아왔답니다.”

“알겠어요. 전 슬슬 돌아가 보도록 하죠. 오늘 고생하셨어요, 지부장님. 아까 말씀드렸던 마교 내부의 정보들이 들어온다면 곧바로 연락 주시고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백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한 몇 장의 서찰을 품속에 넣은 그녀는 곧장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열며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백아린이 움찔하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길게 펼쳐진 길.

그리고 그 길 위를 가득 채운 새하얀 눈까지.

그녀는 놀란 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는 상황인데도 하늘에서는 쉼 없이 새하얀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백아린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손바닥 위로 새하얀 눈송이가 앉았다가 이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녀가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눈이네.”

눈이 잘 오지 않는 이곳 광동성에 이 같은 폭설이라니…… 아마 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일 게다.

잠시 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백아린이 천천히 앞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였다.

쏟아지는 눈길 속에서 익숙한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상대를 확인한 백아린은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건가 하는 생각에 슬쩍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그녀가 본 상대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더욱 또렷하게 두 눈에 들어와 박혔다.

그녀의 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대.

그건 바로 천무진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야.’

헛것이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백아린은 서슴없이 쏟아지는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벅, 저벅.

걸어오는 천무진의 걸음과, 그런 그를 향해 다가가는 백아린의 걸음.

두 사람의 발이 움직이는 대로 새하얀 눈길 위에는 반대편에서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렇게 두 개의 발자국이 만나는 순간…….

“일은 끝났어?”

천무진은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멈추어 선 백아린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질문에 백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물었다.

“갑자기 여기까지 오다니 혹시 무슨 일 있어요?”

백아린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눈동자에서도 천무진을 염려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천무진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런 일도 없어.”

“그런데 왜 여기에…….”

“왜긴.”

말과 함께 천무진은 손을 뻗어 백아린의 어깨에 쌓인 눈을 가볍게 털어 줬다. 그의 행동에 놀란 그녀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바라보고만 있을 때였다.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당신 데리러 왔지.”

“……저를요?”

되묻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진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돌아가자. 쉽게 멈출 눈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을 끝낸 천무진은 백아린이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곧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천무진의 말에 잠시 놀랐던 그녀가 빠르게 뒤로 따라붙었다.

천무진의 등 뒤로 다가간 백아린이 살짝 미소 지었다.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무진이 자신을 데리러 눈길을 헤치고 와 줬다. 그 하나만으로도 백아린은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를 감추기 어려울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백아린이 막 천무진의 옆으로 나란히 서려고 할 때였다.

스윽.

자신의 걸음보다 조금 빠르게 나아가는 천무진의 행동에 백아린이 멈칫했다.

따라잡으려고 하면 어렵지 않게 옆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뭐지?’

백아린은 의아했다.

천무진 정도 되는 무인이 자신이 옆으로 다가서려 한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속도를 높였다.

마치 나란히 걷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천무진의 그 작은 행동에 백아린은 순간 마음 한편이 아렸다. 마치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스윽, 슥.

말없이 그의 뒤를 쫓던 백아린은 천무진의 행동에서 수상쩍은 부분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옆에 붙지 못하도록 빠르게 걸어 나가면서, 발로는 연신 바닥을 쓸어 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천무진의 빠른 걸음걸이에 비해 나아가는 속도는 평범한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왜 이런 행동을 하나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그가 발로 바닥에 쌓인 눈을 옆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아린이 물었다.

“지금 뭐 해요?”

“뭐가?”

“번거롭게 왜 바닥을 쓸면서 다니나 해서요. 어차피 지금도 이렇게 눈이 내려서 곧 다시 쌓일 텐데…….”

순간 천무진이 답했다.

“당신 옷이 젖을까 봐.”

그 한마디에 뒤를 쫓아 걷던 백아린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천무진의 그 말에 조금이나마 섭섭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백아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옷도 얇게 입고 다니잖아. 젖기까지 하면 어떻게 하려고 해. 거기다가 길도 미끄럽고.”

그 말까지 듣는 순간 백아린은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의 움직임을 알아챈 천무진 또한 걸음을 멈추고는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자신을 향하는 천무진의 목소리를 들은 백아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무인이에요.”

“알아.”

“마음만 먹으면 하늘도 훨훨 날 정도로 실력도 좋다고요.”

“그것도 알아.”

“그런데도…… 제가 걷기 편하게 눈을 쓸어 주는 거예요?”

“응.”

“……왜요?”

물어 오는 백아린의 목소리는 떨려 왔다.

그녀의 질문에 천무진이 답했다.

“그 길을 걷는 게 당신이니까.”

수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 그리고 그 안에는 백아린이 듣고 싶었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백아린은 듣고 싶었다.

보다 확실한 그의 마음을.

그랬기에 물었다.

“지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말해 줘요.”

단도직입적으로 다가오는 백아린의 모습.

그리고 천무진 또한 그런 그녀의 마음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을 살며 깨달았다.

특히나 조종을 당하면서 인형 같은 비참한 삶을 살며 뼈저리게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지금 할 수 있다고 해서 추후에도 같을 수는 없었다. 정말 작은 한마디라고 할지언정 그걸 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올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랬기에 해야만 했다.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이때.

백아린과 마주한 천무진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 상태로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마음에 담았다는 의미야. 좋아하고 있어. 동료가 아닌…… 여인으로.”

솔직한 천무진의 고백에 백아린의 눈동자가 떨려 오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백아린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때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천무진이 말했다.

“좀 급작스러웠을 거야. 당신도 당황스럽겠지. 생각할 시간을 줄 테니까 답변은 그 이후에 해도 돼. 내가 기다릴…….”

순간 백아린이 그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아뇨. 생각할 시간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언제부터였을까?

이 천무진이라는 사내를 마음에 담아 둔 건.

사실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어느 순간부터 백아린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이 사내가 있었다.

그랬기에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백아린이 말했다.

“절 배려해서 앞장서서 걸어가며 눈을 치워 준 건 너무 고마워요. 하지만 지금처럼 뒤에서 따라 걷기만 하면…….”

말과 함께 성큼 다가선 백아린의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천무진의 손을 움켜잡았다.

천무진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낀 백아린이 팔을 들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이렇게 당신의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갈 수 없잖아요.”

말과 함께 백아린은 천무진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가 원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의 옆에서 언제나 든든한 조력자로 함께해 주는 것.

천무진이 비를 맞고 걸을 때도 함께하고 싶었고, 지금처럼 차가운 눈길을 나아갈 때도 같이 걷고 싶었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할지라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한 백아린이 당차게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같이 걸을까요?”

옆에 선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눈을 빛내는 그녀.

그 모습에 천무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이내 말했다.

“지금 잡은 손 놓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 또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바라던 바예요.”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위로 하얀 눈송이들이 소복소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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