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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25화 (224/293)

225화. 진심 ― 당신이니까 (1)

단엽이 떠났다.

한천과의 비무로 생긴 상처들이 채 낫기도 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둘러 움직였다.

하루라도 빨리 가야, 그만큼 일찍 돌아올 수 있다는 이유였다.

떠나는 와중에도 그는 말했다.

돌아온다고. 대홍련의 일을 매듭짓고 세 달 안에 돌아오겠다고.

그 말과 함께 단엽이 사라진 지 어언 이틀 정도가 흐른 지금, 그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끼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한천이었다.

매일 같이 떠들어 주던 단엽이 사라져 버린 탓에 한천은 매 순간이 심심할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백아린이 적화신루에 다녀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데다, 자신은 부상 때문에 쉬고 있어야 하는 상황. 지루한 건 당연했다.

의자에 걸터앉은 한천이 몸을 뒤로 확 젖힌 채로 중얼거렸다.

“하, 단엽 하나 없다고 엄청 심심하네.”

그때였다.

“……부총관은 심심할지 몰라도 난 바쁘거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건 바로 한천의 맞은편이었다. 그곳에는 천무진이 몇 장의 서찰을 든 채로 안의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실 한천의 맞은편에 천무진이 있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애초에 이 방 자체가 천무진이 기거하는 장소였으니까.

의자가 쓰러질 듯 몸을 기대고 있던 한천이 갑자기 팔꿈치로 탁자를 짚으며 천무진에게 훅 다가왔다.

“뭐 재미있는 건수라도 있습니까?”

“궁금하면 좀 볼래?”

말과 함께 천무진이 슬쩍 옆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한천이 재빠르게 배를 움켜쥔 채로 신음 소리를 토해 냈다.

“아이고, 갑자기 단엽 그놈한테 당한 상처가 욱신거리네요.”

“하여튼 눈치는 빨라 가지고.”

일거리의 일부를 넘겨주려 했지만, 눈치 빠르게 빠져나가는 한천의 모습에 천무진이 혀를 내둘렀다.

그런 천무진의 반응에 픽 하고 웃음을 흘렸던 한천이 이내 말했다.

“제가 또 한 눈치 하죠.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지요.”

말과 함께 한천은 짓궂어 보이는 표정으로 계속 천무진을 바라봤다. 대놓고 쏘아 보내는 시선을 느낀 천무진이 서류에서 눈을 떼며 자신을 바라보는 한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할 말 있어?”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해도 됩니까?”

“이미 하려고 입을 연 거 같은데.”

천무진의 말에 한천은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말대로 이미 말을 하려고 입은 연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내 한천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우리 대장이 요새 기분이 좋아 보이더라고요.”

“……그래?”

“예. 본인은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툭하면 자기 팔목을 보면서 실실 웃고 있더라고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원.”

슬며시 흘리는 한천의 말에 천무진은 움찔했다.

백아린이 팔목을 보고 웃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녀에게 준 팔찌,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한천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천무진을 향해 말을 이었다.

“둘 사이에 분위기가 좀 묘한 거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요?”

“……별로.”

천무진이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을 때였다.

한천이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팍 치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설마 그 이후에 아무 진전도 없는 겁니까? 팔찌까지 선물해 주고?”

한천의 태도에 천무진은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천무진이 눈살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꼭 뭔가 일이 있었으면 하는 모양샌데.”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대답하기가 애매한지 말끝을 흐린 한천이 자신의 목을 긁적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재차 질문을 던졌다.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까?”

“없었어.”

곧바로 대답한 천무진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직까지는.”

천무진의 의미심장한 그 한마디에 한천은 그제야 한결 마음 놨다는 듯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한천이 경고하듯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 보여도 우리 대장 인기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인기가 많나?”

“당연하죠! 대장 좋다던 사내들을 여기서부터 줄지어 세우면 마교 내성 입구까지는 될 겁니다.”

뭐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받아치는 한천을 보며 천무진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투에는 언제나 백아린에 대한 진한 애정이 뚝뚝 흘러넘쳤다.

웃고 있는 천무진의 모습에 한천이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지금 제 말을 못 믿으시나 본데…….”

“믿어. 나도 알거든.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인지.”

어찌 모를까.

그녀의 장점은 아름다운 외모뿐만이 아니다.

사람의 아픈 상처를 감싸 안아 주는 그 배려심과 따뜻함. 그러한 그녀의 마음이 고통과 위험에 빠졌던 천무진을 번번이 구해 냈다.

그녀가 있었기에 다시금 사람을 믿을 수 있었고, 진짜 웃음도 되찾을 수 있었다.

조종당했던 삶과,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이번 생까지. 그랬기에 자신의 마음은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감춘 채로 살려고 했다.

그런 자신을 어둠 속에서 꺼내 준 여인.

그랬기에 그녀에게만큼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마음을.

천무진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웃고 있는 한천을 향해 슬쩍 입을 열었다.

“나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얼마든지 물어보시죠.”

백아린에 대한 질문을 할 거라 생각한 한천이 흔쾌히 대답한 직후였다.

천무진이 물었다.

“며칠 전 단엽과의 대결에서 펼쳤던 그거 황궁의 무공 아닌가?”

천무진의 그 한마디에 한천의 눈초리가 흔들렸다.

한천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금무강살기(金霧罡煞氣)를 알아본 거지?’

일반적으로 황궁의 무공들은 무림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군다나 금무강살기는 비전 절기로 특히나 더 비밀에 싸여 있는 무공이다.

그런데 그걸 천무진이 알아본 것이다.

사실 천무진이 금무강살기를 알아본 건 저번 생에서의 경험 덕분이다. 십천야의 조종을 받으며 황궁과 얽힌 일이 있었고 그때 그 무공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천무진의 물음에 한천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모든 과거를 꽁꽁 숨겨 왔다. 그러던 차에 자신이 감춰 왔던 무공을 드러냈고, 그게 어디에 근간을 둔 것인지 천무진이 알아차렸다.

과거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지만…….

이내 한천이 입을 열었다.

“……용케도 알아차리셨군요. 아무리 천룡성의 무인이라고 하셔도 알아보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한천의 대답에 천무진은 덤덤하게 답했다.

허나 둘의 대화에는 많은 숨은 진실들이 오고 갔다. 천무진은 예전부터 궁금해했다.

한천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다.

너무도 뛰어난 실력, 그렇지만 무림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건 물론이거니와 스스로도 정체를 감추고자 하는 걸 알았다.

이미 한 번의 삶을 살며 앞으로 이름을 떨칠 무인들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있는 천무진이다.

그렇지만 그 기억 속에조차 한천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물론 그 이름들 속에 백아린 역시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녀는 적화신루의 루주였으니까.

훗날 이름을 떨치는 그 고수가 백아린이라는 건 알게 됐다.

그에 반해 한천은 여전히 기억에서 찾을 수 없는 무인이었다.

어둠 속에서 살다가, 그렇게 또 어둠 속으로 사라질 사내.

그런 한천의 삶에 대해 의문이 있었지만, 이번 대답을 통해 하나 알게 됐다. 그는 황궁과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것.

거기다가 이 정도의 실력자라면 황궁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황궁에 소속되었던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자 몇 가지 더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천무진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한천에게서 시선을 떼며 손에 들린 서찰을 바라봤다.

갑자기 말을 멈추고 하던 일에 다시금 몰두하는 천무진의 모습에 한천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연히 질문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으니까.

한천이 입을 열었다.

“궁금하신 게 더 있으실 텐데 안 물어보시는 겁니까?”

“말했잖아. 하나만 묻겠다고.”

“……그래서 약속대로 하나만 물어보시겠다는 말입니까?”

“그럴까 하는데. 부총관도 그러길 바랄 것 같고.”

일부러 더 손에 들고 있는 종이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답하는 천무진의 모습에 한천은 픽 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을 배려하고자 하는 천무진의 마음이 느껴졌기에 한천은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금 의자에 몸을 편하게 기댄 채로 입을 열었다.

“더는 안 물어보신다고 하니 저도 그럼 믿고 여기서 조금 더 시간 죽이다가 가겠습니다.”

“있을 거면 좀 돕든가.”

“아시다시피 제가 환자라.”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하는 한천을 향해 천무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이내 천무진은 다시 서류들에 집중했다. 그가 한창 마교에서 뒤를 캐고 있는 이들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천무진에게 몇 번 대화를 걸어 보다가 대부분을 가볍게 넘기자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한천의 입에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갑작스럽게 높아진 목소리에 천무진은 슬쩍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 끝에는 창 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천이 있었다.

한천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자연스레 눈길을 돌렸던 천무진 또한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한천이 입을 열었다.

“눈이 엄청 내리는군요. 여기선 쉽게 보기 힘든 일인데 말이죠.”

겨울이다 보니 눈이 오는 건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허나 이곳은 광동성이었다.

광동성은 겨울에도 눈이 오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설령 온다고 해도 이처럼 많은 양이 쏟아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세상을 뒤덮을 듯 쏟아져 내리는 하얀 함박눈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눈이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내리는 눈을 보고 있던 한천이 놀란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잠깐 나갔다 오지.”

“멀쩡히 방 안에 잘 있으시다가 눈이 이렇게 오니까 나가신다고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어 오는 그에게 천무진이 답했다.

“할 일이 있어서.”

“뭡니까? 혹시 재미있는 거라면 저도…….”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 그를 천무진이 손을 들어 올려 막았다.

“환자라며. 어딜 따라오려고.”

“하하! 그걸 또 기억하시네.”

한천이 어색하게 웃을 때였다.

입구에 가서 선 천무진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며 재차 경고했다.

“절대 따라오지 마. 중요한 일을…… 매듭지으러 가는 거니까.”

* * *

마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적멱산의 흑록채라는 산채. 그곳에 있는 이들은 얼마 전부터 이곳을 점령한 십천야의 한 명인 매유검으로 인해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필요한 것들을 구해 왔고, 또 만들기도 했다.

현재 흑록채 채주의 거처는 매유검이 쓰고 있었다.

원래 채주였던 상충의 목을 벤 이후부터 이곳에서 매유검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압도적인 무위.

그리고 자신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찢어 죽이는 잔혹함까지.

그런 그가 두려워 흑록채의 녹림도들은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그렇게 약 열흘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후,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매유검의 명을 따라 일을 진두지휘하던 흑록채의 사내 한 명이 그의 거처로 들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시키신 일을 모두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래?”

침상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매유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내는 침상에 걸터앉은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숨죽인 채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매유검이 말했다.

“끝냈으면 다들 광장으로 모이라고 해. 마지막으로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대협.”

말을 마친 사내가 서둘러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매유검에게서는 언제나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엄청난 살기가.

그렇게 수하가 뛰쳐나간 이후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매유검이 다소 구겨진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이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준비도 끝이 났겠다 이 일을 아는 자는…… 하나라도 적은 게 좋겠지.”

스르릉.

말과 함께 검을 뽑아 든 매유검.

그가 성큼성큼 거처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채주의 거처로 매유검이 돌아왔다.

돌아온 그의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 피는 다름 아닌 이곳 흑록채 녹림도들의 것이었다. 일을 끝마쳤으니 더는 그들이 필요하지 않았고, 혹시라도 자신의 계획이 새어 나갈 것을 염려해 모두를 죽인 것이다.

털썩.

소리 나게 침상에 걸터앉은 매유검은 옆에 놓여 있는 술병을 들어 올렸다.

벌컥벌컥.

단번에 술병에 담긴 술을 들이켠 그가 곧바로 손을 휘둘렀다.

쨍그랑!

산산조각이 나며 깨어져 나가는 술병.

그 순간 장포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매유검의 입가가 비틀렸다.

비웃음 가득한 입으로 그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천무진, 조금만 기다려라. 곧…… 내가 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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