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마음 ― 같이 갈래요? (1)
백아린에게 줄 붉은 팔찌를 하나 사 든 천무진은 곧장 거처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줄곧 동행했던 한천이 의미심장한 인사를 건넸다.
“그럼 방해자는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내일 뵙죠.”
말을 마치고 빠르게 사라지는 한천을 뒤로한 채 천무진은 그 자리에 서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가 떠올라 무작정 이 팔찌를 사 들긴 했지만, 막상 거처에 도착하니 어떻게 건네야 할지 고민이 되는 탓이다.
허나 머뭇거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천무진은 곧장 백아린이 머물고 있는 처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막 천무진이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벌컥.
백아린이 기거하는 처소의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그녀를 발견한 천무진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걸었다.
“어이, 백아린.”
“이제 와요?”
“응, 막 돌아왔어.”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백아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번에 일어난 마교 소교주 습격 사건과 관련된 이들을 뒷조사하던 중, 나름 윗선과 연관되었을 거라 판단되는 송건웅을 밀착하여 감시하던 천무진이다.
그녀의 질문에 천무진이 간단히 답했다.
“별건 없었어.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고, 아직까지는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그렇군요. 빨리 좀 움직여 주면 좋겠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지금 같은 때엔 최대한 몸을 사리려 하겠지. 그래도 마교에 심어져 있던 십천야가 죽었으니, 결국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리는 그 기회를 잡으면 되고.”
침착하게 말하는 천무진과 마주하고 있던 백아린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같은 그녀의 모습에 천무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갑자기?”
“아,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그냥 예전보다 여유가 좀 있어 보여서요.”
다른 일과는 달리 십천야와 관련되기만 하면 언제나 과할 정도로 흥분해서 나서던 천무진이었다. 그러던 그가 오히려 이처럼 담담하게 대응하고 있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 그리고 그 이유엔 백아린 그녀가 있었다.
혹시나 기분이 상했을까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그녀에게 천무진이 말했다.
“……당신 덕분이야.”
“저요?”
“그때 당신이 날 구해 줬잖아. 그다음부터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
적련화에게 당했던 그 날.
지옥과도 같았던 그 순간이 다시금 찾아왔던 그때 바람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해 준 여인.
백아린 덕분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게 되며 천무진의 심경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든 하나의 빛줄기, 천무진에게 있어 그녀가 자신을 구해 낸 건 단순히 고맙다는 말 정도로 표현할 일이 아니었다.
그녀 덕분에 천무진은 다시금 삶을 얻었고, 또 하나…… 희망이라는 걸 가지게 됐으니까.
막연하게 두려워했었다.
애써 아닌 척 외면해 왔지만, 결국 언젠가는 저번 생에서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백아린이 자신을 그 지옥에서 끄집어내 주는 순간 이번 삶이 저번과는 다를 거라는 정체 모를 확신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이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봐요.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제법 쓸 만할 거라고 했죠? 그런 절 보고 탐탁지 않아 하던 게 누구였더라.”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어느덧 일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과거의 일을 들먹이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당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처음 만남에서 천무진은 백아린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다.
이전 생에서 기억나지 않는 정체불명의 여인이라는 존재에게 조종을 당했던 이유가 가장 컸다. 여자라면 다소 불편했던 상황인지라 백아린의 등장에 표정까지 찡그렸던 천무진이다.
백아린의 말에 과거의 일이 생각난 천무진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늦었지만 그때 일은 사과하지. 당신 말대로야. 당신은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이더군.”
“장난친 건데 그렇게 사과를 하면…….”
“진심이니까.”
천무진의 그 한마디에 백아린은 다시금 입을 닫은 채로 그를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라는 그 한마디에 담긴 수많은 감정들이 밀려왔다.
말을 마친 천무진은 슬쩍 품 안쪽으로 손을 가져다 넣었다.
백아린에게 주려고 사 온 팔찌를 선물하기에 지금 순간이 나쁘지 않다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아 참, 내 정신 좀 봐. 잠깐 다녀올 곳이 좀 있어서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아.”
천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팔찌를 꺼내려던 것을 멈칫하는 찰나 백아린이 슬쩍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갈래요?”
백아린의 제안에 천무진은 품 안에 넣었던 손을 그대로 꺼냈다. 그러고는 이내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천무진을 대동한 채로 백아린이 향한 곳은 종종 찾아갔던 적화신루의 거점이었다.
급히 의뢰할 것이 있었던 백아린은 사람을 시키기보다는 직접 거점을 찾아왔고, 일을 마치는 동안 천무진은 바깥에 선 채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지 약 일각 가량이 지났을 무렵.
일을 끝마친 그녀가 걸어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백아린이 먼저 말을 걸었다.
“많이 기다렸죠?”
“뭐, 별로. 그나저나 왜 이리 사람이 많지?”
건물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덕분에 주변의 오가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었던 천무진이다. 아까 전 한천과 임무를 위해 움직였을 때도 느꼈지만 원래도 사람이 많은 이쪽 번화가가 오늘따라 더욱 많은 이들로 붐볐다.
처음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보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다.
천무진의 질문에 마찬가지로 오고 가는 사람들을 슬쩍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답했다.
“오늘이 아마 사월야(四月夜)라서 그런 거 같은데요?”
“벌써 그렇게 됐나?”
사월야라는 건 마교에 있는 축제의 이름이다. 일 년에 네 번 벌어지는 축제로, 일종의 연례행사라고 보면 됐다.
사월야가 벌어지는 날은 마교 외성에서 각종 행사와, 볼거리들이 즐비했기에 사람들이 붐비는 건 당연했다.
이 행사는 수십 년 전에 만들어져서 여태까지 쭉 이어져 왔는데, 이 모든 건 마교 외성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시작됐었다.
축제라는 이름하에 여러 가지 행사들이 벌어지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붐볐고, 그건 곧 마교 외성에 있는 가게들의 매출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굳이 장사를 하는 이들이 아니라고 해도 오늘 하루만큼은 여러 가지 것들을 즐길 수 있으니, 당연히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마교 본성에서 물심양면으로 여러 가지 지원들을 해 줬으니, 주기적인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생각보다 화려하게 진행됐다.
오늘이 사월야라는 사실을 떠올린 백아린이 급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서두르죠. 시간대를 보니 잘못하면 인파에 휩쓸릴지도 몰라요.”
지금도 길거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인파들.
허나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사월야의 백미인 불꽃놀이가 시작된다면 그때는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릴 테니 말이다.
백아린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렸기에 천무진 또한 서둘러 그녀와 함께 몸을 움직였다.
늦은 밤.
평소라면 점점 조용해졌어야 할 시간임에도 오늘의 마교 외성은 무척이나 화려했고, 시끄러웠다.
인파들 사이에 파고든 두 사람이 빠르게 움직이던 그때였다.
피융!
귀를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천무진과 백아린은 거의 동시에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른 새하얀 불꽃 한 줄기.
그리고 그건 잠시 후 시작될 불꽃놀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다른 길목에 위치하고 있던 이들 모두가 서둘러 불꽃놀이를 구경하기 용이한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가뜩이나 사람으로 가득하던 길목에 더욱 많은 이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갑자기 둘 사이로 파고드는 수많은 이들로 인해 백아린이 당황한 듯 인파에 휩쓸렸다.
“어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을 밀면서 들어오는 이들을 모조리 쓰러트릴 정도의 괴력이 있는 백아린이었지만 상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랬기에 백아린은 어쩌지도 못한 채로 인파에 휩쓸리며 오히려 온 길을 되돌아가듯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잠시만요! 좀 지나갈게요!”
허나 그런 백아린의 외침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옆에 있던 천무진이 보이지 않자 백아린은 까치발을 들고 주변을 빠르게 확인했다.
하지만 백아린의 눈에 천무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최대한 몸을 위로 뺀 채 낑낑거리며 어떻게든 앞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그때였다.
스윽.
수많은 인파 사이.
그들 사이에서 뻗어져 나온 손 하나가 백아린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녀가 채 놀라기도 전이었다. 인파들 사이에서 그녀의 손목을 쥔 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목을 잡아챈 사람이 자신이 찾던 천무진이라는 걸 확인한 백아린이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안 보여서 깜짝 놀랐잖아요.”
“놀란 건 이쪽이거든?”
말을 마친 천무진은 이내 두 발에 내공을 불어넣은 채로 그 자리에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그가 공력을 싣자 수많은 인파들이 밀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무진은 마치 커다란 바위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백아린에게 몰려드는 인파를 막아선 천무진이 여기저기 휩쓸려 다녔던 그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뭐 하고 있던 거야? 힘은 천하장사면서.”
“그러니까요. 그런 제가 힘을 쓰면 어떻겠어요.”
웃으며 대꾸하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천무진이 말했다.
“됐고.”
백아린의 손목을 잡고 있던 천무진의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그는 백아린의 손바닥을 꽉 움켜쥐었다.
맞잡은 손바닥을 보며 그녀가 놀란 듯 눈을 치켜떴을 때였다.
몸을 돌린 천무진이 말했다.
“당신은 그냥 따라와.”
말을 마친 천무진은 백아린의 손바닥을 꼭 쥔 채 앞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밀려드는 사람들 틈으로 걸어 나갔다.
주변에는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지만 백아린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계속해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천무진 덕분이라는 것을.
그가 백아린이 걷기 쉽도록 직접 몸으로 다른 이들을 막아 주고 있는 중이었다. 혹여 떨어지지 않기 위해 손을 꼭 잡은 채로 말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밀려드는 이들을 막아 주며 나아가는 천무진.
그런 천무진의 넓은 등을 백아린은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천무진의 손을 잡은 채로 그저 계속 뒤를 따라 걷기만 하던 백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등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웃고 있는 자신을 보면 천무진이 무슨 생각을 할지.
아마 뭐가 그리 재미있냐며 불쾌한 듯 툴툴거릴 게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웃는 이유는 이 상황이 웃겨서가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좋아서.
그냥…… 행복해서.
그것이 전부였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계속해서 걸었다. 대략 반 각 가까운 시간을 걸은 후에야 천무진이 멈추어 섰다.
그가 말했다.
“휴, 여긴 좀 낫네.”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곳과 다소 떨어진 위치라 그런지 사람은 아까보다 현저히 줄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천무진이 이내 말을 이었다.
“사람 많은 곳은 질색…….”
말을 꺼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피유우웅! 파앙!
요란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천무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휘황찬란한 불꽃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색색들이 불꽃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냈고, 그 모습에 천무진은 잠시 말을 하려던 것도 멈춘 채 그쪽으로 시선을 줘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백아린도 마찬가지였다.
천무진과 백아린은 나란히 선 채로 하늘 위를 수놓는 불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천무진의 시선에 붉은 불꽃이 확 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색깔을 보는 순간 천무진은 잠시 잊고 있던 것 하나가 떠올랐다.
품 안에 가지고 있던 붉은 팔찌였다.
천무진의 시선이 슬며시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린애처럼 웃으며 눈을 빛내고 있는 백아린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슬쩍 훔쳐보던 천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유치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뭐가요?”
여전히 화려한 불꽃이 터져 나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백아린이 물었다. 그러자 천무진이 답했다.
“불꽃놀이. 원래 별로 안 좋아했거든. 이런 걸 왜 보나 싶었는데…… 오늘은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천무진의 말에 뭔가 답을 하려던 백아린이 갑자기 움찔했다. 생각해 보니 아직까지도 두 손을 꼭 쥔 채로 함께 불꽃놀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맞잡고 있는 손을 눈으로 확인한 백아린이 말했다.
“아, 미안해요. 손을 놓는다는 걸…….”
말과 함께 백아린이 막 맞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는 찰나였다. 천무진이 오히려 그 손을 꽉 쥐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이 기회였으니까.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잠시만.”
천무진이 반대편 손을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안에 넣어 두었던 붉은 팔찌를 꺼내어 들었다.
갑작스럽게 팔찌를 꺼내어 든 천무진의 모습에 백아린이 깜짝 놀라는 그때였다.
천무진은 곧장 손바닥으로 쥐고 있던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그녀의 팔목에 자신이 사 온 팔찌를 슬며시 끼워 넣었다.
스르륵.
순식간에 백아린의 팔목에 자리한 붉은 팔찌.
그녀가 놀란 눈으로 천무진을 올려다볼 때였다.
천무진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별건 아니고 오는 길에 산 거야. 당신 가져.”
“……저 주려고 사신 거예요?”
“응, 당신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천무진이었다.
“슬슬 돌아가지.”
말을 마친 천무진이 백아린의 손을 받쳐 주기 위해 아직까지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 때였다.
꼬옥.
손바닥 사이를 빠져나가던 천무진의 손을 백아린이 갑자기 움켜쥐었다.
갑작스레 자신의 손을 꽉 쥔 그녀의 모습에 천무진이 왜 그러냐고 질문을 던지려는 그 찰나였다.
백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놓지 말아요.”
펑! 퍼엉!
여전히 하늘을 밝게 빛내는 불꽃들.
그리고 그 불꽃들 아래에서 백아린이 꽉 쥔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