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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16화 (215/293)

216화. 최후의 보루 ― 내 선택은…… (2)

마교 소교주 악준기의 암살 시도 사건.

그 사건을 막아 낸 천무진 일행은 곧장 그곳에서 제압한 이들의 신상 조사에 들어갔다. 대다수가 죽거나, 자결을 한 탓에 스스로 얼굴을 망가트린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은 어려웠다.

하지만 키나 체형 같은 신체적 특징과, 갑자기 실종된 정황들을 따지며 의심스러운 자들을 추려 갔다.

그리고 역시나 가장 신경을 쏟은 건 그들의 수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양사창의 존재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를 밝히는 건 쉽지 않았다.

양사창은 특이한 신체적 특징도 없었고, 뭔가를 특정할 만한 장신구나 물건을 지니고 있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쉽게 포기할 순 없었고, 백아린은 백방으로 양사창의 존재를 알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신원 파악을 마친 자들을 조사해 숨겨져 있던 십천야와의 고리를 찾아냈고, 연관된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같이 거침없는 소교주 악준기의 행보에 마교가 발칵 뒤집히는 건 당연했다. 수많은 이들을 잡아들였고, 개중 대부분은 교주 쪽 인물들이었으니까.

허나 분명한 증거가 있었고, 소교주인 악준기의 암살을 시도한 일과 연관되었다는 건 제아무리 교주를 따르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편을 들어주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렇게 악준기는 이번 일과 관련 하여 전권을 위임받고 매서운 기세로 마교 내부에 숨어 있는 십천야를 색출해 내고 있었다.

악준기가 동분서주하고 있을 그때.

바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무진 일행 또한 이번 일과 연관되어 무척이나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십천야로 의심되는 이들에 대한 뒷조사를 위해 천무진과 한천은 마교 외성을 걷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뒤를 쫓는 자는 용호검각(龍虎劍閣)의 부각주인 송건웅(宋乾雄)이라는 사내였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을 무렵 홀로 외성으로 나온 그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를 둔 채로 천무진과 한천이 그 뒤를 쫓고 있었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송건웅을 뒤쫓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마교 외성에 있는 정월루라는 이름을 지닌 기루 앞이었다.

정월루의 입구에 도착한 송건웅은 주변을 한 번 살피고는 이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순간 천무진은 바깥에서 대기했고, 한천이 곧장 그 뒤를 따라붙었다. 천무진과는 달리 한천은 크게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고, 그랬기에 이런 상황에서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무진이 약 이 각가량을 바깥에서 기다렸을 때다.

안으로 들어섰던 한천이 터덜터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지친다는 듯 머리에 쓰고 있던 죽립을 풀어헤쳤다.

근처 골목길에 몸을 감춘 채로 대기하고 있던 천무진이 한천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천무진이 있는 곳에 도착한 한천은 자신이 본 걸 알렸다.

“추수림(秋秀林), 오위(吳葦), 모숙룡(慕宿龍) 이 세 사람과 만났더군요. 의심했던 대로입니다.”

“무슨 특별한 이야기는 없고?”

“뭐 조금 엿듣긴 했는데…… 아무래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그래도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는 걸 보아하니 조만간 사고 하나 치지 않을까 싶은데요.”

송건웅은 나름 뛰어난 무인이었지만 중간책 정도로 파악된 자였다. 몇 가지 증거들이 있어 당장 체포해도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천무진은 오히려 그를 일부러 놔두고 있었다.

어차피 송건웅은 잔챙이에 불과했기에, 그를 미끼로 더욱 큰 자들을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선 채로 천무진과 한천은 잠시 대화를 나눴다. 한천이 안에서 들은 것들 중 몇 가지 사실을 전달하긴 했지만 그다지 특별할 건 없었다.

대충 상황 파악을 끝낸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말했다.

“고생했어, 부총관. 돌아가자고.”

말을 마친 천무진이 슬쩍 몸을 돌려 마교 내성을 향해 움직였다.

추적이 끝난 탓인지 천무진 또한 시야를 가리고 있던 죽립을 풀었다. 반나절 가까이 송건웅의 뒤를 쫓아 대던 탓에 오늘 하루도 어느덧 다 지나가고 있었다.

천무진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한천이 크게 하품을 했다.

“하암, 피곤하네요.”

슬쩍 천무진의 눈치를 살피던 한천이 이내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괜히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럴 때 술 한잔하면 딱인데 말이야.”

그런 그를 향해 천무진이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말라는 듯 딱 잘라 말했다.

“백아린이 술 마시지 말고 바로 돌아오라던데. 특히 부총관은.”

“하아, 하여튼 우리 대장 귀신같다니까.”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전해 놓은 백아린의 행동에 한천이 혀를 내둘렀다. 허나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말에 아쉬운 척 행동하고 있었지만, 사실 한천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슬쩍 흘리듯 말을 이었다.

“근데 별로 안 놀라신 모양입니다.”

“뭐가?”

“뭐…… 있잖습니까, 그거.”

은근슬쩍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천무진은 한천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아린이 루주라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드러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다.

사실 한천 또한 적잖이 놀란 일이었다.

굳이 들킬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정체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한천은 백아린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더 이상은 천무진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한천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닫았던 천무진이 이내 짧게 답했다.

“……놀랐어.”

“그래요? 전혀 안 그래 보이시던데.”

“내색을 안 했을 뿐이야. 하지만 처음에 잠깐 놀랐던 거지 좀 지나니 오히려 쉽게 수긍이 되더군. 그런 뛰어난 능력에 그 자리라니…… 실력이 아깝잖아?”

백아린에 대한 칭찬에 한천이 코를 슥 문지르며 말을 받았다.

“하하! 그렇죠. 대장이 능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어릴 때부터 어찌나 그리 영특하던지 원.”

웃으며 말하는 한천의 모습에 천무진이 그를 슬쩍 바라보더니 물었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모양이던데.”

“그럼요. 저희 인연이 십몇 년은 족히 되는걸요.”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싱글벙글 웃는 한천을 향해 천무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궁금하네. 그 여자의 어릴 때 모습.”

“아주 귀여운 아이였습니다. 거기다가 지금과는 달리 여성스러운 물건도 좋아했었고요. 키도 겨우 요만했었다니까요? 그 작은 키로 절 엄청 쫓아다녔죠. 생각해 보니 예전엔 정말 착했는데 말이죠. 지금은 어쩌다 이렇게 절 들들 볶는 분이 되셨는지 원.”

툴툴거리는 한천을 향해 천무진이 짧게 답했다.

“그때도 착했나 보군.”

생각지도 못한 천무진의 그 한 마디에 한천은 움찔했다.

사실 백아린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언제나 비슷했다.

아름답지만 차가워 보인다는 말들.

그 외에 일 처리가 뛰어나다고 칭찬하는 이들도 많았다. 허나 그들 중 누구도 백아린을 향해 착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적화신루의 루주가 되면서 언제나 그런 모습은 뒷전이었으니까.

선한 모습보다는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지만 한천은 알고 있다. 뛰어난 능력 뒤에 자리하고 있는 그녀의 진짜 장점을.

어둠 속에 살고 있던 자신을 구해 냈던 그 밝은 빛을 머금은 선함,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백아린의 선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천무진의 모습에 놀란 듯 눈을 치켜떴던 한천이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변한 게 없으시죠.”

참으로 한결같은 여인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 또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천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한천은 이내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대장에 대해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시죠. 제가 다 말씀드릴 테니.”

“그건 사양하지. 물어볼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고 싶으니까.”

“그러시다면야 뭐.”

어깨를 으쓱하며 걸어가는 한천을 향해 잠시 시선을 주던 천무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물어보라고 해서 하는 말인데 백아린보다는 당신에 대해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저한테요? 뭡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가는 한천을 향해 천무진이 짧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 정체.”

“……”

천무진의 질문에 한천은 입을 닫았다.

그가 어떠한 의도로 이 같은 질문을 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천이 이내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아시지 않습니까. 적화신루의 부총관이죠.”

“뭐…… 그렇긴 하지.”

대답하지 않는 한천을 향해 천무진 또한 더는 아무런 것도 캐묻지 않았다. 이 넓은 무림에 과거가 있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랴.

질문을 해도 괜찮다고 했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하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더는 그와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천무진은 솔직한 말로 상황을 매듭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언젠가 말해도 될 때가 오면…… 그때는 당신 이야기가 듣고 싶군.”

무슨 소리냐고 둘러대도 될 이야기.

그렇지만 한천은 천무진의 그런 말에 빙긋 웃었다.

너무도 속 보이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웃는 얼굴로 한천이 답했다.

“……언젠가 그럴 날이 오겠죠.”

“기대하지.”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춘 채로 내성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점점 어둠이 찾아오는 마교의 외성.

한창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이라 그런지 외성의 번화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기루와 객잔들에서는 연신 밝은 빛을 쏟아 냈고, 길거리에 즐비한 노점상이나 가게들도 무척이나 분주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시끌벅적한 번화가를 지나쳐 갈 때였다.

한천을 뒤따라 걸어가던 천무진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이내 뭔가를 발견한 듯 길옆에 위치한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무진이 멈추어 선 곳.

그곳은 다름 아닌 화려한 장신구들을 파는 가게였다.

천무진이 입구에 선 채로 바깥에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자 안쪽에 있던 가게 점원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서둘러 모습을 드러냈다.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잠시 구경 좀 하고 싶은데.”

“아, 그럼요. 얼마든지 하시지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바로 말씀 주시고요.”

그렇게 천무진과 점원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앞장서서 걸어가던 한천이 어느덧 다가와 있었다.

그가 장신구 가게 앞에 자리하고 있는 천무진을 향해 물었다.

“뭐 하십니까?”

어깨 너머로 곁눈질하며 물어오는 한천을 향해 천무진이 답했다.

“……그냥 눈에 걸리는 게 좀 있어서.”

말을 내뱉는 천무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팔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팔찌는 붉은색의 작은 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십여 개의 붉은 옥들이 얇은 금줄에 길게 꿰어져 있는 것이었다.

말없이 팔찌를 바라보는 천무진의 모습에 한천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팔찌 하시게요? 이런 거 좋아하셨습니까?”

“아니, 내 게 아니라……”

말을 하던 천무진이 점점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한천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물었다.

“천 공자님 것이 아니면 뭔데요? 아아, 천 공자님이 차시려는 게 아니라 다른 분께 선물로 주시려는 거군요. 하하! 대체 누구기에 천 공자님이 이런 선물을…….”

웃으며 말을 내뱉던 한천의 목소리 또한 방금 전 천무진의 것처럼 점점 잦아들었다.

그가 이내 당황한 듯 물었다.

“설마 그 상대가 저희 대장입니까?”

“뭐, 신세 진 것도 많으니까. 고마워서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그냥 뭘 주면 좋을까 싶던 차에 보이더라고. 백아린이 특별히 장신구를 안 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팔찌는 어울릴 것 같아서.”

횡설수설하는 천무진의 모습은 평소와 무척이나 달라 보였다.

그만큼 스스로도 당황하고,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천무진은 한천이 아까 말한 이야기들 중 어렸을 적 여성스러운 걸 좋아했다던 그 말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 선한 성격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다른 부분 또한 다르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저 상황이 이러니까.

좋아하던 그 모든 걸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온 팔찌.

평소의 천무진이었다면 절대 그럴 일이 없었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저절로 이쪽으로 다가와 팔찌를 확인하게 되었다.

한천이 동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결국 지금처럼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에 처하고야 말았다.

허나 일은 이미 벌어졌고, 이 팔찌를 백아린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 또한 진심이었다.

천무진이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듯 물었다.

“왜? 별론가?”

평소답지 않은 그의 모습.

그렇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한천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진짜 미소를 보이고야 말았다.

그가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뇨, 예쁘네요. 그 팔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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