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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07화 (206/293)

207화. 새로운 시대 ― 억울해 마시오 (1)

자신을 꺾고 대홍련의 주인이 되라는 단관호의 말에 화가 난 듯 눈을 부릅뜨고 있던 단엽의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처음엔 놀랐고, 이내 화가 치밀었었다.

자신의 삼촌인 단관호가 한편이 되어 달라는 십천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으니까.

허나 모든 말을 끝까지 전해 듣자 그것이 정말로 십천야와 손을 잡기 위해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단관호는 원하고 있는 것이다.

련주의 자리를 단엽이 가져가기를. 그리고 그런 식으로라도 십천야를 따르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막아 주기를 말이다.

그랬기에 단엽은 알아야 했다.

왜 단관호가 이 같은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를.

단엽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얼추 한 달 전쯤이었나?"

과거의 기억을 곱씹으며 웃고 있던 단관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십천야라는 자들이 내 거처를 찾아왔더군."

그들의 방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사전에 약속을 잡았던 것도 아니다. 애초에 그랬다면 이렇게 단엽에게 갑자기 알렸을 리가 없다.

단엽이 쫓고 있는 십천야라는 존재들.

사실 단관호 또한 단엽에게서 정체불명의 세력을 쫓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그들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허나 단엽에게 들은 그들은 무척이나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수십 년이 넘게 무림에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홍련의 련주인 단관호가 그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이들이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완벽히 감출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단관호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비록 본거지가 아닌 외부에 있을 때였다고는 하지만 련주인 단관호의 거처에 아무도 모르게 들어왔다.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직접 눈앞에 나타난 십천야의 인물을 보는 순간 단관호는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오늘 자신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거처로 들어선 십천야의 인물이 말했다.

자신들의 편이 되라고.

코웃음이 나올 말이었다.

단관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들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걸. 그걸 알면서도 그는 그들이 내민 손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랬던 단관호의 생각이 어딘가에 미치는 순간, 그는 결정을 바꿨다.

자신 하나 죽는 문제였다면 전혀 거리낄 것 없었지만, 이건 그것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련주인 자신이 이렇게 그냥 죽게 된다면 대홍련은 분열하게 될 것이 분명한 상황. 그 말은 곧 대홍련이 약해진다는 의미였다.

그건 현재 십천야와 싸우고 있는 단엽의 힘이 되어 줘야 할 근간이 휘청인다는 말과도 같았다.

단관호는 그걸 막고 싶었다.

온전한 상태로 그 모든 걸 정식으로 단엽에게 넘기고 싶었고, 그로 인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대홍련의 무인들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허나 알고 있다.

늙어 버린 자신에게는 십천야에게서 대홍련을 지켜 낼 힘이 모자라다는 것을.

간략하게 그날의 만남을 설명한 단관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그들과 만나는 순간 난 알았다. 내겐 그들과 싸울 힘이 없다는 걸."

다른 이도 아닌 사파의 거두인 대홍련의 수장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기 어려운 말. 하지만 그만큼 십천야의 힘은 대단했다.

단엽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단관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하지만…… 넌 다르지."

"다르긴 뭐가 달라. 삼촌이 여태까지 한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데. 난 아직……."

단관호가 손을 내밀며 단엽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들이 왜 날 찾아왔다 생각하느냐? 여태까지 자신들의 정체를 꽁꽁 감춰 왔던 그들이 왜 굳이 날 찾아와 같은 편이 되자는 제안을 했는지 생각해 봤지. 그러니 답은 간단하더군."

"그 답이 뭔데?"

자신을 향한 단엽의 질문에 단관호가 담담히 말을 받았다.

"네가, 그리고 너와 함께하는 그 일행들이 두려운 게야. 그들은 지금 네가 무서운 거다."

"……."

단관호의 말에 단엽은 침묵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단관호를 바라보던 단엽이 이내 물었다.

"삼촌은 내가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단엽의 질문에 단관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이다. 넌 단엽이니까."

단관호 또한 뛰어난 재능을 지닌 무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사파의 기둥 중 하나인 대홍련의 수장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단엽은 그런 자신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단관호가 팔십 년 정도의 인생을 살아오며 보아 왔던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이 바로 단엽이었으니까.

그랬기에 좋았다.

그 뛰어난 인물이 자신의 조카고, 또 대홍련의 뒤를 이을 재목이라는 사실이.

단엽과 시선을 마주한 채로 단관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랬기에 네게 말하는 거다, 단엽."

말과 함께 단관호가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손에 들린 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붉은색의 인장이었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단엽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대홍련 련주만이 지닐 수 있는 인장이었으니까.

인장을 탁자 위에 올려 둔 채로 단관호가 말했다.

"……대홍련을 지켜다오."

단엽은 말없이 단관호를 바라봤다.

차가운 인상, 그렇지만 그 속내는 참으로 뜨거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만큼 무인으로서의 자존심 또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적들의 제안에 원치 않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단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런 괴로운 선택을 한 건 역시나 대홍련에 속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리라.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엽을 향해 단관호가 이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제 나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냐. 내 나이가 벌써 여든이 넘었다, 녀석아."

"아직 백 년은 더 살겠구만 무슨 나이 타령이야."

"그거야 내가 관리를 잘했으니 그리 보이는 게지. 겉보기와는 달리 속은 다 엉망이거든?"

웃으며 말하는 그를 향해 단엽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 은퇴라도 하려고?"

은퇴라는 말에 단관호가 움찔했다.

분명 언젠가 나이를 먹어 더 이상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도 사라지면 모든 걸 놓고 무림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단관호가 씩 웃었다.

"그럴 리가. 싸워야 할 상대를 남겨 두고 은퇴를 하는 건 꼴사납지 않더냐. 난 도망치는 건 질색이거든."

련주의 자리에선 물러날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싸움에서 빠질 생각은 없었다. 련주의 자리를 벗어던지고 한 명의 무인으로 십천야와 싸울 것이고, 대홍련을 지킬 것이다.

그것이 은퇴 전 단관호가 매듭지어야 할 마지막 임무일 터.

단엽은 단관호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련주의 인장을 바라봤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단엽이 물었다.

"만약 내가 삼촌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쩔 생각이야?"

"말했잖느냐. 내 능력으론 그들을 막을 수 없고, 대홍련을 지키기 위해 난 그들의 손을 잡아야 할 거라고."

심각한 내용과 달리 단관호는 웃고 있었다.

마치 단엽의 선택이 어떨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런 그의 모습에 단엽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끄응."

스스로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낮은 신음 소리를 흘리는 단엽의 눈동자에 이내 확신이 들어찼다.

고민을 끝낸 그가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기댔다.

"하여튼 사람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뭐 있다니까."

"그 말은…… 수락이라고 들어도 되겠느냐?"

물어 오는 단관호의 질문에 단엽은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행동으로 자신의 결정을 보여 줬다. 손을 쭉 내민 그가 책상 위에 자리하고 있던 련주의 인장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단관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거 한동안 바쁘게 생겼구나."

련주의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었기에 그 전에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훗날 잡소리 없이 단엽에게 대홍련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힘이 남아 있는 지금 련주로서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단관호가 아직까지 인장을 움켜쥔 채로 자신의 뜻을 내보이고 있는 단엽을 향해 말했다.

"알겠으니 그만 놓고 가거라. 곧 련주의 자리를 내줄 생각이지만 아직까지는 내가 해야 할 일들도 있으니까. 그 전까지 련주의 인장은 내가 보관하도록 하지."

"그렇게 해, 삼촌."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우선은 좀 쉬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자꾸나."

단관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던 단엽이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웬만한 건 내일 다 마무리해 두자고. 끝나는 대로 돌아가야 하니까."

"바로 천룡성 무인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이냐?"

"응, 나도…… 그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단엽의 말에 단관호 또한 알겠다는 듯 픽 웃었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리고 사라지는 단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단관호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많이도 컸구나.’

그 조그맣던 아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커서 대홍련의 부련주가 되더니, 이제는 자신의 자리까지 받게 되었다.

삼십 년이 넘는 긴 시간.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스윽.

탁자 위에 올려 둔 련주의 인장을 회수한 단관호가 의자에 기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리는 건가."

* * *

흑풍진천대 대주 양사창.

오랫동안 마교에 숨겨져 있던 십천야인 그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근 들어 마교 내에서 원치 않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는 탓이다.

대놓고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가 파악하기로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마교의 소교주인 악준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천무진 그놈이 사람을 귀찮게 하는군.’

천무진이 마교로 돌아온 모습을 보며 적잖이 놀란 양사창이다. 애초에 그는 십천야에서 준비하고 있던 계획을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천무진이 자신들에게 조종을 당하게 될 거라 여겼다.

그랬기에 떠나는 천무진 일행의 모습을 은밀히 지켜보며 마지막 인사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천무진은 멀쩡하게 돌아왔고, 뒤이어 날아든 연락을 통해 도리어 그를 노렸던 적련화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상황이 이리되자 마교의 일을 전담하는 양사창으로서는 머리가 아파 왔다.

천무진이 멀쩡하게 돌아왔으니 소교주는 더욱 날뛸 것이고, 마교 내에서 움직이는 십천야의 계획들을 방해할 게 분명했으니까.

양사창이 불만스레 손으로 탁자를 쾅 쳤다.

그러고는 이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망할, 더럽게 귀찮게 하는군."

가뜩이나 지금의 십천야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많은 이들이 죽은 데다, 예상치 못하게 벌어지는 일들을 수습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오랜 시간 십천야의 일원으로 살아오며 이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자신들이 원하면 모든 이루어졌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천무진이 나타난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계속되는 실패, 그리고 점점 좋지 않게 변해 가는 내부의 분위기까지.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하나인 마교의 일들까지 흔들린다면…….

‘어르신의 노여움을 사면 안 될 터인데.’

어르신의 눈 밖에 나기를 원치 않았기에 양사창은 어떻게든 마교의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계획대로만 됐다면 소교주는 도움을 줄 힘의 상당 부분을 잃고 다시금 예전처럼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가야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날뛰고 있고, 이대로 뒀다가는 마교의 일부 세력 또한 흡수해 보다 큰 방해 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가 된다면 제아무리 교주를 완벽히 손에 넣은 자신들이라 할지라도 마교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어르신으로부터 마교에서의 일들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상황.

양사창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끄응, 천무진을 죽일 수는 없으니…… 역시 답은 하나인가.’

천무진은 절대 죽여선 안 되는 자였다. 그런 지금 내릴 수 있는 답은 결국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을 이끌고 있는 소교주 악준기.

그의 제거였다.

사실 악준기를 죽이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흐르고 있는 지금 이보다 나은 선택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창가에 기대어 선 양사창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죽는다고 너무 억울해 마시오. 다 자업자득이니까."

그가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채, 손가락으로 창틀을 가볍게 두드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어떻게 죽여 드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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