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믿음 ― 믿어 (1)
백아린이 적화신루 루주로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그 순간.
천무진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처음엔 적화신루의 회의에 동석해 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왜 백아린이 그러한 부탁을 했는지 이제는 알고 있다.
그녀는 보여 주려 한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그렇게 오랫동안 감춰 온 비밀을 벗어던진 백아린이 천무진과 마주하고 있었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별로 안 놀라신 모양이네요."
"……아니, 꽤나 놀란 상태야."
말 그대로 티가 안 났을 뿐이지 천무진은 무척이나 놀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기도 했다. 백아린 정도의 무인이 일개 총관이라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내이십일성 수준의 무인.
거기다 그 뛰어난 기억력과 판단력은 독보적이다.
능력만으로 놓고 본다면 적화신루가 아닌 무림맹의 맹주라 할지라도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천무진은 잠시 침묵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상황이 닥치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다.
복잡한 속내.
하지만 그 어떠한 감정을 표현하기에 앞서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천무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감추고 있었으면서 왜 나에게 이런 진실을 밝히는 거지?"
궁금한 건 그것이었다.
여태까지 꽁꽁 감춰 온 비밀이었다. 그러한 비밀을 이제 와서 스스로 밝히는 연유가 알고 싶었다.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이 답했다.
"사실 처음엔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모른다고 해도 문제될 게 없다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제가 루주라는 사실은 신루에서도 단 세 명만이 알고 있을 정도로 기밀이고요. 외부인인 당신에게 밝혀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어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으니까. 적화신루 루주의 정체는 알려져선 안 될 비밀이었고, 그것을 천무진에게 밝힐 이유는 없었다.
"그건 이해해.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의 변화가 생긴 이유는 뭐지?"
"……무서워졌으니까요."
"무서워지다니? 그게 무슨……."
"상관없을 거라 생각하며 한 이 하나의 거짓말이 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무너트릴까 봐요."
백아린의 그 한마디에 천무진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그때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그녀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그리고 그게…… 당신을 상처 입힐까 봐요."
백아린의 말이 끝났거늘 천무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까보다 더욱 길어진 침묵.
그건 그녀의 대답이 자신이 예상했던 그 어떠한 것과도 달랐기 때문이다.
적화신루의 가장 큰 비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상처 입을까 봐 모든 걸 밝혔다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의 복잡했던 속내는 거짓말처럼 평온해졌다.
분명 백아린은 오랜 시간 정체를 숨긴 채로 옆에 있어 왔다.
평소의 천무진은 누군가에게 속는다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과거의 삶에서 겪었던 경험으로 인해 더욱더 예민한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기했다.
오랫동안 속아 온 상황을 알게 되었으니 불쾌감이 먼저 치밀어 올라야 할 터.
헌데 오히려 반대였다.
아무런 화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같은 비밀을 말해 주는 이유가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이 두려워서라는 그녀의 말에 천무진은 오랜 시간 외부와 쌓아 놓은 커다란 담장이 조금씩 깨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의 벽에 생겨난 균열, 그리고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그녀의 마음까지.
그때 백아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속여서 화 많이 났죠? 미안……."
"사과하지 마.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사과할 일 아니야. 당연한 거야. 처음 만난 나에게 당신의 진짜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건. 처음엔 나도 당신을 믿지 않았잖아.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천무진은 백아린의 모든 걸 이해했다.
머리만이 아닌 마음으로도.
천무진이 그럴 수 있었던 건 이제는 백아린이라는 여인에 대해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의 거짓말에 악의가 없었다는 걸 확신하기에.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자신을 먼저 생각해 주는 마음을 마주했으니.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괜찮다고 다독여 주는 천무진의 모습에 백아린이 놀란 듯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때였다.
주변을 스윽 둘러보던 천무진이 짧게 말했다.
"적화신루의 일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좀 남아 있는 것 같으니 난 이만 물러나지. 이따가 보자고."
백아린이 보여 주고자 한 걸 보았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천무진이 막 몸을 돌려 걸어 나가려 할 때였다.
멍하니 서 있던 백아린이 다급히 다가오며 소리쳤다.
"저기요!"
"왜?"
"하나만 물어도 돼요?"
"뭔데 그래?"
천무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는 백아린에게 시선을 줬을 때였다.
그녀가 물었다.
"아직도 절…… 믿어요?"
예상외의 질문에 멈칫했던 천무진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속여 온 행동으로 인해 자신을 믿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는 모양이었다.
걱정스러워 보이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은 고개를 돌려 똑바로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떠올렸던 천무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믿어."
그 한마디에 다소 굳어 있던 백아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 * *
백아린과의 만남을 끝낸 천무진은 자신의 거처로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부좌를 튼 채로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천무진의 몸 안으로 많은 양의 내공들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한 내공들은 천무진의 몸 안 곳곳을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 천무진이 몸 내부를 살피는 이유는 다름 아닌 얼마 전 죽은 적련화를 통해 얻게 된 의문인 자모충 때문이었다.
적련화에게 조종을 당한 경험을 통해 천무진은 자신의 몸 안에 자모충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내공을 움직이며 몸 안의 이상한 부분을 찾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십수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해 왔던 운기조식이다. 그동안 아무런 것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거늘 이렇게 찾는다 해서 의심스러운 정황을 잡아내기란 실로 요원한 일이었다.
운기조식을 끝낸 천무진은 가볍게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전신의 모든 기운들을 집중해 움직인 탓에 심력의 소모도 상당했다. 하지만 운기조식을 한 덕분에 몸은 한결 가벼웠다.
침상에 누운 그가 천장을 올려다본 채로 상념에 잠겼다.
‘자모충이라.’
지금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정말 자모충이라는 벌레가 자신의 몸 안에 존재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 벌레가 어떠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천무진은 자리에 누운 채로 가만히 스스로의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아직까지도 적련화의 시신을 확인했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당시의 시신은 마치 뭔가가 뜯어먹은 듯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 또한 자모충의 짓이라고 생각했고, 여러 가지 의심들도 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젠장.’
머리만 복잡해지는지 천무진은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그대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십천야에게 제법 많은 타격을 입혀 왔다.
그들 중 일부를 죽이기도 했고, 꽤나 긴 시간 동안 공들여 준비한 계획들을 망치기도 했다.
거기다 몇 가지 비밀들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모든 것이 안개에 휩싸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체 언제면 그들의 모든 걸 알 수 있을까?
과거의 삶에서 자신을 조종했던 적련화가 죽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조종할 수 있는 게 그녀뿐일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그들은 제이의 적련화, 제삼의 적련화를 만들어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정체 모를 상태에 빠지는 이유를 명확히 알아야 했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지금으로선 시간을 두고 해결하는 것밖에 방도가 없었다.
의선과 마의가 움직이고 있는 지금 천무진은 자신이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마교에 뿌리 내리고 있는 십천야의 세력들.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고, 또 마교 소교주와 함께 그것들을 뿌리 뽑아야 했다.
생각을 이어 나가던 천무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멀지 않아 입구에서 단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들어간다?"
말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런 모습에 천무진이 침상에서 일어나며 퉁명스레 말했다.
"대답도 하기 전에 들어올 거면서 물어보는 저의는 뭐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명색이 부하인데 예의는 갖춰야지."
히죽 웃으며 말하는 단엽을 향해 천무진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이내 앉으라며 의자 쪽을 가리켰다.
곧장 의자에 가서 착석한 단엽을 향해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아, 뭐 별건 아니고."
대답을 하던 단엽이 볼을 긁적였다. 그러고는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며칠 자리 좀 비워야 할 것 같은데."
"며칠이나."
"음,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한 보름? 거리상으로 보면 좀 더 걸리려나?"
"또 사고 치려고?"
사고라는 말에 단엽이 움찔했다.
일전에 우내이십일성의 하나인 나환위와 싸움을 벌인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허나 단엽은 곧장 발끈하고 나섰다.
"아니거든!"
"그럼 뭔데?"
"……갑자기 대홍련 쪽에서 연락이 와서 말이야."
"왜? 대홍련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아직까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어. 사실 련주님이 갑자기 만나자고 연락을 취한 거라."
"설마 사고 쳤어?"
"아니 누굴 사고뭉치로 보나."
단엽이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홍련의 부련주로서 단엽은 꽤나 긴 시간 세력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별한 제지를 받지 않았다.
천룡성을 돕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단엽이 뭔가에 구속받지 않는 인물이었던 이유가 컸다.
원래부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고, 부련주라는 직함 자체가 이름뿐인 자리였던지라 딱히 뭔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오히려 단엽이 곳곳에서 날뛰며 위명까지 올리고 있는 상황, 덕분에 대홍련의 위세 또한 저절로 올라가고 있어 제 몫은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와중 갑작스레 날아든 연락.
주기적으로 연락을 취해 왔으니 연락 자체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번엔 련주에게서 직접적으로 연락이 온 상황이었다.
이런 일은 무척이나 드물었기에 단엽으로서도 왜 연락이 왔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사고 친 거 아니냐고 장난스럽게 말하던 천무진이 이내 물었다.
"그래서 련주를 만나고 오려고?"
"응, 먼저 이런 식으로 만나자고 연락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급히 연락을 해 온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으니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보려고."
"한창 바빠야 할 땐데 교묘하게 빠져나가는군."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리는 천무진의 말투에 단엽이 얼굴을 밝히며 좋아했다.
"오호, 그래? 그거참 좋은 소식이군."
"좋아하진 마. 돌아오면 몇 곱절로 굴릴 생각이니까."
"쳇, 하여튼 성격 하고는."
불만스레 중얼거리던 단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직까지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천무진에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보고했으니까 서둘러 다녀올게."
"언제 가려고?"
"사실 며칠 전에 떠났어야 하는데 주인한테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좀 미뤄 놓은 거거든. 급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한천 그놈 얼굴만 보고 바로 가려고."
한천과 함께 적화신루의 배신자들을 처단하기 전에 이미 련주의 뜻을 전달받았던 단엽이다. 허나 그때는 뭔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최대한 약속을 뒤로 미뤄 뒀던 그다.
그렇게 모든 일이 해결되자 지금 서둘러 다녀오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천의 얼굴을 보고 간다는 단엽의 말에 천무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부총관하고 너무 친해진 거 아냐?"
"뭐…… 그 녀석 매력 있잖아? 그럼 나중에 보자고, 주인."
예상외의 솔직한 반응을 끝으로 단엽이 방을 걸어 나갔다. 그렇게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무진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학을 뗄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