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유유상종 ― 박살 내자고 (1)
그 길은 끝이 없는 어두움만 가득했다.
‘여긴 어디일까?’
의문은 들었지만 천무진은 그저 걸을 수밖에 없었다. 길은 하나였고, 그 좁은 길의 양쪽은 새카만 어둠만이 맴돌았다.
숨 쉬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공기는 텁텁했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다리는 마치 천 근은 족히 되는 쇳덩이가 달린 것처럼 무거웠다.
끝을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어둡기만 한 길을 걷는 것 말고는 천무진은 아무런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끝없는 길을 걸으며 천무진은 알 수 있었다.
이 길의 끝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나마 보이던 길들마저 그렇게 점점 어둠에 휩싸이며 사라져 가던 도중.
그 짙은 어둠을 가르며 뭔가가 날아들었다.
커다란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드는 정체불명의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주변에 있던 어둠이 무섭도록 빠르게 밀려 나갔다.
화악!
그 순간 천무진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커다란 대검을 휘두르는 너무도 익숙한 여인, 백아린의 모습이.
백아린의 대검이 어둠을 가르며 그녀가 자신에게 날아드는 순간, 닫혀 있던 천무진의 눈이 열렸다.
번쩍.
놀란 듯 눈을 뜬 천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다소 하얗게 질린 얼굴과, 땀투성이의 몸. 하지만 천무진의 몸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들려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천무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를 백아린이 있었다.
천무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백아린이 걱정스레 손바닥으로 천무진의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열은 좀 내린 거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에 천무진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을 되찾았다.
천무진이 말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얼마 안 됐어요. 한…… 반 시진 정도?"
"뭐야, 얼마 안 된 게 아니네. 왜 그런 괜한 고생을 해. 좀 쉬고 있지."
반 시진이라는 말에 천무진이 놀란 듯 말했고, 그런 그를 향해 백아린이 웃으며 답했다.
"그냥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요."
"……."
천무진이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사이 어느덧 옆으로 의자를 가져온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많이 나아졌어.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눈물을 흘리는 백아린과 마주하고 다시금 깊은 잠에 빠졌던 천무진이다. 그리고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상황.
그의 질문에 백아린이 답했다.
"이틀을 꼬박 자던데요."
"이틀이나 지났다고?"
놀란 듯 되묻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너무 안 일어나서 걱정했다고요."
"……또 걱정을 시켰군."
"어? 뭐라고 하는 거 아닌데."
뭔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당황한 듯 손사래 쳤다.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던 천무진이 이내 물었다.
"어떻게 날 찾았지?"
물어 오는 질문에 백아린이 허공에다 손가락을 가리킨 채로 가볍게 움직였다.
그녀가 허공에 천(天)이라는 글자를 휙휙 그리고는 답했다.
"어떻게 찾긴요. 당신이 힘겹게 남겨 놓은 이 ‘천’이라는 글씨를 보고 알아냈죠."
"……그 말도 안 되는 흔적을 찾은 거야?"
곳곳에 남겨 두긴 했지만 사실 천무진으로서는 가능성이 없는 도박이라 여겼다.
이런 글자만 보고 자신을 찾아낼 수 있는 확률은 너무도 낮다 생각했으니까. 허나 그걸 알면서도 천무진은 사력을 다해 천이라는 글자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놀란 듯 물어 오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말했다.
"그럼요. 그 힘든 와중에 남겨 놓은 이 글씨 덕분에 당신을 찾을 수 있었어요. 정말 잘했어요."
자신의 덕이라 말하는 그녀를 보며 천무진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사력을 다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만 보고 자신의 위험을 감지하고, 또 찾아낼 수 있는 건 세상을 전부 뒤져 본다 한들 이 여인밖에 없으리라.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겨우 그 정도 흔적으로 날 찾아내는 건…… 당신 아니면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일걸."
"왜 이렇게 칭찬이에요. 쑥스럽게."
옆에 앉아 있는 백아린이 어색한 듯 입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천무진이 이내 또 하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여기에 있었던 거야?"
사실 천무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과 백아린은 아예 목적지가 달랐다. 둘 사이의 거리만 해도 무척이나 멀었기에, 제아무리 서둘러 움직였다고 해도 그녀가 이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신의 배는 떠났어야 옳다.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이 답했다.
"아, 그게 사실은 이번에 저희가 각자 움직이게 된 이것들이 모두 함정이었어요."
"함정이라니?"
"귀문곡의 거점을 치러 갔는데 이미 그곳도 저와 부총관을 제거하기 위한 함정이 준비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해결하자마자 뭔가 다른 쪽도 위험할 확률이 있다고 생각해서 둘이서 각자 한 명씩을 돕기 위해 움직였어요."
대충 상황을 설명한 백아린은 천무진이 대략 이해한 것 같자, 그곳 귀문곡의 거점에서 있었던 일 같은 걸 세세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누운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 거짓 정보는 날 노린 건가?"
"지금으로선 그럴 공산이 크긴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배제하진 않고 있어요."
천무진을 노렸다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떨어트려 놓기만 해도 충분했을 상황에서 굳이 귀문곡의 인원들을 자신들이 가는 곳에 배치시켜 두었다거나 하는 몇몇 부분이 다소 마음에 걸렸다.
얘기를 마친 백아린이 슬쩍 천무진의 모습을 살폈다.
백아린 또한 천무진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같은 상황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맞나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그 여자 말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보이거든요."
천무진을 조종하려던 여인 적련화와 직접 겨뤄 본 백아린이다. 그녀의 섭혼술이나, 얕은 실력으로 어찌할 만큼 천무진은 만만치 않았다.
백아린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말해 줄 수 있겠어요? 혹시 좀 말하기 어렵다거나, 괴로우면 나중에 해도……."
"아니, 지금 하지."
며칠 전에 겪었던 일이다. 그만큼 정확하게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천무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는 순간 갑자기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어. 그리고 부탁이 있다며 입을 여는 그 순간…… 여기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더군."
말을 마친 천무진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 부분을 어루만졌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백아린이 놀란 듯 물었다.
"뭐 특별한 것도 없이 갑자기 그랬다고요?"
"응. 신기하게도 마치 내 몸이 기다렸다는 듯 그 여자에게 반응하더군."
"의심스러웠던 거 없어요?"
"그저 향기가 조금 났던 것 정도?"
"향기라면 아마도 우리가 손에 넣은 그 흑주염일 확률이 높아요. 당신을 다시 조종하려고 그 여자가 바닷물에 가루를 푸는 걸 봤거든요. 색깔이 흑주염의 것과 똑같은 빛을 띠고 있었어요."
일부러 함정을 파고 적련화가 뭔가 수상쩍은 수를 쓰도록 기다렸던 백아린이다.
덕분에 얻게 된 단서, 그랬기에 지금 의선이 연구하고 있는 흑주염 또한 천무진을 조종하는 것에 있어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애초부터 흑주염이 관련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지만 그랬기에 또 의문이 남았다. 천무진은 이미 직접 흑주염을 접한 적이 있고, 그때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흑주염을 제외하고 다른 이유 또한 있다는 소리인데…….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은 백아린이 어렵다는 듯 가볍게 볼을 긁적였다. 천무진에게서 들은 것만으로는 추가적인 뭔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라면…… 당장 뭔가 더 알아내기는 어렵겠네요."
아쉽다는 듯한 백아린의 말투.
그 순간 천무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의심스러운 게 하나 있긴 해."
"그게 뭐죠?"
천무진의 의미심장한 말에 백아린이 눈을 빛내고 물어 올 때였다.
그가 말했다.
"기억해? 우리가 흑마신을 죽이러 갔던 그 섬 말이야."
"당연히 기억하죠. 사해도에서 아이들을 구해서 나왔었잖아요. 그리고 그곳에서 적면신의를 찾아서 잡아 왔고요. 그런데 갑자기 사해도는 왜요?"
"그럼 그것도 기억해? 적면신의가 아이에게 먹이려고 하던 그 벌레."
"벌레라면…… 자모충(子母蟲)이요?"
남만 일부 지역에서만 존재하는 특이한 벌레.
그리고 인간 몸에서 기생하는 그 벌레를 기억해 낸 백아린이 되물을 때였다.
천무진이 말했다.
"확실치 않지만 내 예감이 맞는다면……."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내 몸 안에 그 벌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 * *
백아린이 천무진을 구해 내고 병간호를 하는 사이.
단엽을 위해 움직였던 한천 또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단엽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고, 그 덕분에 한천은 백아린이 시킨 다른 임무에 더욱 열중할 수 있었다.
그 임무란 바로 이번에 날아든 가짜 정보에 관련된 것이었다.
어디서 이 가짜 정보들이 날아왔는지, 또 정확하게 누가 보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보를 전달받아 안의 내용을 확인한 한천의 눈초리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그와 동행 중인 단엽이 표정 변화를 보이는 한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뭐 알아낸 거야?"
"뭐 아직 조금 더 알아보긴 해야겠지만…… 의심스러운 꼬리는 잡아낸 것 같아."
자신들에게 오는 정보를 꼬고, 비틀어서 전달하게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들은 한 곳을 통해 전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보를 준비한 상대가 이런 걸 모르지는 않았을 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작전을 짠 이유는 너무도 단순하다.
백아린과 한천이 죽을 거라 장담했으니까.
둘의 진짜 정체도, 실력도 모르는 자들이다 보니 귀문곡의 인물들이면 충분히 정리가 될 거라 판단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어찌 적화신루의 총관과 부총관 단둘이 백여 명이 넘게 준비된 귀문곡의 무인들을 상대로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겠는가.
애초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거짓 정보를 흘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잔머리를 써서 조금 섞어 두기도 하고, 또 의심스러운 다른 경로들을 만들어 둔 것도 사실이지만…….
상대는 바로 한천이었다.
그의 눈에는 그런 잔속임수들 정도는 너무도 쉽게 걸러졌다.
한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총관 황균이라.’
이번 일의 배후에는 분명 그가 관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자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한 주모자일지에 대해서는 굳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황균은 이런 일을 스스로 판단해서 벌일 작자는 아니지. 그렇다면 누가 옆에서 바람을 넣은 것이 분명한데 말이야.’
그리고 바람을 넣은 상대방에게는 불운하게도 그게 누구인지 한천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육총관 어교인인가?’
어교연이 이곳 광동성으로 왔다는 사실은 최고 상층부에 자리한 세 명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셋 중 하나가…… 바로 한천이었다.
적화신루의 진짜 루주인 백아린의 오른팔인 한천.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광동성에 어교연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담당 구역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냥 모른 척했던 것뿐이다.
백아린 또한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그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적화신루를 위해서 그런 자잘한 시비 정도는 그냥 눈감아 주고 있었으니까.
광동성에 온 어교연이 황균을 만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바.
그들 사이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을지 얼추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겠지?’
만약의 경우 일이 틀어졌을 상황에서 빠져나갈 최후의 수법이 무엇인지 한천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천은 그들에게 그런 수를 쓸 기회 따위는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한천이 옆에 멀뚱거리며 서 있는 단엽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정면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홍련의 무인들이 깜짝 놀랐지만 정작 당사자인 단엽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단엽이 물었다.
"이제 어쩌려고?"
물어 오는 질문에 한천이 픽 웃으며 답했다.
"가자고. 좀 서둘러야 될지도 모르겠네."
"급한 일이야?"
물어 오는 단엽을 향해 한천이 답했다.
"잡아야 할 놈들이 있는데 말이야. 그놈들이 꼬리를 자르려고 하기 전에…… 몸통을 박살 낼 생각이라서."
한천의 말에 단엽이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거 뭔가 재밌어 보이는데?"
"그치? 박살 내 버리자고!"
상대방을 박살 내자며 신나게 웃고 있는 단엽과 한천의 모습에 대홍련 무인들은 절로 이런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