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생존 ― 죽지 말아요 (2)
백아린의 명령으로 인해 적화신루의 사람들은 오천을 비롯해 인근 마을에 있는 어느 정도 이름난 의원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그렇게 모여든 의원들이 천무진의 상태를 살피는 사이, 백아린은 수하들을 그곳에 둔 채 다른 장소로 움직였다.
바로 거처의 한 곳에 갇혀 있는 적련화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급히 의원들을 불러오긴 했지만 사실 해답이 그쪽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다. 눈을 뜨고 있지만, 자신의 의지를 보일 수 없는 상태, 지금 그런 천무진에 대해 가장 확실한 답을 줄 수 있는 건 바로 적련화였으니까.
그래서 백아린이 향한 곳은 거처 구석에 위치한 창고였다.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적화신루 쪽 사람이 다가오는 백아린을 발견하고는 급히 예를 갖췄다.
그녀가 됐다는 듯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고는 이내 닫혀 있는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고 내부에는 자잘한 짐 몇 개 정도만 자리했을 뿐, 별다른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창고 한쪽엔 점혈을 당한 채 쓰러져 있는 적련화가 있었고, 그런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네 명의 적화신루 쪽 무인들이 자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백아린의 등장에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총관님 오셨습니까?"
"잠깐 둘이 할 말이 좀 있어서 그런데 모두 나가서 기다려요."
"예, 알겠습니다."
백아린의 명령에 네 명의 무인들이 곧장 창고에서 걸어 나갔다. 그렇게 열렸던 창고의 문이 다시 닫혔을 때였다.
백아린이 옆에 뒹굴고 있던 의자 두 개를 마주 보듯 세웠다. 그러고는 이내 빈자리 하나에 적련화를 앉히고는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타타탁!
몇 개의 혈도를 두드리는 순간 꼼짝도 못 하고 있던 적련화가 깊은숨을 토해 냈다.
"커헉!"
폐부에서부터 밀려오는 고통을 느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현재 백아린이 아혈만 풀어 준 탓에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입뿐이었으니까.
백아린의 입이 열렸다.
"이봐, 십천야."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적련화가 맞은편에 위치한 백아린을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백아린은 선 채로 적련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아린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쪽도 십천야 맞지? 실력은 다른 십천야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형편없긴 하던데."
말을 마친 백아린은 자신이 마주했던 그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자신에게 패한 주란, 실력이 무척이나 뛰어나 보였던 반조라는 사내. 그리고 얼마 전에 죽인 왕도지와 천무진의 손에 최후를 맞이한 귀문곡의 곡주이자 십천야의 일원이었던 상무기.
거기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적련화까지.
백아린이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알게 된 십천야는 다섯인가?"
화산파의 자운이 십천야의 일원이라는 걸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백아린은 자신이 만나 본 그들을 다섯이라 판단했다.
중얼거리던 그녀가 이내 눈앞에 있는 적련화에게 말했다.
"긴말 안 할게. 어차피 그쪽하고 굳이 길게 대화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야."
백아린이 천천히 다가와 양손으로 적련화가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그렇게 시선을 맞춘 채로 얼굴을 들이민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 사람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 넌 알지?"
물어 오는 질문에 아직까지 붉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적련화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걸렸다. 면사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이었기에 백아린은 단번에 그런 상대의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백아린이 슬쩍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적련화가 답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곧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적련화의 대답에 백아린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내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의외네. 이렇게 순순하게 대답할 줄은 몰랐거든. 한다고 해도 뭔가 속이려고 할 줄 알았는데……."
"킥! 그럴 필요가 없거든."
"……그럴 필요가 없다? 무슨 의미지?"
"말한 대로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회복세가 눈에 보일 텐데 굳이 거짓말을 한다고 먹힐 것 같지도 않아서 말이야. 애초에 천무진은 죽어서도 안 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쩌면 차라리 나에게 조종당하며 사는 것이 그에게는 더 나았을지도 모르니까."
내뱉어지는 적련화의 말에 백아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천무진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그렇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조종당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백아린이 물었다.
"그건 무슨 헛소리야?"
"아쉽지만 그건 너한테 얘기해 줄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천무진의 상태가 곧 돌아올 거라는 건 아무렇지 않게 말했던 적련화지만, 이번에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백아린 또한 그런 말 하나하나에 전부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백아린은 방금의 얘기를 추궁하는 대신 오랫동안 품어 왔던 의문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십천야, 너희의 정체는 대체 뭐지?"
"글쎄."
십천야를 뭐라고 정의해야 좋을까?
웃고 있던 적련화의 입이 움직였다.
"우리는 말이야, 아주 특별한 존재들이야. 선택받은 이들이지. 그렇기에 우리는…… 위에 올라서야만 해."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만큼 스스로 내뱉는 말에 커다란 확신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 적련화를 보며 백아린이 고개를 작게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병이 심각하네."
"지금 뭐라고……."
"그렇게 특별하고 선택받았다는 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가지고 그런 짓을 벌여? 헛소리 좀 작작해."
어린아이들을 가지고 인체 실험을 벌여 대던 일들을 떠올리며 백아린이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이내 그녀의 시선이 적련화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붉은 면사로 향했다.
아직까지 면사로 가리고 있는 탓에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볼까?"
말을 끝낸 백아린의 손이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여태까지 계속 침착하게 대꾸하던 적련화가 발작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손 치워! 죽여 버리기 전에!"
죽이겠다며 바락바락 악을 써 대는 적련화.
허나 그런 그녀의 협박은 백아린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랑곳하지 않으며 손을 뻗은 백아린의 손이 붉은 면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이내.
타악!
소리와 함께 붉은 면사가 단번에 벗겨졌고, 그렇게 드러난 적련화의 얼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백아린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붉은 면사 뒤에 감춰진 적련화의 얼굴은……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으니까.
그 안에는 너무도 흉측해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얼굴은 마치 노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눈 주변의 피부는 새카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볼에는 마치 전염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울긋불긋한 종기가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의 부분은 마치 시체라도 된 것처럼 핏기조차 보이지 않는 너무도 특이한 외모였다.
멀쩡한 부분은 면사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입과, 턱 부분뿐이었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만 보자면 팔십은 훌쩍 넘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지만 실제 그녀는 서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얼굴을 제외한 부분에서 그녀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백아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건 그저 단순히 추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치 독에 당해 흉측하게 변해 버린 얼굴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백아린이 놀란 듯 눈을 치켜뜬 채로 물었다.
"……몸에다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으으으으으!"
백아린의 질문에도 적련화는 이를 뿌드득 갈면서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 보낼 뿐,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적련화는 거의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치솟은 상태였다.
백아린이 그런 그녀를 향해 뭔가를 더 물으려는 바로 그때였다. 창고 바깥에서 수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관님! 천룡성의 분에게 뭔가 일이 생겼답니다! 서둘러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백아린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궁금한 것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천무진이 먼저였다.
서둘러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백아린이 막 몸을 돌리는 그때였다.
얼굴 가득 분노를 쏟아 내고 있던 적련화가 입을 열었다.
"헛수고가 될 거야."
"……?"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말에 백아린이 잠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백아린을 향해 비웃음을 날린 적련화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넌…… 그를 구할 수 없을 테니까. 아니, 세상 그 누구도 그를 구할 순 없어. 그게 그의 운명이니까."
말을 내뱉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
그런 그녀를 향해 백아린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운명 같은 소리 하네."
창고에서 소리를 내질러 대던 적련화의 아혈을 다시금 점혈한 백아린은 곧바로 천무진이 누워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인근에서 데리고 온 다섯 명의 의원들 모두가 방 바깥에서 대기한 채로 서성이고 있었다.
서둘러 다가간 백아린이 물었다.
"무슨 일이죠? 뭔가 일이 생겼다고 들었는데요."
"그것이……."
의원 중 한 명이 중얼거릴 때였다.
옆에 자리하고 있던 적화신루 쪽 무인이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천룡성 무인 분이 일어나셨습니다."
"그래요?"
백아린이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적련화에게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회복이 될 거라는 말은 듣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욱 빨랐기 때문이다.
백아린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의원들에게 물었다.
"왜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 알아내신 것들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다섯 명의 의원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닫았다. 허나 백아린을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알아내기 어려울 거라는 걸 예상했었으니까.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수고들 하셨어요.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돌려보내도록 해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고자 한 명의 의원을 이곳에 대기시켜 두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백아린은 곧장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방 내부.
그런데 내부는 조용했다. 천무진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이미 어둑해진 주변 때문인지 방 내부도 다소 캄캄했다.
백아린이 천천히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는 천무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무진이 자리한 침상 바로 옆에 선 백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 들려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잠에라도 빠진 것처럼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런 그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때.
갑자기 굳게 닫혀 있던 천무진의 입이 슬그머니 열렸다.
"……들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백아린은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방금 전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에 당황한 백아린이 소매로 눈가를 닦아 낼 때였다.
힘겹게 눈을 뜬 천무진은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아 내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뭐야. 설마 울고 있는 거야?"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요."
"누가 봐도 지금 울고 있는데."
"……당신이 다시 말을 하는 게 무척이나 반가웠나 보죠."
말을 하며 백아린은 괜스레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이내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천무진에게 말했다.
"이렇게 걱정시킬 거예요?"
"……미안."
천무진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사실 백아린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지만 모든 걸 봤으니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천무진은 알고 있었다.
그대로 그 배를 타고 떠났다면 다시는 자신의 의지로 이렇게 입을 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든 것이 끝났다고 포기하는 순간, 천무진에게 내리쬔 한 줄기의 빛.
백아린, 바로 그녀.
어찌 이 많은 감정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
지옥과도 같았던 그 과거의 삶이 반복되려는 순간 자신을 구해 준 백아린에게 천무진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을 느꼈다.
지금 이 몸 상태로 긴 대화가 무리라는 건 너무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야만 할 말이 있었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백아린."
"……?"
왜 그러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린.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야."
그 한마디에는 참으로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말을 하기도 힘든 몸으로 어떻게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천무진의 심정이 어떤지 알기에…….
백아린이 천무진을 향해 고개를 내려 얼굴을 가까이한 채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축하해요. 돌아온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