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운명의 굴레 ― 부탁이 있어요 (2)
거처는 조용했다.
오천의 마을에 있는 객잔 하나를 통째로 빌린 탓에 한창 시끄러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만큼은 무척이나 고요할 수밖에 없었다.
십천야를 따르는 수하들만이 뭔가를 바삐 움직이고 있는 곳.
그 객잔의 가장 좋은 방에는 한 명의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꼰 채로 커다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붉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인.
적련화였다.
그녀는 의자의 팔걸이 부분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투웅, 퉁.
장난치듯 팔걸이 부분을 어루만지던 적련화의 시선이 이내 천천히 옆으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 그 자리에는 천무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자리에 앉은 채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겉보기엔 전혀 이상해 보일 것 없는 모습.
하지만 적련화는 알고 있었다.
지금 옆에 자리하고 있는 천무진은 이미 인형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걸.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어 천무진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쿡.
손가락이 볼을 찔렀고, 손톱이 조금씩 피부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천무진의 얼굴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적련화의 면사 아래에 드러난 입술이 비틀렸다.
그녀가 천천히 볼을 찌르고 있던 손톱을 뗐다.
그러고는 이내 상처가 난 부분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고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돌아다녔다면서요? 어린 고아들도 구하고, 십천야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며 바삐 움직였다고 하더라고요."
볼을 어루만지던 적련화가 갑자기 천무진의 턱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턱을 위로 끌어올려 시선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하지만 그거 알아요? 그런 건 당신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말을 마친 적련화는 턱을 쥐고 있던 손을 휙 하고 놓았다.
이런 행동들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천무진을 향해 그녀가 이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하나 있어요."
부탁이 있다는 말에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천무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적련화를 바라봤다. 그 상태에서 적련화가 말을 이었다.
"그냥 당신은 이 상태 이대로."
그녀는 천무진의 피가 묻은 손톱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적련화의 붉은 입술과 천무진의 피가 뒤엉키는 순간, 다시금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영원한 나의 인형이 되어 줘요."
말과 함께 적련화가 미소 지었다.
* * *
이곳 오천에는 무려 서른 명에 달하는 십천야 휘하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적련화를 따라 이곳 오천까지 온 이들이었고, 그들의 임무는 그녀를 보필하고 천무진을 목적지까지 옮기는 걸 돕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선택은 다름 아닌 수로였다.
오천은 바다와 맞닿아 있는 곳, 거기다가 바닷길은 움직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천무진의 일행이 뒤늦게 그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한들 배를 타고 떠난 이상 뒤를 캘 수 없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이곳 오천에서 움직일 배 또한 어딘가에서 빌리는 것이 아닌 십천야 쪽에서 준비한 선박이었다.
당연히 증거가 될 만한 뭔가가 남을 리 만무했다.
오천의 항구에는 이른 시각부터 십천야 측의 배가 정박 중이었다.
서른 명에 달하는 십천야 쪽 무인들이 모두 타야 했고, 꽤나 먼 거리를 가야 하니 그만큼 많은 양의 식재료가 필요했다.
그만한 물건들과 사람들을 모두 나를 정도의 크기를 지닌 선박.
당연히 그 크기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항구에 정박한 십천야 측의 배 위로 연신 사람들이 오고 갔다.
십천야를 따르는 이들이 이동하는 동안 먹을 식재료를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뱃머리에 서 있는 적련화는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
그녀의 붉은 면사가 더더욱 짙게 빛났다.
계속 아래로 향해 있던 적련화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천무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또한 적련화의 옆에 선 채로 가만히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길게 펼쳐진 바다와, 항구가 한눈에 들어오는 방향이었다.
공허해 보이는 그 눈빛을 옆에서 응시하고 있던 적련화가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죠?"
말과 함께 성큼 다가가 천무진과 거리를 조금 더 좁힌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요? 이곳을 떠나는 순간부터 당신은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거라는 걸."
자신에게 영혼을 완벽히 제압당한 천무진은 그대로 십천야의 손에서 움직이게 될 게다.
한마디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적련화가 말했다.
"알고 있어요. 아직까지 당신의 온전한 정신이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는 사실 정도는."
옆에 바짝 자리한 채로 그녀가 손을 뻗어 뭔가를 흘려보냈다. 새하얀 가루가 바람을 타고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그렇게 가루를 흘려보낸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버티지 못할 거예요. 배에 갇혀 있는 며칠 사이에 당신의 정신은 더욱 약해질 테니까요. 그렇게 조금씩 어둠에 먹힐 거고, 결국 진짜 당신은 이렇게 사라지게 될 테죠."
말을 끝낸 적련화가 천무진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마치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러니 마음껏 봐 둬요.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풍경이…… 당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추억이 될 테니까."
적련화의 말이 끝날 무렵 천무진의 손가락 한 마디가 꿈틀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자그마한 움직임이 지금 천무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지였고, 또한 전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뱃머리에 선 채로 밀려드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바삐 움직이던 수하들 중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대장."
적련화를 향해 말을 건 사내가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머뭇거릴 이유가 있나요? 준비가 끝났다면 당장 출발하죠."
"네, 그럼 곧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끝낸 그는 곧바로 바깥에 있던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이내 마지막 뒷정리를 하던 이들까지 모두 배에 탑승했다.
그렇게 출항할 모두가 배에 올라타 자리하자 이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사내가 슬쩍 적련화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가요."
그 말이 떨어지자 사내는 재빨리 안쪽에 있는 이들에게 움직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쿠웅.
선착장에 자리하고 있던 배가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펼쳐진 돛을 향해 세찬 바닷바람이 밀려들었다.
우우웅.
파도를 가르며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내 숙련된 뱃사람의 익숙한 손놀림으로 인해 목적지를 향해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배는 조금씩 육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은…… 천무진의 남은 시간이 점점 끝나 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걸 알아서일까?
뱃머리에 선 천무진의 눈동자는 여전히 점점 멀어지는 항구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점점 흐릿하게 변해 가는 그 눈동자를 옆에서 바라보는 적련화의 입꼬리는 점점 기분 좋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배가 점점 항구를 벗어나 움직이고 있는 그때였다.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목소리를 높이던 우두머리 사내가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며 돌려 대던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방금 떠난 항구가 있는 방향이었다.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저건."
수하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적련화가 그를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헌데 그는 상관인 적련화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다른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적련화가 물었다.
"뭐죠?"
그녀의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린 수하가 급히 답했다.
"저…… 지금 저기 부두 길을 따라 누군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적련화의 시선 또한 수하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항구와 이어져 있는 기다란 부두 길.
그 길 위를 누군가가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타타타타탁!
긴 머리카락과 새하얀 백의가 사방으로 나부낀다.
마치 한 마리의 날쌘 호랑이를 연상케 할 만큼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부두의 길을 내달리는 한 명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부두 길을 달려 점점 자신들의 배를 향해 거리를 좁혀 오는 상대를 확인한 적련화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저 여자는?"
"설마 여기까지 날아오르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수하의 말에 적련화가 비웃음을 흘렸다.
이미 배가 움직인 지 꽤나 시간이 지났고, 덕분에 선착장과의 거리 또한 멀어진 상태였다. 이 정도 거리를 단번에 뛰어넘는다는 게 말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적련화가 말했다.
"이 거리를 날아오르는 게 말이나 된다고……."
허나 적련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부두의 끝까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그 여인이 곧바로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것이다.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오른 여인.
그런데…….
"어, 어어?"
수하가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는 절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그런데 날아오른 여인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배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 말은 곧 정체불명의 여인이 바로 이곳 배의 위까지 날아올랐다는 뜻이었다.
놀란 그가 뭔가 대비를 하려던 찰나.
하늘 위로 날아오른 여인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순간 그 여인의 손에 들린 집채만 한 크기의 대검이 벼락처럼 배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날아드는 새하얀 강기!
그걸 본 순간 배 위에 자리한 이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보통 공격이 아니었으니까.
날아든 강기는 정확하게 배의 중앙 부분을 꿰뚫었다.
콰콰콰콰쾅!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을 태우고 있던 커다란 배가 순식간에 반으로 쪼개졌다.
동시에 바다가 출렁였고, 배는 곧 균형을 잃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잇!"
흔들리며 급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한 배의 위에서 적련화가 다급히 균형을 잡았다. 그녀가 비틀거리다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였다.
타악.
기우뚱 기운 채 바다로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 배의 난간 한쪽에,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여인이 착지한 채로 적련화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 손을 겨루어 보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련화는 알 수 있었다.
붉은 면사로 가려진 얼굴이 긴장한 듯 굳어졌다.
‘……누구지?’
단번에 이 먼 거리를 뛰어넘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과, 배를 반으로 갈라 버린 그 파괴적인 일격까지.
자신보다 커다래 보이는 대검을 한 손으로 쥔 채 서 있는 모습마저 범상치 않았다.
‘나 혼자서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갑자기 벌어진 이 난처한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는 찰나 퍼뜩 뭔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적련화의 시선이 급히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배가 가라앉는 와중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서 있는 천무진이 있었다.
그를 확인하는 순간 불안했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래! 나에겐 천무진이 있지!’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천무진만 있다면 누구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을 테니까.
천무진을 조종하기 위해 그를 향해 손을 뻗은 적련화가 뭔가를 하려던 찰나였다.
부웅!
대검에서 날아든 기운이 천무진을 향하던 손길을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놀란 듯 적련화가 주춤거리는 사이.
커다란 대검의 주인, 백아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개수작 부리지 마. 손가락 다 날려 버리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