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운명의 굴레 ― 부탁이 있어요 (1)
천무진의 목적지인 오천(吳川)은 바다와 맞닿아 있는 마을이었다. 단엽이 간 산미와 마찬가지로 수로가 발달되어 있었기에 상인들과 여행객들로 붐비는 마을이기도 했다.
오천에 도착한 천무진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역시나 적화신루의 거점이었다.
백아린을 통해 미리 오천 지역의 적화신루 거점에 연락을 해 둔 덕분에 만남은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오천에 자리하고 있는 적화신루의 비밀 거점은 오래된 고서점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그 고서점을 지키고 있는 적화신루의 인물은 젊은 사내였다.
점심시간이 한참은 지났을 무렵.
사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와중에 고서점의 문이 열렸다.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에 사내는 슬쩍 눈을 치켜뜨며 들어온 상대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젊은 사내의 등장에 그는 목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하암, 뭐 찾으시는 거라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무진은 백아린에게서 미리 받아 온 서찰을 그에게 내밀었다.
갑자기 자신에게 서찰을 들이밀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던 그는 이내 그것을 펼쳐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을 읽어 내린 순간 사내의 표정이 돌변했다.
나른했던 표정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곧장 책상 아래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책장의 한 곳이 자그마한 소리와 함께 비틀리며 비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말을 끝낸 그는 그 비밀 공간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서류를 들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그걸 천무진에게 내밀며 짧게 말했다.
"며칠 동안 근방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한 서류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전해 들은 인상착의의 인물을 찾아보긴 했지만…… 크게 의심스러운 자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조금 비슷해 보이는 자들이 있어, 그들의 뒤를 캐 놓은 것들도 같이 넣어 두었으니 직접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젊은 사내의 말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품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이내 짧게 말했다.
"참고하지. 고생했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말과 함께 사내는 천무진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천룡성의 무인인 천무진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끝낸 직후 천무진은 고서점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이내 걸음을 옮겨 인적이 드문 장소로 움직였다.
마을 외곽에 위치한 커다란 나무의 그늘 아래에 자리한 천무진은 비밀 거점에서 받아 온 서찰을 꺼내어 들었다.
말대로 서찰에는 최근 이 인근에서 있었던 수상쩍은 일이나, 반조와 조금이라도 비슷해 보이는 자에 대한 뒷조사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적화신루 또한 추가적으로 조사를 이어 가겠지만 결정적으로 이 모든 걸 확인하는 건 천무진의 몫이었다. 정말 반조라면 그를 밀착해서까지 캐는 건 보통의 정보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거기다가 정확하게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 또한 천무진이었다.
천무진은 서찰의 내용을 모두 살피고는 이내 그걸 품 안에 넣었다.
슬쩍 올려다본 하늘이 무척이나 맑았다.
하늘을 올려다본 채로 천무진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슬슬 시작해 볼까?"
혹시 반조가 이곳에 있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반조, 그에겐 물을 것이 많았으니까.
천무진이 오천의 번화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무진은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적화신루를 통해 얻어 낸 정보는 꽤나 많았다. 그랬기에 그것들을 확인하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비슷해 보여 조사를 해 둔 이에 관한 정보를 확인하는 건 제법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멀찍이 숨어 의심스러워 보인다는 자를 확인한 천무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자가 아니야.’
반조와 복색이나 분위기는 비슷했지만, 얼굴이 달랐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상대를 확인한 천무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곳 오천을 무려 삼 일 동안 쥐 잡듯 뒤졌다.
적화신루가 보내온 정보의 삼분지 이 이상을 확인했고, 추가적으로 의심스러운 부분들도 조사하고 있었다.
허나 아쉽게도 그 어떠한 단서도 모습을 드러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무진은 중천을 넘어서서 조금씩 서쪽으로 사라지고 있는 태양을 확인했다.
저녁을 먹기엔 다소 이른 시각.
그렇지만 아침부터 한 끼도 먹지 않고 움직인 탓에 제법 허기가 졌다.
자리에 선 채로 주변을 둘러보던 천무진의 눈에 객잔 하나가 보였다.
저녁까지 한참을 움직일 생각이었기에 천무진은 우선 간단하게라도 주린 배를 채우기로 마음먹고 객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객잔 내부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십여 개의 탁자 중 달랑 두 개만이 차 있을 정도였다.
객잔 안으로 들어선 천무진은 곧장 한쪽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천무진이 착석하기 무섭게 객잔의 점소이로 보이는 소년 하나가 달려왔다.
소년이 물었다.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소년의 질문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소면 한 그릇 부탁하지."
"예, 준비되는 대로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말을 끝낸 점소이 소년이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렇게 혼자만 남게 된 천무진은 가만히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삼 일이나 이곳을 뒤졌지만, 딱히 어떠한 단서를 찾지 못한 지금.
아쉽긴 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마교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서찰에 남아 있는 것만 확인하고 이후의 일은 적화신루를 통해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막 생각을 이어 나가는 그때였다.
쏴아아아아.
객잔의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왔다.
아주 시원한 바람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천무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뒤흔들어 놓는 그 순간.
자리에 앉아 있던 천무진이 움찔했다.
그 바람을 타고 풍겨져 오는 향기.
왠지 모를 낯익은 그 향기가 코로 밀려 들어오는 순간 천무진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
이 냄새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열려 있는 객잔의 문을 통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촤르르륵.
입구를 막고 있는 구슬로 된 가림막을 손으로 걷으며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가 천무진의 눈에 틀어와 박혔다.
상대는 여인이었다.
챙이 있는 모자와, 그곳에 달려 있는 붉은 면사로 인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천무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런 것도 없었다.
그 여인이 뭔가를 한 것도, 또 살기 같은 미묘한 감각을 읽어 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무진은 알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다.
지금 들어선 저 여자가…… 자신을 그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여인이다.
원래대로라면 저 여인을 만나게 되는 건 지금부터 몇 년 후의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치 전생의 그 날처럼.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천무진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도망쳐야 했다.
아니, 당장이라도 천인혼을 휘둘러 죽여야 했다.
저번 생에처럼 자신에게 뭔가를 하기 전에 말이다.
그런데…… 왜일까?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입은 마치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돌처럼 굳은 그대로 객잔 안에 들어선 여인을 바라만 보는 것만이 지금 천무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붉은 면사를 쓴 여인이 걸어온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가 다가올수록 천무진의 호흡을 가빠졌다.
눈은 커졌고,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대체 왜…….’
천무진은 지금 자신의 몸 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지옥을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이대로 있다가는 똑같이 그 지옥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걸 아는데 대체 왜!
‘제발 움직여! 제발!’
천무진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잃어 가는 감각을 깨우려 했다.
허나 그런 천무진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쇠사슬에 꽁꽁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와 마주하는 순간부터 천무진은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천무진이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그때.
다가온 그녀가 천무진의 맞은편에 와 앉았다.
그토록 찾았던 여인이다.
어떻게든 찾아내서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겠다고 장담했었다. 그런 상대가 눈앞에 있거늘,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거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면사 하나 치우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천무진의 얼굴은 핏기 하나 느껴지지 않을 만큼 파리했다. 그의 눈동자가 정면에 자리한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천무진은 억지로 입에 힘을 주었다.
꽉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아주 힘겹게 조금씩 열렸다.
"너, 너는……."
허나 그것이 한계였다.
아무리 더 말을 내뱉으려 해도 더는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붉은 면사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새빨간 입술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온 그녀의 한마디.
"……부탁이 있어요."
울컥!
그 한마디가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천무진은 비릿한 피 맛을 느꼈다.
속이 뒤틀렸고, 머리가 멍했다. 하늘과 땅이 마구 빙빙 돌았고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처럼 머리는 어지러워졌다.
천무진은 버티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가슴을 움켜쥔 채로 숨을 헐떡였다.
가슴 부분에서부터 전신으로 어마어마한 고통이 퍼져 나갔다.
천무진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끄윽! 컥, 컥컥!"
이제는 붉어진 얼굴로 천무진은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천무진이 숙였던 고개를 힘겹게 치켜들었다.
의자에 앉은 그녀가 천무진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그러고는 긴 손가락으로 천무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러던 그녀는 이내 손가락을 떼고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아예 천무진을 향해 다가가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고통스럽죠? 하지만 걱정 말아요. 그 고통, 곧 끝나게 해 줄 테니까요."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상도, 천무진의 정신도.
동시에 들려왔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동안 달려왔던 그 모든 시간이, 피나는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소리가.
그제야 천무진은 알 수 있었다.
결국…… 아무런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순간 다시금 그녀의 잔인한 입술이 옴짝달싹하기 시작했다. 귓가에 바짝 가져다 댄 그녀의 입술이 작게 속삭였다.
"부탁이 있어요."
그 한마디에 천무진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