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불안감 ― 대가는 치러야지 (1)
귀문곡의 무인들을 이끌고 백아린과 한천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단태허라는 자였다. 그는 귀문곡의 인물이면서, 귀살에 속한 살수이기도 했다.
또한 귀살 살수들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로 꽤나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단태허가 이곳에 나타난 건 비밀리에 흘러 들어온 정보 때문이었다. 그 정보란 오늘 이곳으로 적화신루의 주요 총관 하나가 나타날 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자가 이곳에서 수하들을 불러 모아 이 인근에 있는 귀문곡의 거점을 칠 거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걸 들은 직후 단태허는 빠르게 자신이 모을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집결시켰다. 위기가 찾아오는 지금이 자신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귀문곡의 곡주 자리.
그 자리를 놓고 현재 몇몇 이들이 은연중에 욕심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에야 외부 세력을 막아 내는 것이 급해 직접적인 싸움이나 견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안정된다면 그때부터는 비어 있는 우두머리의 자리를 놓고 서로 야심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귀살은 귀문곡 휘하에 있는 살수 단체다.
당연히 그들은 귀살의 인물이 수장 자리에 앉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성과를 내는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누구보다 두드러지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자신의 능력을 모두에게 보여 줘야 한다.
그래야만 귀살 소속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일 수밖에 없는 자신이 곡주 자리를 놓고 다툴 수 있을 테니까.
그랬기에 자신이 직접 이번 일을 처리하겠다고 나섰고, 지금 이처럼 두 명의 앞에 마주할 수 있었다.
적을 확인한 직후 단태허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보대로 상대는 고작 둘뿐이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기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색까지.
별반 대단해 보이지 않는 두 명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이번 적화신루의 기습을 무위로 돌릴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니던가.
그렇게 기쁨에 들끓던 가슴, 허나 그런 감정이 식어 버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껑충 날아오른 두 사람, 그 둘이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 얼굴 가득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콰앙! 쾅!
백아린과 한천이 착지하는 곳 인근에 있던 귀문곡의 무인들이 마치 폭풍에 휘말린 나뭇잎처럼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떨어진 곳을 기점으로 하여 마치 엄청난 양의 폭약이 터진 것만 같은 커다란 구멍들이 생겨났다.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바닥에 착지한 백아린이 커다란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붕붕 돌리다가 순식간에 한쪽에 위치한 무인들을 향해 내리쳤다.
쾅쾅쾅!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나간 검기가 순식간에 진형을 박살 내 버렸다.
그 기괴할 정도의 파괴력에 모두가 넋이 나간 듯 허둥거리는 찰나였다.
스스스슥.
귀신처럼 파고든 한천의 검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동시에 귀문곡 무인들은 몸에서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단태허가 당황한 듯 움찔했다.
‘……뭐야 이건?’
분명 자신들이 죽이려 하는 상대는 적화신루의 총관과 그 아래에 있는 부총관, 이렇게 단둘뿐이었다. 적화신루 총관급의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단태허가 아니다.
적화신루의 총관들 중에 가장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 평가받는 이는 일총관 진자양이다. 그는 정보 단체의 인물답지 않게 무공이 제법 뛰어났는데, 그 실력이 거의 백대고수급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었다.
허나 적화신루를 대표하는 최고 고수인 그를 제거하는 데도 이곳에 대동한 십여 명 정도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이곳에 대동한 이들은 인근에서 모을 수 있는 귀문곡 내의 최고 실력자들을 뽑아서 불러온 것이니까. 거기다가 그 숫자가 무려 백 명이 넘었으니, 이 둘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마무리될 거라 여겼다.
헌데…….
콰콰쾅!
백아린의 대검이 꽂힌 곳을 기점으로 하여 무형의 기운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허공이 갑자기 일렁였고, 그 뒤로 충격파가 밀려왔다.
쿠쿠쿠쿠쿵!
순간 단태허는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땅이 마치 물결처럼 출렁이며 솟아오름과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선두에 있던 이들을 덮치고야 만 것이다.
"으앗!"
그 공격에 휩쓸려 피를 흩뿌리며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곧장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수하들을 보고 있노라니 입에선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런 미친……."
백아린이 날뛰는 방향에 있던 수하들이 마구잡이로 휩쓸려 나가는 것도 황당하건만, 문제는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소란스러운 백아린의 공격에 시선이 잡아끌리긴 했지만, 조용히 수하들을 쓰러트려 나가는 한천의 손에도 많은 숫자가 쓰러져 나가고 있었다.
그저 두 손 놓고 상황을 보고만 있던 단태허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걸 직감했다.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야! 전열을 정비해!"
백아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뒷걸음질 치던 귀문곡의 무인들은 단태허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들을 추슬렀다.
계속 이렇게 뒤로 밀려난다면 거칠게 몰아붙이는 백아린의 공격에 오히려 더욱 쉽게 표적이 될 뿐이었다.
서둘러 진형을 잡으며 그들은 백아린과 한천을 다시금 옥죄려 들었다.
허나 그걸 그냥 보고 있을 백아린이 아니었다.
그녀의 대검으로 묵직한 힘이 밀려들었다.
우우우웅!
터져 나오는 기운만으로 주변에 있는 것들이 확 밀려 나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곧장 대검을 휘둘렀다.
콰앙!
폭음과 함께 정면에 있던 무인들을 향해 검기가 터져 나갔고, 그곳에 있던 이들은 순식간에 빛에 휩싸이며 쓸려 나갔다.
너무도 압도적인 무위.
그 무위는 어떻게든 해 보자며 전의를 불태우던 귀문곡 무인들에게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순식간에 다시금 차갑게 가라앉아 버린 분위기를 눈치챈 단태허가 뒤편을 향해 소리쳤다.
"저 계집부터 죽인다!"
백아린이나 한천 두 사람 모두 위력적인 건 비슷할 수 있지만 그녀의 공격이 워낙 화려하고 강맹한 탓에 아군의 전의가 완전히 꺾이고 있었다.
더는 그냥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단태허는 외침과 함께 빠르게 움직였다.
슈욱!
그가 움직이자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귀살의 살수들 또한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단태허의 움직이는 손.
그의 손에서 수십여 개의 비수들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토해 내며 날아들었다.
촤촤촤촤촤!
옆에서 밀려들어 오는 공격, 정면에 있는 적들을 쳐 내던 와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아린의 몸은 옆에서 날아드는 비수에 곧바로 반응했다.
터엉!
대검을 땅에 박아 넣으며 가볍게 몸을 공중으로 띄운 그녀가 재빠르게 회전했다.
직후에 땅에 박혔던 대검이 뽑혀져 나오며 강하게 아래로 휘둘러졌다.
쿠웅!
터져 나온 검기가 정면에 있던 이들을 순식간에 휩쓸어 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단태허가 표정을 굳힌 채로 달려왔다.
"이이이!"
이를 갈며 달려드는 단태허의 소리를 들은 백아린이 슬쩍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태허와 함께 밀려드는 귀살의 살수들까지 눈으로 확인한 그녀가 소리쳤다.
"부총관!"
"찾으셨습니까, 대장."
말과 함께 한천이 모습을 드러낸 건 정확하게 단태허와 그 뒤를 쫓는 살수들의 중앙쯤이었다. 귀신처럼 그들 사이에서 나타난 한천의 검이 협공을 하려던 귀살 살수들의 계획을 완전히 찢어발겨 버렸다.
쒜에엑! 쾅!
지척에 있던 적들을 단숨에 날려 버린 한천이 이내 가볍게 검을 흔들었다.
부르르르!
떨리는 검 끝.
그리고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기기묘묘한 변화들까지. 순식간에 주변으로 수십여 개에 달하는 검광이 터져 나갔다.
"커억!"
귀살 살수들이 피를 뿌리며 나자빠지는 걸 지척에서 목격한 단태허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많은 인원이…… 고작 둘에게 당한다고?’
백아린과 한천의 실력이 이 정도일 거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십천야에게 들어간 정보는 이 둘의 실력이 우내이십일성에 견줄 정도라는 결론에 도달해 있었지만, 그것은 귀문곡의 수장이었던 상무기처럼 십천야와 관련된 몇몇 이들만이 아는 정보였다.
상무기가 죽은 지금 귀문곡 내에서 이 둘을 우습게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잘못된 정보를 믿고 움직였다면 마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바로 지금처럼.
쿠웅!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에 잠시 한천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던 단태허가 움찔하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땅에 대검을 박아 넣은 채 가볍게 손목을 비틀고 있는 백아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단태허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이곳에 온 인원들 중 대략 절반인 오십여 명 정도가 건재하긴 했지만 단태허는 이미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의 승자가 누구일지를.
기세에서 눌려 뒷걸음질 치는 그를 향해 백아린이 말했다.
"덤빈 대가는 치러야지?"
* * *
싸움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무려 백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의 기습이었지만 그 정도로도 백아린과 한천 두 사람을 감당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고작 일각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그 안에 그토록 많은 숫자의 무인들이 모두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애초부터 상대가 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무림맹이나 마교의 정예 무인 백여 명이 온다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들이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아무리 선별한 이들이라고 한들 고작 인근에서 좀 알아주는 귀문곡 무인들과 귀살 살수들을 데리고 싸움을 걸었으니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습을 한 그들 전원을 쓰러트린 상태에서 백아린이 한천을 향해 말했다.
"부총관, 아까 간단하게 말했다시피 지금 우리가 함정에 빠진 상황이었던 것처럼, 다른 정보가 간 둘도 위험할지 몰라."
"누가 저희를 함정에 빠트린 걸까요?"
"글쎄. 하지만 내부에 관련된 자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여."
중요한 건 표적이 누구냐는 것이고, 그게 자신들이 아닌 천무진이나 단엽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랬기에 그녀가 급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 두 사람한테 가 봐야겠어."
반조로 의심되는 자를 발견했다는 정보를 따라 움직인 천무진과 단엽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장소로 움직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쪽도 마찬가지로 나뉘어 움직여야만 했다.
백아린이 말했다.
"내가 천 공자에게 갈 테니, 부총관은 단엽이 있는 곳으로 움직여 줘."
"그러죠, 대장."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지금으로선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은 그것에 대해 조사를 하는 것보다 다른 일을 위해 움직인 천무진과 단엽의 상태가 더 중요했다.
백아린은 곧장 또 다른 명령을 내렸다.
"가는 길에 적화신루를 통해 일총관에게 연락을 넣어. 이번 일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게 있으니까. 그리고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이를 통해서 지금 이 싸움터도 정리하고. 절대 이곳에 있던 귀문곡 무인들이 우리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지 않게 뒷수습해야 할 거야."
이 일을 계획했을 정체 모를 내부의 적들이 현재 상황의 흐름을 알 수 없게 만들기 위한 명령이었다.
한천이 걱정 말라는 듯 답했다.
"가장 가까운 지부에 가서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천 공자와 단엽에게도 연락을 넣어 보죠. 저희보다 연락이 먼저 도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요."
"그렇게 해 줘."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운이 좋다면 자신들보다 먼저 적화신루의 정보가 천무진이나 단엽에게 들어갈 수도 있다.
꼼꼼하게 지금 해야 할 모든 일들에 대한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 해."
서쪽과 동쪽으로 움직인 천무진, 단엽과는 달리 남쪽으로 향했던 백아린과 한천이다.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천무진과 단엽이 더 멀었으니 도착하려면 며칠의 시간이 더 걸리긴 하겠지만…….
이미 꽤나 멀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한시가 급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기에 한천 또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장. 마교에서 뵙죠."
말을 끝낸 두 사람은 곧장 서로를 등진 채로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렇게 몸을 날린 백아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