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소란 ― 늦었네 (2)
귀문곡의 마교 지부를 습격한 직후.
백아린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에 앉은 채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새카만 그림자 두 개가 다가왔다.
그 그림자의 정체.
바로 단엽과 한천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커다란 뭔가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단엽의 등에 매달린 건 귀문곡 마교 지부의 지부장인 장달이었다.
그리고 한천은 장달이 관리하는 그곳에서 훔쳐 온 수많은 서류들이 담긴 봇짐을 산더미처럼 둘러메고 있었다.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 백아린이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다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왔어?"
너무도 편안해 보이는 백아린의 모습에 단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불만을 터트렸다.
"이봐, 이봐. 우리가 죽을 둥 살 둥 귀문곡 지부를 터는 동안 이렇게 놀고 있을 줄 알았다니까."
"놀고 있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바빴는데."
말을 마친 백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었다. 그러고는 이내 단엽을 향해 다가가 어깨에 들려 있는 상대를 확인했다.
장달의 상태를 눈으로 본 백아린이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히 맛이 갔는데? 너무 심하게 팬 거 아냐?"
"심하긴. 그냥 한 대 툭 친 것밖에 없는데 이놈이 약한 거지."
"한 대라고 해서 남들 한 대랑 같겠어? 네 한 대면 어지간한 놈이라도 최소 지옥 구경일 텐데."
"이렇게 살려서 데리고 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좀 세게 치면 죽을 거고, 그렇다고 약하게 건드렸다가 소리라도 질러 대면 얼마나 귀찮았겠어."
"뭐 소리를 질러서 일을 귀찮게 만들 바에야 이렇게 된 게 낫긴 하네."
백아린 또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살벌한 대화 내용과는 달리 마치 오늘 식사는 뭘 할 거냐는 듯이 평온한 태도로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천이 혀를 내둘렀다.
‘하여튼 무서운 인간들이라니까.’
한천이 보기에 두 사람은 다르면서도 또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특히나 가장 닮은 건 바로 일격에 상대를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괴력이다. 예쁘장한 얼굴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무식한 힘까지.
잠시 혼절한 장달에게 신경을 쓰던 백아린이 이번엔 시선을 돌려 한천을 바라봤다.
그녀가 물었다.
"잘 확인하고 가져왔지?"
"당연하죠. 정확하게 전부 확인하기는 어려워서 대충 분류된 것을 보고 눈치껏 챙겨 왔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아 참, 그리고 내가 특별히 주문한 뒤처리는?"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시키신 대로 완벽히 처리해 뒀거든요."
한천이 호언장담하듯 말했다.
사실 이번 작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장달을 납치하고, 그곳에 있는 비밀 자료들을 빼 오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건 바로 지금 귀문곡 마교 지부에서 일어난 그 모든 사건을 납치된 장달이 벌인 일로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 거점에 잠입했던 한천은 또 하나의 일을 마무리 짓고 온 상태였다.
또 하나의 일이란 장달의 거처에 들러 그곳에 있던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모두 싸 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장달의 옷을 비롯한 몇몇 가지 생필품들도 챙겼다.
마치 장달이 직접 그걸 챙기고 도망이라도 친 것처럼 말이다.
그 외에도 의심할 만한 수많은 정황들을 지부에 남겨 둔 상황. 그렇다면 이제는 그 의심이 확신이 되도록 기름을 들이붓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적화신루 쪽 사람들이 움직여서 매듭지을 예정이었다.
도망치는 그를 보았다는 가짜 증인과, 또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들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하나의 큰 그림으로 완성된다면 결국 이번 귀문곡 마교 거점에서 사라진 수많은 의뢰서들과 정보들을 장달이 훔친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하다.
어디 그뿐이랴.
백아린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지금 한천이 가져온 귀문곡의 의뢰서들과 정보들을 다른 정보 단체에 조금씩 흘릴 생각이었다.
마치 이 정보들을 장달이 팔아넘긴 것처럼.
그렇게 된다면 귀문곡에 의뢰를 한 이들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다. 분명 대부분이 비밀스러운 의뢰였을 테니 말이다.
정보 단체로서 의뢰에 대한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은 없다.
그건 신뢰의 문제였으니까.
이 일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서는 결국 귀문곡의 가장 위에 자리한 인물, 귀문곡주인 상무기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백아린은 이런 방법을 통해 몸을 감추고 있는 그를 끌어낼 생각이었다.
이미 계획은 모두 정해진 상태.
남은 건…….
보다 이 작전을 완벽하게 만들어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뿐.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화신루뿐만이 아니라 천무진과 소교주 악준기 또한 바삐 움직여 줘야 했다.
백아린이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한동안 꽤나 바빠지겠네."
* * *
"교주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교주전에서 날아든 갑작스러운 연락.
허나 천무진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이런 연락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조금 일렀다.
오늘은 마교 내성으로 들어선 지 갓 나흘째 되는 날이었으니까.
준비한 작전들의 밑 작업이 한창일 때긴 했지만…….
‘뭐, 상관없지.’
어차피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한 번쯤은 교주 악자헌을 직접 만나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고, 조종당하고 있는 상태 또한 확인할 생각이었다.
천무진은 자신을 찾아온 교주전 사람에게 물었다.
"시간은?"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 싶으시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대로 진행해도 될는지요?"
"그렇게 해."
"예, 그럼 교주님께 뜻을 전달하고 저녁 시간에 맞춰 이곳 귀림원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교주전의 인물은 포권을 취해 보이며 그대로 물러났다.
그가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백아린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를 확인한 천무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왔어?"
"방금 전에 교주전에서 사람이 왔다면서요? 무슨 일이에요?"
"날 저녁 만찬에 초대하겠다더군."
"그래요? 그래서 대답은요?"
"가겠다고 했지. 피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한번 만나 보고 싶었거든."
천무진의 대답에 백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 중 유일하게 천무진의 비밀을 아는 그녀다. 그랬기에 백아린은 천무진이 어떠한 생각으로 교주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저번 생에서의 자신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교주 악자헌.
천무진은 그를 통해 과거 자신의 모습을 일부나마 확인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일을 진행하기 전 현재 교주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도 싶었다.
백아린이 물었다.
"혼자 갈 생각이에요?"
"단엽하고 함께 갈까 싶어."
"단엽이요? 제가 낫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천무진의 사정을 아는 자신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한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천무진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당신을 괜히 노출시키는 건 우리 쪽의 손해니까. 굳이 가진 패를 다 보여 줄 필요는 없지. 어차피 단엽이야 잘 알려진 인물이라 드러낸다 해도 크게 의미가 없을 테고."
"흠……."
백아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진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다소 아쉽긴 했지만…….
천무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어?"
"뭐 거의 팔 할 이상은 준비가 끝났다고 보시면 돼요. 그리고 적화신루 쪽 정보로는 현재 귀문곡에서 사라진 장달을 엄청나게 찾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에 대한 가짜 정보들을 흘려 놔서 꽤나 정신없는 모양이에요."
사라진 장달을 이토록 급히 찾는다는 것.
그건 백아린의 계획이 먹혀들었다는 의미였다.
귀문곡 또한 아직 확신까지는 할 순 없겠지만 그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 때문에 백아린은 무척이나 바빴다.
장달에 대한 가짜 정보나 정황들을 만들어야 했고, 그것과는 별개로 귀문곡에서 훔쳐 온 의뢰서들을 따로 조사하는 중이었다.
개중에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사용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 안에서 제법 쓸 만해 보이는 몇 가지 의뢰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 의뢰를 한 이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를 만한 그런 것들 말이다.
이토록 많은 일들을 해내는 백아린.
그런 그녀의 노고를 천무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천무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고생이네."
그 한마디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백아린이 이내 배시시 웃었다. 천무진이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로 뭘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하는 백아린.
하지만 어찌 모를까. 그녀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그랬기에 다시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인을 만날 수 있어서.
* * *
"아니, 왜 귀찮게 날 데리고 가는 거야."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인 단엽이 투덜거렸다.
지금 천무진과 단엽은 교주전에서 보내온 마차를 타고 목적지로 이동 중이었다. 마교 내성 자체가 워낙 컸던 탓에 교주가 있는 곳까지 가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점점 잦아들 무렵.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의 손님입니다."
천무진은 마차에 난 창을 통해 슬쩍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천무진을 데리러 왔던 자는 교주전을 지키는 수문 위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사전에 이미 모든 명령이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꼼꼼하게 찾아온 손님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곳 교주전이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절차를 끝내고 나서야 교주전의 문이 열렸고, 마차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문이 열리며 드러난 교주전 내부의 모습은 굉장히 웅장했다.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바깥의 모습을 살피던 단엽이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교주전에도 다 와 보네."
몇 차례 마교에 왔던 경험이 있는 단엽이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곳 교주전까지 출입한 적은 없었다. 교주전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오로지 교주의 초대를 받은 극히 일부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마교 교주가 누군가와 만나야 하는 경우에도 어지간하면 다른 장소를 택하지, 자신의 거처인 이곳 교주전으로 부르는 일은 무척이나 드물었다.
천무진은 그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닌 교주전으로 초대받은 것이었다.
밖에서는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교주전에 들어선 이후부터는 다소 속도를 줄여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교주전에 들어서고도 반 각 가까운 시간은 움직인 후에야 마차가 멈추어 섰다.
마부 석에 자리하고 있던 사내 한 명이 재빨리 뛰어내려 마차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가 말했다.
"목적지입니다."
말과 함께 그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고, 그곳을 통해 천무진과 단엽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자연스레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교주 단 한 명만을 위한 공간인 교주전.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 교주 하나뿐인 건 아니었다. 입구를 지키는 수문 위사부터 시작해서 이곳까지 오는 내내.
수많은 무인들이 곳곳을 지키고 있었다.
보이는 것만 해도 그 숫자가 꽤나 많긴 했지만…….
‘경비가 꽤나 삼엄하군.’
천무진은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무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자들이 곳곳에 몸을 감춘 채로 교주전을 호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엽 또한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이곳까지 안내한 사내가 짧게 말했다.
"이쪽으로."
말과 함께 사내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천무진과 단엽이 움직였다. 그렇게 교주 악자헌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상황.
천무진과 단엽은 보이지 않는 일련의 무리가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초대받은 손님이라고는 하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호위 무사들이 조심스레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내의 안내를 받으며 움직이던 도중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교주전 내부에 있는 또 하나의 장원.
그 장원의 입구를 연 사내가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비켜섰다.
이곳부터는 두 사람을 안내해 온 사내조차도 들어갈 수 없었다.
오로지 초대받은 이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
열린 문을 통해 천무진과 단엽이 안으로 들어서자, 뒤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내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처음 온 장원, 허나 두 사람은 어디로 갈지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장원에 위치한 커다란 연못.
그리고 그 연못 위에 자리한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허나 그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은 정자 위에 자리하고 있는 한 명의 사내였다.
멀리에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었다.
저 사내가 누구인지를.
절로 사람을 압도하는 강렬한 기세.
마교 교주 악자헌, 바로 그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악자헌…….’
잠시 그쪽을 향해 시선을 주던 천무진이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
그럴수록 천무진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는 듯한 그런 기이한 기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