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소교주 ― 앉아 (1)
의선, 마의와의 만남이 매듭지어질 무렵.
사내 하나가 마교 내부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마교 소속의 무인이었지만, 실상 그는 적화신루 쪽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움직이고 있는 이유는 역시나 백아린의 명령 때문이었다.
백아린이 명령을 내린 건 천무진을 만나고 싶어 했던 마교의 소교주 악준기, 그와의 약속을 잡기 위해서였다.
마교의 소교주를 만나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천무진이 정체를 드러낸 상태로 대놓고 마교로 찾아간다면 쉽사리 만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비밀리에 만나려는 상황.
그런 식으로 약속을 잡는 건 어려웠다.
그랬기에 백아린은 마교에 숨어 있는 적화신루 쪽 사람을 통해 소교주에게 연락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허나 마교의 소교주인 악준기의 주변은 언제나 경계가 삼엄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직접 이 같은 사실을 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백아린이 생각한 방법은 다름 아닌 표식이었다.
천룡성의 천(天), 적화신루의 적(赤).
합쳐서 천적(天赤)이라는 글자를 소교주가 자주 다니는 동선에 따라 남겨 놓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냥 스쳐 지나갈지도 모를 흔적, 하지만 소교주 정도 되는 자라면 결코 놓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물론 다른 이들 또한 이 글자들을 보겠지만 적화신루를 통해 천룡성에 연락을 취한 당사자인 악준기를 제외하고는 이 두 글자만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생각해 내기는 어려웠다.
중대한 임무를 받은 사내는 머리에 새겨진 동선을 따라 은밀히 움직였다.
슥슥.
외벽이나 나무에도 흔적을 남기며 움직이던 사내.
그러던 그가 도달한 곳은 다름 아닌 소교주의 장원 근처였다. 조금 더 깊숙한 곳에 글자를 남기면 좋겠지만 주변을 지키는 호위전의 무사들이 즐비한 상황.
이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건 무리였다.
인근의 기척을 확인한 그는 재빠르게 벽에 천적이라는 글자를 남겼다.
슬쩍 훑고 지나가면 모를 정도로 옅은 흔적.
그렇게 막 두 글자를 남긴 사내가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려는 찰나.
쿠웅!
묵직한 충격과 함께 사내의 머리통이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놀란 그가 막 반항을 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사내의 머리통을 움켜쥔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조용. 입을 여는 순간 죽여야 할 수도 있으니까."
"……."
사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내뱉어진 이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대체 언제 이렇게 가까이…….’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무인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잖은 실력으로 마교 소속 일개 대대의 한 개 조를 맡은 조장의 위치에 있는 그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머리통을 움켜잡히기 전까지 상대의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말은 곧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순간 뒤편에서 재차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꾸 신경이 거슬리게 누군가가 알짱거려서 나와 봤는데 말이야……."
말과 함께 그 인물은 사내가 남겨 놓은 글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천적(天赤)이라는 두 글자.
그걸 재차 확인한 정체불명의 인물은 자신이 머리통을 움켜쥔 채로 벽에 밀어 넣은 상대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몸을 돌려. 대신 살고 싶다면 입을 꾹 닫아야 할 거야."
지금으로선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사내는 결국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머리통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이 천천히 풀린 덕분에 결국 고개를 돌릴 수 있었던 그, 그리고 그런 사내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소……!"
"쉿."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댄 채로 웃고 있는 사내.
이십 대 중반의 나이, 한눈에 느껴질 정도의 귀해 보이는 인상은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붉은 적의를 걸치고 있고, 긴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기품이 느껴지는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운 좋은 줄 알라고. 네가 적은 글씨가 맘에 들어서 살려 주는 거니까."
말을 끝낸 사내는 적화신루 쪽 인물이 적은 천적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벽에 새겨진 글씨를 만지던 그가 물었다.
"어디 계시지, 그분은?"
뜻 모를 질문을 던지는 사내.
마교 소교주 악준기였다.
* * *
수하의 보고를 전달받은 백아린은 곧장 천무진을 찾아가 그와 마주했다. 그 상태로 그녀는 수하에게서 전달받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벌써 약속이 잡혔다고?"
천무진이 놀란 듯 물었다.
소교주인 악준기에게 자신들이 인근에 온 것을 알리고, 또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아 만남을 정할 예정이었다. 최소 사나흘은 걸릴 거라 예상했던 과정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단 하루 만에 정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일이 이리도 순탄하게 풀린 건가 의아해하자 백아린이 수하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해 줬다.
"적화신루에서 심어 놓은 자가 흔적을 남기다가 소교주 본인에게 걸렸다더군요. 뭐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될까요? 덕분에 직접 소교주를 통해 만나고 싶다는 의사와, 장소까지 전달받았어요. 이 통행 패랑 같이요."
백아린은 마교 외성을 드나들 수 있는 통행 패를 꺼내어들며 말했다.
경비가 삼엄한 내성과는 달리 외성을 오고 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백아린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 정도 통행 패를 구하는 건 간단했다.
외성은 마교 소속의 무인들 중에서도 신분이 낮은 이들이나, 아예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한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시간은 언젠데?"
"오늘 저녁으로 잡혔어요. 어렵다면 정체가 들통 난 저희 쪽 사람을 통해 가능한 날을 전달해 달라더군요. 어떻게 할래요?"
"……굳이 시간을 끌 이유는 없지."
"그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럼 곧바로 당신의 뜻을 마교 소교주에게 전할게요."
흔적을 남기던 수하가 걸리는 바람에 오히려 직통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악준기의 뜻대로 오늘 만나기로 확정한 백아린이 이내 물었다.
"혹시 혼자 만나실 생각은 아니죠?"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그건 왜?"
"가능하면 우리 넷 모두가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뭔가를 더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천무진은 백아린이 왜 이 같은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려는 거다.
현재로선 마교 소교주인 악준기가 만나자고 하는 이유를 모른다. 확률은 그리 높지 않지만, 함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어지간한 함정이라면 천무진 정도 되는 무인에게는 그리 위협이 되지 못하겠지만…… 상대는 마교의 소교주다.
단일 세력만으로는 최강의 무력을 지닌 단체의 소교주. 그가 함정을 파 놓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할지 잘 알고 있다.
그랬기에 백아린은 가능하면 넷이 함께 움직이기를 바랐다.
적어도 넷이 함께라면…… 그 어떠한 함정이 준비되어 있다 한들 한결 걱정을 덜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게 하지."
천무진의 대답에 한결 표정이 밝아진 백아린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그럼 두 사람한테도 가서 저녁에 움직일 준비를 하라고 해 둘게요."
말을 마친 백아린은 곧장 천무진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혼자 남게 된 천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옆에 있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날은 아직 밝았고, 저녁이 되려면 시간이 제법 남은 상황. 바깥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악준기라……."
과거의 삶에서 자신이 죽였던 그.
그런 그와의 재회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해가 지기 조금 이른 시간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네 사람은 어느덧 마교의 외성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악준기에게서 전달받은 통행 패를 통해 쉽게 마교 외성에 들어선 네 사람은 어느 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오늘의 약속 장소인 월궁루(月宮樓)라는 곳이었다.
월궁루로 향하는 내내 단엽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한천이 물었다.
"왜 자꾸 벌레 씹은 표정이야?"
"끙,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놈을 봐야 해서."
지금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알고 있었기에 한천은 단엽이 말하는 그 대상이 누군지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마교 소교주 악준기, 그를 말하고 있는 것일 게다.
단엽의 말에 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를 대표하는 문파 중 하나인 대홍련의 부련주인 단엽과, 마교의 소교주인 악준기다.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한천이 물었다.
"사이 안 좋아?"
"안 좋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한데……."
"그럼 다행이네. 만나자마자 머리끄덩이 잡을 정도의 원수만 아니면야, 뭐."
한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자리에 있기 힘들 정도의 원수만 아니라면야 별문제 없다 생각한 것이다.
한천의 말에 단엽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장서서 걷고 있던 백아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소란은 사양이야."
"쳇, 알고 있다고."
단엽이 투덜거렸다.
그렇게 마교의 외성을 걷던 네 사람은 이내 목적지인 월궁루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월궁루는 크기가 큰 기루였기에, 꽤나 많은 이들이 오고 가는 장소였다.
사실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반대로 이런 장소이기에 의심을 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지."
말과 함께 천무진이 기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네 사람을 향해 점원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막 다가올 때였다.
백아린이 재빠르게 뭔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그것은 푸른색 실이 잔뜩 달려 있는 장신구였다.
이 장신구는 월궁루의 가장 위층을 드나들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이었다.
월궁루는 다섯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가장 위층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었다. 오로지 이 장신구를 가지고 온 이들에 한해서만 오 층에 입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오 층은 하루에 한 번만 손님을 받고 있어 사전에 예약을 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장신구를 본 점원은 곧장 네 사람을 월궁루의 오 층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다른 층과는 다르게 오 층으로 통하는 계단은 은밀한 곳에 따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작은 문을 통해 드러난 계단은 곧바로 오 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입구를 지키는 무인들이 자리했다.
점원은 그 무인들을 향해 백아린이 가져온 푸른 장신구를 보여 줬다. 장신구를 확인한 그들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어 줬다.
무인들 뒤편에 위치한 문을 연 점원은 곧바로 옆으로 비켜섰다.
"안으로 드시면 됩니다."
말을 끝낸 점원의 옆으로 네 사람이 걸어 들어갔고, 이내 열렸던 문이 닫혔다. 그리고 저 문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결코 먼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 오 층은 개인적인 장소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렇게 들어선 오 층.
하루에 단 한 번만 손님을 받는 것답게 방 또한 오직 하나였다.
긴 복도의 끝에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방문.
천무진은 성큼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백아린이 빠르게 쫓았다.
그녀는 모든 신경을 주변으로 쏟았다.
‘다행히 의심스러운 건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의 만남이 함정일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었던 백아린이다. 그랬기에 오는 내내 혹시 모를 의심스러운 모든 정황들을 살폈다.
허나 딱히 문제 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안심해도 되는 상황이라는 판단이 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아린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언제나 그런 방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오 층에 자리한 유일한 방의 입구에 도착한 천무진.
안쪽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면서도 천무진은 전혀 거리낌 없이 손을 내뻗었다.
드르륵.
그의 손이 닫혀 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열린 문을 통해 드러난 커다란 방 내부의 전경.
커다란 탁자에는 많은 음식들이 준비되어져 있었고, 가장 안쪽에 한 명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붉은 적포를 걸치고 있는 인물이 천무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천무진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를 확인했다.
그저 앉아 있는 것뿐이거늘 왠지 모를 위압감을 뿜어내는 사내. 저런 건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타고난 이들이나 뿜어낼 수 있는 기운.
상대에게선 그런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천무진은 단번에 상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초면인 상대방과는 달리, 천무진은 그와 구면이었으니까.
마교의 소교주 악준기, 그가 이곳에 있었다.
상대를 확인한 천무진은 별다른 말 없이 방 내부로 성큼 들어섰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악준기는 일순 움찔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자신이 허락하기 전에 먼저 움직임을 보인 건 교주인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마교의 소교주라는 신분은 그런 것이었다.
그만큼 고귀하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리.
누구라도 고개를 조아리고,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허나…… 이 사내는 예외다.
악준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마교 소교주 악준기, 천룡성의 무인을 뵙습니다."
인사를 건네는 악준기, 그리고 그런 그를 스쳐 지나간 천무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가장 상석에 있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뜻 보면 오만해 보일 수 있는 행동.
그렇지만 뒤에서 따라 들어서며 그 모습을 본 단엽은 절로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저 자신감이 맘에 들었으니까.
마교 소교주를 상대로 상석에 앉아 버리는 저 당당한 모습, 허나 천무진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자리에 앉은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