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마교행 ― 구하셨습니까 (2)
마의의 집무실.
그곳에 이곳까지 온 천무진 일행과 마의, 의선 이렇게 여섯 명이 함께 자리하게 되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구면인 데 비해 마의는 천무진 일행 모두와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의선에 비해 괴팍하기 그지없는 마의였지만 그런 그조차도 천룡성의 무인인 천무진에게는 예를 갖췄다.
"천룡성의 무인을 뵙습니다. 마의라고 합니다."
"천무진입니다."
천무진은 마의에게 짧게 답했다.
방금 전까지 계속 연구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 마의는 검은색의 간편한 옷차림이었고, 반대로 의선은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제대로 잠도 자지 않고 흑주염을 연구하고 있다더니 두 사람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의선은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연유로 이리 직접 찾아오신 겁니까?"
얼마 전에 천무진 쪽에서 직접 이곳까지 발걸음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던 의선이다.
천무진이 있던 성도와 마교와의 거리는 무척이나 멀기도 했고, 계속해서 뭔가를 조사하는 그가 굳이 이곳까지 발걸음을 할 만큼 여유가 있을 것 같진 않아서였다.
마교 소교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은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으니,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이 담담히 답했다.
"마교에 용무가 좀 생겨서 말입니다."
천무진은 정확한 설명보다는 두루뭉술하게 말을 넘겼다.
의선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른 이에게 알릴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소교주와의 만남이 의선의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거기다 소교주는 은밀하게 자신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만큼 외부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의미.
그런 걸 자신의 입으로 떠들고 다닐 순 없었다.
천룡성의 무인인 자신이 이곳 마교에 왔다는 것을 드러낼지 말지도, 우선은 소교주를 만나 보고 정할 예정이었다.
의선은 별다른 걸 캐묻지 않았고, 자연스레 천무진이 질문을 던졌다.
"뭐 알아내신 건 있으십니까?"
"흐음, 그것이 별건 아니긴 한데 이건 돌이 아니더군요."
의선은 천무진에게서 받았던 돌멩이를 꺼내어 들며 말했다.
그 순간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암염이겠죠."
"아니 그걸 어찌……."
놀란 듯 되묻는 의선을 향해 천무진은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그리고 양가장에 가서 구해 온 제련된 흑주염이 든 봇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풀린 봇짐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제련된 흑주염의 가루를 본 의선과 마의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건 설마!"
잔뜩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는 마의를 향해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그 흑주염에 뭔가를 가한 상태더군요. 아마 제련된 상태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도움이 좀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이것만 있다면 연구에 큰 진척이 있을 겁니다."
대답을 하는 마의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천무진이 말했다.
"해독약을 최대한 빠르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마 놈들도 비책을 마련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마의가 고개를 끄덕일 그때였다.
"그럼 이 짐들은 어디로 옮겨 둘까요?"
한천이 봇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허나 그 와중에 한천은 은근슬쩍 의선을 향해 눈짓을 던졌다.
사전에 서찰을 통해 뭔가 모종의 이야기를 나눴던 두 사람.
그랬기에 의선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우선 내 방으로 가져다 뒀다가, 연구실로 옮기면 될 듯하군."
"혼자서 옮기시기엔 좀 많아 보이는데……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그러면 나야 고맙지."
의선과 대화를 주고받은 한천은 곧장 백아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대장, 그럼 잠깐 짐 옮기는 것 좀 도와드리고 오겠습니다."
뭔가 평소와는 다른 한천의 모습.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백아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그럼 가시죠! 의선 어르신."
봇짐을 서둘러 들쳐 메며 한천이 호들갑스럽게 의선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나선 두 사람은 곧장 의선의 거처로 움직였다.
한천은 앞장서서 나아가는 의선에게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요즘 잘 지내셨습니까?"
"내 얼굴을 보게. 잘 지낸 사람의 얼굴인가. 잘못 걸려서 이 늙은 나이에 호되게 고생 중이네."
천룡성의 의뢰를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툴툴거리는 의선, 허나 그런 말과는 다르게 눈빛엔 생기가 흘러넘쳤다.
흑주염으로 만들어진 몽혼약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물건이다.
그것에 대해 조사하고, 또 해독약을 만들어 내는 일이 의원인 의선에게는 무척이나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잘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걷던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선의 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 또한 마교의 무인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지만 의선이 있었기에 별다른 절차 없이 곧바로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의선이 지고 있던 봇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짐은 거기 두고 잠시 앉게. 아, 차라도 한잔하겠는가?"
"뭐 주신다면야 사양 않죠."
웃는 얼굴로 대답한 한천은 곧장 가지고 온 짐들을 구석에 두고는 탁자 쪽으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선이 다가왔다.
의선은 가져온 차를 찻잔에 따라서 각자의 앞에 한 잔씩 내려놓고는 맞은편에 자리했다.
의선이 말했다.
"식기 전에 들게."
"예, 의선 어르신."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자 향긋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향을 음미하며 차를 가볍게 한 모금 삼킨 한천이 감탄하듯 말했다.
"차향이 좋군요."
"맘에 들은 모양이로군."
"뭐 술 냄새를 더 좋아하긴 합니다만…… 종종 이런 것도 나쁘지 않죠."
"사람하고는."
히죽 웃으며 말하는 한천을 향해 의선은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차를 마시던 도중 한천이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스스로 짐꾼을 자처해 의선의 거처로 찾아온 이유, 그건 단둘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둘만의 시간을 만든 이유는 하나였다.
귀명신단.
의선에게 부탁했던 바로 그 물건 때문이었다.
한천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물건은 준비되셨지요?"
움찔.
한천의 그 말에 의선은 잠깐이지만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미 서찰을 통해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이야기가 오고 간 상태다.
거기다가 자연스레 둘만이 있는 시간을 만들려 하기에 귀명신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거라는 예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선이 입을 열었다.
"꼭…… 받아야 하겠는가?"
귀명신단은 세상에 나가선 안 될 단약이다.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만으로 모자라, 사람을 죽음으로 몰 수도 있는 위험성을 지닌 물건.
거기다가 지금 한천의 몸 상태라면 절대로 버틸 수가 없다.
만약에라도 이 귀명신단을 복용하게 된다면 그때 이 사내는…… 폐인이 되거나 죽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랬기에 의선은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한천은 그런 의선의 머뭇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곧바로 답했다.
"네, 필요하니까요."
"그 팔이 망가졌을 때의 몇 곱절 이상은 되는 고통이 뒤따를 게야. 그것도 그나마 살았을 때 이야기네. 죽을 확률이 더 높아. 그리고 지금의 몸 상태론 설령 귀명신단을 먹는다 해도 얼마나 그 효과가 갈지는 미지수네."
"괜찮습니다."
"자네는 겁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무모한 겐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하는 의선을 향해 한천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가만히 찻잔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이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저 엄청 겁쟁입니다. 얼마나 무서운데요. 이 팔이 박살 났을 때보다 더 큰 고통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어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무서운지, 원."
양팔을 교차하여 스스로의 어깨를 감싸 안은 한천이 무섭다는 듯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해 보였다.
장난스러워 보이는 모습.
허나 그것은 그저 장난만은 아니었다.
말을 하고 있는 한천의 눈빛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그런 한천을 마주한 채로 의선이 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야겠다는 겐가? 굳이 이런 선택을 할 필요는 없네. 이 약은 부작용이 너무 심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소릴세."
"네. 알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 이런 선택을……."
"하지만 말입니다, 의선 어르신."
의선의 말을 자른 한천이 슬그머니 상체를 앞으로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세상엔 제가 부서지는 것보다도 더 큰 고통이 있는 법입니다."
"스스로가 부서지는 것보다 더 큰 고통?"
한천의 의미심장한 그 한마디에 의선이 중얼거릴 때였다.
한천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에겐 그게 바로 저 안에 있는 우리 대장입니다."
"총관을 말하는 겐가?"
"네, 그분은 저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니까요."
백아린은 세상이 모두 버린 자신을 잡아 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백아린이 있었기에 한천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백아린은 한천에게 있어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라면…….
오른팔? 목숨?
그런 것 따위 아무런 상관없었다.
어차피 죽었어야 할 목숨이다.
슬프게 끝났어야만 하는 삶이다.
그런 비참한 삶에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 바로 백아린이다.
처음 만났던 그때는 너무도 어렸던 꼬마 아이, 그 아이로 인해 한천은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웃음이라는 것도 배웠다.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준 백아린. 그랬기에 지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힘든 길을 걸어야 한다 해도.
말을 끝낸 한천은 그저 묵묵히 의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설득은 불가능하겠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흔들림 없는 눈빛.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뜻을 굽힐 상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결국 의선이 슬그머니 탁자의 옆 부분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탁!
소리와 함께 탁자에 감춰져 있던 비밀 공간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그마한 상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상자를 꺼내어 든 의선이 그걸 한천에게로 내밀었다.
"받게. 귀명신단일세."
"감사합니다. 의선 어르신."
한천이 씩 웃으며 그가 내민 상자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 한천을 가만히 바라보던 의선이 입을 열었다.
"알겠지만 이 약이 자네를 강하게 해 주는 건 아닐세.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신체의 능력을 아주 조금 늘어나게 하는 것 정도지, 내공 증진이나 확 눈에 띄는 효과 같은 건 없다는 걸 명심하게."
"상관없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요."
한천은 망가져 있는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이 오른손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 어떠한 영약보다 절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자신감이 뚝뚝 묻어 나오는 그 말에 의선은 가만히 한천을 응시했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을 만나 왔다.
그랬기에 의선은 어느 정도 상대의 인상만으로 그를 파악하는 게 가능하곤 했다.
헌데…… 이 사내는 모르겠다.
도통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의선의 복잡한 속내를 알지 못하는 한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차 잘 마셨습니다. 또 찾아뵙죠."
말을 마친 그가 막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길 때였다.
자리에 앉아 침묵하고 있던 의선이 입을 열었다.
"전에도 물었네만 대체 자네는 누구인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귀명신단의 존재를 아는 자.
거기다가 그것이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자.
그런 자가 고작 적화신루의 부총관이라니…….
그 사실에 대해 저번에도 놀랐고, 궁금해했었다. 하지만 다시 한 차례 얼굴을 마주한 지금 그 궁금증은 그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걸음을 옮기고 있던 한천은 자신을 향한 의선의 질문에 그 자리에 멈칫했다.
잠시 입구에 서 있던 한천이 뒤편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의선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이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는 대답을 드리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요."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의선은 내심 답에 대한 욕심이 났는지 툴툴거리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나올 겐가. 내 자네에게 구하기 힘든 것까지 가져다줬거늘……."
불만 가득한 의선의 목소리에 볼을 긁적이던 한천이 이내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뭐, 그럼 귀명신단도 받고 했으니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저희 둘…… 저번에 만난 것이 초면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둘이 만난 적이 있었다고?"
"네."
"대체 언제……."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이며 한천이 몸을 돌렸다.
의선이 기억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가면을 쓰고 황제의 옆자리에 자리하고 있던 한 명의 무장.
대장군 조휘라는 사내를 말이다.
그렇게 사라진 한천.
그리고 그가 잠시 서 있던 곳을 바라보는 의선의 표정은 복잡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의선이 이내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채로 투덜거렸다.
"끄응.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사람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가버렸군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