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164화 (163/293)

164화. 잔마폭멸류 ― 잘 받아 가지 (2)

양가장에서의 일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양가장에서 장주의 죽음을 마주했던 천무진은 다행히도 백아린이 의심스러운 누군가를 쫓아갔다는 사실을 한천에게 전해 들었고, 곧바로 빠른 판단을 내렸다.

양가장이 소유한 곳들 중 가장 의심스러운 곳은 단연 선산이었고, 제일 먼저 그곳으로 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천무진과 일행들은 백아린이 치치를 보내기도 전에 선산에 나타났고, 곧장 그녀와 합류를 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이 없는 동안 백아린이 해낸 일련의 일들.

그 모든 건 그들을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십천야의 일인인 왕도지를 죽였고, 그토록 찾고자 했던 물건인 제련된 흑주염까지 손에 넣은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직후, 선산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 서둘러 한천이 움직였다.

한천은 적화신루를 통해 이곳에 있는 왕도지의 시신을 수습했고, 그 외에 자잘한 것들을 조사하기 위해 인원을 충원했다.

제련된 흑주염만은 비단에 몇 겹을 쌓아 봇짐에 넣은 채로 직접 가지고 움직이기로 했다. 그 외 나머지 것들은 모두 적화신루가 뒤처리를 해 줄 계획이었다.

이번에 죽은 양가장 장주 양석창의 일도 말이다.

그가 죽은 직후 들이닥쳤고, 그걸 증명한 양가장 무인들이 제법 있긴 했지만 그대로 뒀다가는 괜한 소문이 돌 수도 있다 여겨서다.

그렇게 한천이 바삐 움직이는 사이.

천무진은 양가장이 있는 이곳 준양에서 하루 쉬기로 결정을 내렸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백아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얼마 다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십천야와 싸운 그녀다.

사실 백아린은 자신의 부상 치료에 시간을 쓰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허나 그런 그녀의 생각은 천무진의 강한 주장에 결국 굽힐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은 정말 딱 한 마디로 그녀의 모든 말을 무위로 돌려 버렸다.

바로 지금처럼

"안 돼."

어김없이 돌아오는 그 한 마디에 백아린은 억지로 눕혀진 침상에서 투덜거렸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건 나도 방금 다녀간 의원한테 들어서 알아. 그래도 이왕 쉬기로 한 거 움직일 생각 말고 침상에 좀 붙어 있어."

의원을 통해 다친 부위에 간단히 바를 금창약과, 내상에 좋은 약재만 처방 받고 큰 문제는 없을 거라는 소견을 전해 들었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침상에서 일어나 일에 복귀하려는 백아린의 모습에 억지로라도 그녀가 푹 쉬도록 천무진이 옆에 붙어 있는 중이었다.

좀이 쑤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백아린이 말했다.

"좀 베인 거 가지고 이러고 있으면 남들이 유난이라고 욕할걸요."

백아린은 잔 부상 정도로 침상에까지 드러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한 듯 말을 받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곧장 답했다.

"이번 기회에 좀 쉬기도 하고 그래. 부총관이 대신해서 열심히 움직여 주고 있잖아. 거기다가 단엽도 같이 따라다니면서 돕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말을 마친 천무진은 백아린이 누워 있는 침상 쪽으로 다가오더니 그 옆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았다.

옆에 앉은 천무진을 올려다보며 백아린은 결국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어휴, 그럽시다. 오랜만에 하루 정도 죽은 듯이 쉬어 보죠, 뭐."

백아린이 결국 움직이는 걸 포기하고 천무진의 말대로 오늘 하루는 푹 쉬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때였다.

옆에 자리하고 있던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잔마폭멸류를 쓴 것 같던데."

"어라?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백아린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천무진이 답했다.

"말했잖아. 저번 생에선 잔마폭멸류를 익혔었다고. 싸운 장소를 조금만 둘러봐도 잔마폭멸류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오호, 생각해 보니 가장 좋은 스승이 바로 옆에 있었네요?"

이번 싸움으로 잔마폭멸류의 위력을 체감한 백아린이다. 당연히 그것을 완벽히 가다듬고 싶고,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욕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이거 든든한데요."

"그런데 이미 꽤 높은 경지에 오른 것 같던데? 기운은 몇 개나 다룰 수 있지?"

"열두 개요."

백아린은 자신의 몸 주변으로 피어올랐던 검은 형상의 기운들을 떠올리며 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천무진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벌써 열두 개라…….’

백아린의 실력을 차츰 알아 가면서 그 정도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막상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천무진의 표정 변화를 알아서일까?

"왜요?"

"아니, 생각보다 빨라서."

"그래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은데."

"그래도 그 정도 속도라면 대단한 거야. 그렇게 단순한 무공이 아니니까. 어때? 잔마폭멸류를 직접 체감한 감상은?"

"상상 이상이던데요?"

대답을 하는 백아린의 눈동자가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아이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신이 난 듯 자신이 펼쳤던 잔마폭멸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영락없는 무인이다.

백아린은 한참을 혼자 떠들어 댔고, 그런 그녀의 옆에 자리한 천무진은 시선을 맞춘 채로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 주기만 했다.

그렇게 자리에 누운 채로 옆에 있는 천무진을 향해 신나게 이야기를 해 대던 백아린은 뒤늦게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 이런. 혼자 신이 나서 너무 떠들어 댔네요. 지루했을 텐데……."

"지루하지 않았어. 오히려 이렇게 당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

"……."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은 잠시 말문이 막힌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와 시선을 맞췄다.

침상에 누운 채로 천무진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 순간.

두근두근.

자신도 모르게 날뛰는 심장 소리가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놀란 듯 그녀가 이불 속에서 심장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심장 소리가 커진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니었다. 손바닥이 닿아 있는 가슴 부분이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크게 당황했다.

‘갑자기 왜 이러지?’

난데없이 방금 전 왕도지와 싸움을 벌였던 그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고, 심장은 조절하기 힘들 정도로 날뛰었다.

당장이라도 마주하고 있는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일까?

백아린은 이상하게 천무진과 마주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묘한 침묵과 함께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상황.

결국 천무진이 슬쩍 말을 돌렸다.

"아 참, 오늘 그곳에서 회수한 흑주염 가루 봤어?"

"아, 네. 봤어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물끄러미 천무진을 올려다보던 백아린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서둘러 답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말했다.

"여태까지 얻었던 것들과는 색이 다르던데."

돌로 착각했던 흑주염을 직접 갈았을 때 나오던 가루의 색은 회색과 흰색 사이. 그리고 향로에 들어가 있던 가루는 붉은색이었다.

그런데 양가장의 선산에 있던 창고에서 구한 그 가루는 분홍빛에 가까웠다.

천무진의 말을 들은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아요. 하지만 십천야가 도망치지 않고 직접 움직여서 없애려 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라는 의미겠죠. 아마도 이게 그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진짜 흑주염의 정체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마찬가지야."

천무진 또한 동조의 뜻을 내비쳤다.

그렇게 말을 끝냈던 천무진이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그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백아린."

"네?"

지그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천무진의 행동에 그녀의 목소리가 슬쩍 올라가는 그때였다.

천무진이 말했다.

"고생했어. 당신 덕분에…… 많은 걸 얻었어."

십천야의 한 명을 죽이고, 제련된 흑주염까지 손에 넣은 건 여태까지 천무진이 해냈던 많은 일들 중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성과였다.

천무진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진심. 백아린은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내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별로 안 다쳤다고 하긴 하지만 맘이 편치 않군. 내 일을 해 주다가 이렇게 부상을 입고……."

바로 그 순간 백아린의 입에서 흔들림 없는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이제 당신만의 일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의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어 오는 천무진을 향해 다시금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그녀가 말을 받았다.

"당신만의 일이 아니라고요. 이젠 우리의 일이죠. 그러니 미안해하지 말아요."

"……."

생각지도 못한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말문이 턱 하니 막혀 왔다.

우리?

우리라고?

그 말이 이리도 가슴 깊이 들어와 박힌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전히 저번 생에서의 외롭고 슬펐던 기억만이 가득한 천무진에게 지금 백아린이 한 ‘우리’라는 말은 무척이나 깊숙이 다가와 박혔다.

마음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그런데 왜인지 천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백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갑자기 왜 웃어요?"

"그냥."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말이야, 분명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백아린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천무진을 올려다보았고, 천무진은 그런 그녀를 향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잘 아네. 그러니 알려고 하지 말고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네네, 그러죠."

웃고 있는 천무진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기에 백아린은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웃고 있는 천무진을 향해 마찬가지로 미소를 보였다.

그저 같이 웃어 주는 것만으로 족했다.

잠시 서로를 향해 웃고 있던 도중 천무진이 물었다.

"금창약은 발랐고?"

"그럼요. 하루라도 빨리 나아서 걱정 안 시키려고 재빠르게 발랐죠. 늦게 나았다가는 이 지루한 침상 생활을 며칠은 더 시킬 것 같아서요."

큰 상처가 별로 없었기에 금창약을 바르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내뱉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고는 이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다 바른 거 맞아? 목에 있는 상처에는 안 바른 거 같은데."

"목예요? 아, 맞다."

보이지 않는 부위이기도 했고, 워낙 경미한 상처였기에 목에 생긴 상처에는 금창약을 바르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살짝 긁힌 정도의 상처를 떠올린 백아린은 천무진의 말을 듣기 무섭게 곧장 손을 뻗어 목을 어루만졌다.

워낙 미세한 상처라 별로 느낌도 나지 않는지 백아린이 손가락으로 목을 눌러 대며 중얼거렸다.

"여긴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천무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가까운 탁자 위에 자리한 금창약을 들고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내 일어나 앉아 금창약을 건네받으려는 백아린의 손을 저지하며 말했다.

"가만있어. 상처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말을 끝낸 천무진은 곧장 금창약의 뚜껑을 열어 안에 있는 약을 손가락으로 쿡 찍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백아린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일 때였다.

천무진이 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뭐해? 약 바르게 고개 좀 옆으로 돌려."

"어어, 음……."

당황한 듯 백아린은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그리고 길어서 방해가 될 머리카락을 반대편 손을 뒤쪽으로 돌려 슬며시 잡아 줬다.

머리카락까지 넘겨 주자 천무진은 손가락에 찍힌 금창약을 목에 난 상처에 조심스레 발라 주기 시작했다.

그가 약을 발라 주며 입을 열었다.

"일 처리는 엄청 치밀하게 하면서 본인 일에는 칠칠치 못한 구석이 있다니까."

목에 있는 상처 부위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내뱉은 천무진의 짧은 핀잔.

그런데…….

"……."

얼굴이 살짝 붉게 달아오른 백아린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지금 미쳐 날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릴 것만 같아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