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개인적 욕심 ― 포기할 수가 없다 (1)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자운과 백아린은 그녀에게 배정된 거처에서 마주 앉았다.
탁자를 앞에 둔 채로 앉은 두 사람의 앞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뜨거운 찻물을 한 모금 머금은 자운이 이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두 사람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로군요."
"아, 뭐 그러네요."
처음 본 것이 맹주를 쫓아내기 위해 마련되었던 회의장이었고, 두 번째가 방금 전 단엽과 나환위의 싸움이 벌어졌던 장소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서 도합 세 번.
자운이 사람 좋은 표정을 지은 채로 말했다.
"하하, 제가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역시나 맹주님 때문이시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썩 편하진 않네요."
백아린은 숨기지 않고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자운이 말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요. 하지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뜻이 다르다 보니 있는 마찰이니까요."
"그거야 뭐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니까요."
자운이 십천야의 일원이라는 걸 모르는 지금, 사실 그에 대한 백아린의 평가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반맹주파로 천무진을 도와주는 맹주 쪽과 적대하는 관계에 놓인 인물이라는 것 정도만이 전부다.
그렇다고 해서 자운이 대놓고 천무진의 적은 아니니 백아린의 입장에서도 굳이 대립해야 할 인물까지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까이 지낼 이유도 없었지만 말이다.
백아린이 말했다.
"설마 이 이야기를 하려고 오신 건 아니죠? 무리한 일정 때문에 좀 쉬고 싶거든요."
거리를 두는 백아린의 태도에 자운은 속으로 불쾌감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는 완전히 감춘 채로 오히려 미안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아, 이런. 길게 시간을 빼앗을 생각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딴소리를 하고 있었군요. 백 총관님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다 보니 변명이 길었나 봅니다."
"저한테 그러셔야 할 이유가……."
"사실 오래전부터 적화신루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적화신루를요?"
"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뛰어난 정보 단체더군요. 그래서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고 싶었는데 이리 기회가 왔으니 놓치고 싶지 않더군요. 그랬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찾아온 겁니다. 너무 노여워 마시기를."
"적화신루에 의뢰를 하고 싶다는 말씀으로 들으면 될까요?"
"네, 맞습니다. 화산파야 개방에게 의지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니 전적으로 맡길 순 없지만 개인적 의뢰들을 따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의뢰를 맡기고 싶다는 말에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의뢰야 모두에게 열려 있으니 그거야 상관없죠. 다만 먼저 의뢰를 한 당사자와 연관된 정보는 절대 넘기지 않습니다. 모든 정보단체들이 그런 것처럼요."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섬서 지부에 연락을 넣어서 조만간 사람을 보내드리도록 하죠. 앞으로 의뢰는 그쪽으로 해 주시면 될 거예요."
딱 상황을 정리해 버리는 백아린을 지그시 바라보던 자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직접 절 도와주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제가요?"
"네, 애초에 제가 관심이 있는 건 적화신루뿐만이 아니었으니까요."
뜻 모를 말에 백아린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그때였다. 숨을 고른 자운이 말을 이었다.
"백 총관님. 당신이라는 사람에게도 관심이 있습니다. 대단한 능력자시더군요."
자운은 여태 감춰 왔던 진짜 속내를 드러냈다.
자운이 이렇게 백아린을 찾아온 것은 당연히 그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이들이 오늘 화산파에 나타났는데, 어르신에게 보고를 하고 대답을 들을 시간이 있었을 리가 없다.
처음의 목표는 단엽의 제거였다.
그렇게 천무진의 수족 하나를 없애려 했지만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생각하며 스스로 화가 나 있는 그때.
허나 이내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단엽보다 더욱 위협적일 수 있는 존재가 눈에 들어왔으니까.
그것이 바로 백아린이었다.
십천야인 주란을 꺾고, 반조조차도 인정할 정도의 실력자. 믿기 어려웠지만 우내이십일성 중 한자리를 차지해도 이상할 것 없는 무인임이 분명했다.
거기다가 적화신루라는 단체를 통해 천무진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이가 바로 이 백아린이다.
단엽이 팔 하나 정도라면, 이 여인은 팔에다가 눈과 귀까지 없애는 효과나 다름없었다.
지금 천무진 일행들 중에 가장 큰 조력자일 수도 있는 백아린을 가질 수 있다면 이번에 단엽을 죽일 기회를 놓친 것 정도는 전혀 아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백아린이라는 이 여인은 무척이나 뛰어난 미모를 지녔다.
무인으로서의 욕심뿐만이 아니라, 추잡한 욕망까지 채워 줄 수 있는 그런 보물이었던 것이다.
십천야 내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 자운으로서는 실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굳이 천무진의 일을 뺀다 해도 그녀만 손에 넣는다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백아린이 답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렇게는 못 할 것 같네요. 전 천룡성을 위해 움직이고 있어서요.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하거든요."
거절을 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이렇게 매몰찰 정도로 빠르게 거절의 의사를 밝힌 건 다소 예상 밖이었다.
‘우선은 물러나야겠군.’
그저 욕심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기에 자운은 우선 한 발 뒤로 물러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당장에는 백아린과 어느 정도 인연을 만들어 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그것이 필요한 때였으니까.
"……아쉽게 됐군요."
"네, 그럼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지부를 통해 사람을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럼 시간도 많이 방해한 것 같은데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자운이 자리에서 성큼 일어섰다.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려는 백아린을 향해 자운이 입을 열었다.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말씀 주시지요. 절 도와주신다면 훗날 제가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는 그때 더욱 큰 걸 쥐여드릴 생각이니까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던진 그 말.
백아린이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그 높은 자리라는 게…… 무림맹주의 자리를 말하는 건가요?"
"글쎄요."
자운은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지닌 생각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무림맹주 자리를 노린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굳이 답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말을 끝낸 자운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다음엔 더 좋은 인연으로 뵙지요."
"살펴 가세요."
말과 함께 마찬가지로 포권으로 백아린이 답했다.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자운은 곧장 몸을 돌려 걸어 나갔고, 그가 사라진 빈자리를 응시하던 그녀가 천천히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주고받았던 대화들.
방금 전까지 자운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백아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이네."
백아린을 두고 몸을 돌려 나온 자운은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 무렵에야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힐끔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 있는 백아린이 있는 거처를 응시했다.
‘뻣뻣하긴.’
몇 번이고 호의를 보이며 친분을 쌓아 가려 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백아린은 벽을 세운 채로 답했고, 그로 인해 예상보다 빠르게 그녀와의 만남을 종료해야 했다.
‘언제까지 그리 나올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보자.’
백아린의 도도한 시선을 떠올리자 그게 자신의 것이 되는 상상 또한 덩달아 치솟았다.
그 쾌감이 얼마나 자극적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점점 더 욕심이 난단 말이지."
그녀의 가치를 몰랐을 때면 모를까,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아 버린 지금…….
자운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 * *
천무진과 조수아 두 사람은 마주한 채로 잠시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던 조수아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아는 것 같으니 괜히 돌리지 않고 말할게요. 당신의 사부님을 만나고 싶은데 어디 가면 볼 수 있죠?"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저도 못 뵌 지 꽤 됐습니다. 현재 운행을 떠나셨고,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기 전까지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떻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네, 없습니다."
너무 딱 잘라 말하는 천무진의 말투 때문일까?
잠시 그를 살펴보던 조수아가 물었다.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죠? 그분이 말해 주시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맞습니다. 사부님은 이런 이야기를 직접 하실 분이 아니죠.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저번 생의 기억이 있기에 알 수 있는 사실.
허나 그것을 밝힐 수는 없었기에 천무진은 어쩌다 보니 알게 됐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둘러댔다.
화산옥녀 조수아.
그녀는…… 천운백이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랬기에 천운백을 죽게 만든 여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눈앞에 있다.
비록 사사로운 감정은 전혀 없었지만 천무진은 조수아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천운백과 조수아가 만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왠지 모르게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의 그 운명이 반복될 것만 같아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말에도 쉽사리 포기하기 어려웠는지 그녀가 재차 물었다.
"정말로 방법이 없는 건가요?"
"정말 없습니다."
"……그렇군요."
말을 끝낸 조수아는 잠시 자리에 앉아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 그리고 동시에 슬픔이 가득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천무진이 말했다.
"하실 말씀이 더 없으시다면 이만 자리를 끝내도록 하죠. 사부님을 뵙게 되면 당신을 뵈었다고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말을 마친 천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나갈 수 있도록 거처의 문을 열어 줬다.
그런 그의 모습에 조수아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적인 고민들.
하지만 이내 결단을 내린 그녀가 서둘러 소리쳤다.
"잠시만요!"
자신을 불러 세우는 조수아의 목소리에 천무진이 멈칫했을 때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이내 옷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무엇인가를 꺼내어 들었다.
그건 색이 바랜 비단이었다.
비단을 든 채로 천무진을 향해 성큼 다가선 조수아가 그걸 내밀며 말했다.
"이 안에 서찰이 들어 있어요. 그분께 이걸 전해 주세요."
색이 바래 버린 비단 안에는 서찰이 들어 있었고, 조수아는 그걸 천운백에게 전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녀가 건네는 비단에 싸인 서찰을 받아 든 천무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서찰을 쓴 것이 오늘이 아닐 거라는 걸.
바래 버린 비단, 거기다 오랜 시간 지속된 듯한 구김까지. 마치 오랫동안 품 안에 간직해 두고 있었던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결국 천무진은 그 서찰을 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도록 하죠."
"신세를 지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럼 이만."
짧게 인사를 마친 조수아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혼자만 남게 된 천무진은 방문을 닫고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비단을 지그시 바라봤다.
"후우."
깊은 한숨이 몰려나왔다.
조수아가 전해 달라 부탁한 이 서찰.
하지만 과연 이 서찰을 전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만약 그렇게 그녀와 얽히게 되면서 다시금 저번 생에서처럼 사부가 죽는다면?
와락!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천무진은 서찰을 당장이라도 찢을 듯 꽉 움켜쥐었다.
비단이 뭉개지며 덩달아 안에 있는 서찰 또한 구겨졌다. 손에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찢겨져 나갈 한 장의 서찰.
하지만…….
모르겠다.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지.
움켜쥐었던 힘을 푼 천무진은 이내 구겨진 비단 안에 들어 있을 서찰을 조용히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