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상흔(傷痕) ― 기억나게 해 줄게 (1)
화산파 장문인 양우조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혈우일패도 나환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양우조가 나환위에게 답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리도 먼 걸음 해 주신 것도요."
"고맙다니요. 장문인의 팔순 잔치를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며 나환위가 손사래를 쳤다. 다정한 듯 서로를 향해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사실 양우조는 나환위와 크게 인연이 있지 않았다.
이번에 있던 양우조의 팔순 잔치에 나환위가 온 것 또한 그 때문이 아닌 자운으로 인한 것이었다.
자운이 나환위를 초청했고, 그가 그걸 받아들였다.
허나 양우조는 그것조차 그리 탐탁지 않았다.
나환위를 이곳 화산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정말로 자신의 팔순 잔치 때문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그리고 양우조는 그 이유를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무림맹주 관련 건 때문이다.
그 자리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이미 전해 들었다. 당시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자운은 갑자기 나타난 천룡성 무인의 존재로 인해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무림맹주를 거의 쫓아냈던 상황에서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자운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한 일.
아마도 뭔가 일을 벌일 거라 여겼는데 이번 만남이 그중 하나라는 판단이 섰다.
나환위는 큰 세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내이십일성이라는 상징성과 뛰어난 무력을 지녔으니 아마도 이번 기회를 통해 그를 자신의 편으로 들이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자운이라는 사낸 결코 의미 없는 행동을 하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던 중 나환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오랜만에 장문인도 뵙고, 좋은 지기도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습니다."
"지기라니요, 부끄럽습니다. 선배님."
"거참, 같은 우내이십일성끼리 그리 깍듯하게 할 필요 없다니 그러네. 좀 편안하게 하게."
"그럴 순 없지요. 오랫동안 존경해 온 선배님이시니까요."
자운이 한껏 치켜세워 주자 나환위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사실 자운은 우내이십일성 중에 어린 편에 속했지만 그 실력이나 위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내였다.
실력에서는 나환위보다 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고, 심지어 무림맹주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인물이 아니던가.
이런 사내가 자신을 존경해 왔다며 계속 입발림 소리를 하는데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보며 속으로는 기가 찼지만 양우조는 아무렇지 않게 헛기침을 하며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흠흠."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이 잠시 말을 멈추는 그 순간 양우조가 말을 이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뵙도록 하지요, 나 대협."
이곳에서 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는 그가 이렇게 상황을 마무리 짓고 자리를 뜨려는 그때였다.
자운이 곧바로 나환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선배님은 제가 모시지요. 화산 바깥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겠는가? 그럼 나야 고맙지."
"물론입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말과 함께 자운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뒤편에서 가만히 서 있던 양우조의 여식 양소유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바깥까지 모시는 일은 제가 맡아도 될는지요?"
"……장문인의 여식께서 말이오?"
놀란 듯 나환위가 되물었다.
그러자 양소유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손님이 떠나가시는 길을 배웅하는 일을 다른 분이 맡게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까요. 화산파 장문인의 직계손인 제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이 돼서 말입니다."
말과 함께 양소유의 시선이 옆에 자리하고 있는 자운에게로 향했다.
양소유가 갑자기 나선 이유는 바로 자운 때문이었다.
마치 스스로가 화산파의 대표라도 되는 양 설치고 다니는 자운을 그녀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장문인이 앞에 있는 지금은 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 여겼다.
예상치 못한 양소유의 행동에 놀란 양우조가 전음을 날렸다.
『소유야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다만 굳이…….』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리고 단둘이 두는 것도 내키지 않고요.』
사실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면 자신이 옆에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적어도 대놓고 수작질을 부리는 건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행동을 통해 자운에게 모종의 경고를 전하고자 했다.
장문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라고.
양소유가 이리 나오니 결국 양우조 또한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멈칫했던 나환위가 이내 웃는 얼굴로 답했다.
"섬서제일미라 불리시는 소저의 배웅이라니 저야 영광이지요."
"그럼 절 따라오시죠."
말을 마친 양소유가 먼저 방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나환위가 양우조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 기회에 또 뵙지요."
"조심해서 가십시오."
두 사람이 인사를 끝마치고 나환위는 곧장 바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를 자운 또한 뒤쫓았다.
방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양소유가 따라나서는 자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나 대협은 제가 모실 테니……."
"아니다. 나도 배웅해 드리겠다 했는데 그럴 순 없지. 같이 가자꾸나."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이는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어색하게 만들었지만, 어릴 때부터 그리 불러 오던 사이였기에 지금은 그게 입에 붙어 버렸다.
같이 가는 것도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그것까지 자신이 막을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양소유는 자운과 함께 나환위를 데리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거처를 벗어날 무렵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환위의 수하들이 빠르게 뒤편으로 따라붙었다.
그 인원은 대략 열 명 정도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비월조라 불리는 나환위의 수하들이었다.
거기다 비슷한 숫자의 화산파의 무인들까지 호위를 위해 따라붙으니 얼추 숫자가 스물을 훌쩍 넘어섰다.
화산파는 연화봉이라는 커다란 봉우리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는 하늘의 옥녀가 달 밝은 밤에 강림하여 머리를 감고 갔다는 옥녀지(玉女池)가 있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세 사람 중 나환위가 주변의 경관을 보며 탄성을 토해 냈다.
"과연 화산의 경치는 절경이오. 내 살면서 이만한 곳을 본 적이 언제였는지 모를 지경이외다."
"과찬이세요."
짧게 답을 하는 그녀를 슬그머니 바라보던 나환위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장문인 여식의 나이가 적령기에 들어선 것 같은데……."
"혼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소이다. 내 듣기로 스물 언저리라 들었는데 아니오?"
"아뇨, 맞아요."
생각지도 못한 주제에 당황하긴 했지만 양소유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그러자 나환위가 입을 열었다.
"혹 마음에 두고 계신 사내라도 있으시오?"
"……없는데 그건 왜 물어보시죠?"
양소유가 점점 표정을 굳히며 되묻는 그때였다.
나환위가 옆에 있는 자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무척이나 잘 어울려서 하는 말이오. 아, 나이 차이는 좀 나지만 이런 매력적인 사내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소."
자신과 자운을 엮으려 드는 나환위의 모습에 양소유는 기가 막혔다.
나이 차이가 나는 건 사실 별 문제가 아니었다.
말대로 그 사내가 마음에 들기만 한다면 그런 건 전혀 상관없었으니까. 하지만 자운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마음 같아서는 무슨 소리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양소유는 끝까지 예의를 갖췄다.
상대는 화산파의 손님으로 왔던 이고, 무림에서 배분도 높은 인물.
자신이 자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상황이니 할 수 있는 말이라 애써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녀가 답했다.
"나이 차이는 신경 쓰지 않아요. 다만…… 저한테 이분은 그냥 오라버니라서요.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네요."
"허어, 그렇소?"
아쉽다는 듯 탄성을 토해 내던 나환위가 이내 딱딱하게 굳은 양소유의 표정을 확인해서인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혹 결례를 범했다면 용서하시오."
"괜찮습니다."
짧게 말을 끝낸 양소유는 침묵했고, 이내 나환위는 자운과 대화를 나눠 가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닫은 채로 두 사람의 대화에 스리슬쩍 귀를 기울였지만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예전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에 대해 담소를 나누거나, 아니면 무공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주고받는 게 다였다.
그렇게 화산파를 나와 약 반 시진 정도를 내려왔을 무렵.
화산파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이대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이제부터는 이동하기 편안한 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약 일 각가량 더 앞에 있는 곳까지만 안내를 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그때 산 아래로 향하는 길목에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길목은 아니었기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잠시 시선이 가긴 했지만 그 누구도 일말의 긴장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자신들의 무리에 속한 이들이 누구인가.
중원을 대표하는 고수인 우내이십일성에 속한 무인들 중 무려 두 명이 자리하고 있다. 수백도 아닌 단 두 명의 존재를 보며 긴장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있던 두 명 중 한 명이 껑충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차!"
산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몸을 세우는 상대의 행동에 아래로 움직이던 일행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주변에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누어 가던 자운과 나환위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슬쩍 표정을 찡그린 채 커다란 소리가 토해 내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명의 인물들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죽립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허나 큰 키와 덩치를 보아 두 사람 모두 사내인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던 사내가 천천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죽립을 풀었다.
탁.
푼 죽립을 뒤편으로 던지자 안에 감춰져 있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여인을 연상케 하는 외모, 그렇지만 날카로운 표정이나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은 그가 생긴 것과는 다르게 꽤나 거친 사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단엽이었다.
뭔가 도발적인 기운을 뿜어 대는 정체불명의 사내의 등장에 화산파 무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경고의 뜻을 내보였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단엽이 길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나환위!"
자신의 이름을 내지르는 단엽의 행동에 나환위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날 부른 건가?"
"그래, 너."
"허허…… 예의가 없는 친구로군그래."
나환위가 불쾌한 듯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사이, 옆에 있던 자운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살다 살다 다른 곳도 아닌 이곳 화산에서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자를 만난 건 처음이었으니까. 하물며 자신이 손님으로 초대한 나환위가 있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서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의 손님에게 예의 없는 행동을 하려 하고 있었다.
자운이 말했다.
"대협, 그냥 가시죠. 화산파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닐세. 뭐 그냥 미치광이라면 모르겠지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아하니 나에게 용무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말을 끝낸 나환위가 성큼 앞으로 두어 걸음 나설 때였다.
단엽이 소리쳤다.
"나 모르겠냐?"
"내가 그쪽을 알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그래? 이 상처를 보고도?"
단엽은 자신의 오른쪽 얼굴에 나 있는 상처를 엄지손가락으로 스윽 쓸어내렸다. 자연스레 나환위의 시선 또한 단엽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로 향했다.
잠시 상처를 바라보던 나환위는 이내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군."
단엽에게는 십수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잊지 못할 괴로운 기억이었지만, 그 기억을 만들어 준 당사자인 나환위에게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 과거의 일부였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단엽은 다시금 살의가 솟구쳤다.
누이를 죽이고 실수였다며 웃고 있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런데……모른다고?
"그래? 그렇단 말이지?"
혼자 중얼거리던 단엽이 품에서 권갑을 꺼내어서 손에 끼웠다.
철컥.
기분 좋은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그때.
단엽이 권갑을 낀 두 주먹을 들어 올린 채로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이제 곧 기억나게 해 줄 테니까. 이 주먹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