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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44화 (143/293)

144화. 화산 ― 아직 안 돼 (2)

천무진과 백아린이 향한 여산과는 며칠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화산(華山).

화산은 여러 가지 큰 이유로 유명한 곳이다.

우선적으로 중원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산을 일컫는 오악의 하나였고, 그 산세가 높고 험하지만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했다.

허나 무림인들에게 화산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화산파(華山派)다.

중원을 대표하는 구파일방의 하나이자,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무력을 지닌 단체. 그들이 무림에서 지니는 의미는 무척이나 특별했다.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무인들을 줄줄이 배출해 낸 명문으로 그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수많은 무인과 여행객들의 목적지인 화산.

당연히 그런 화산과 이어져 있는 인근 마을들 또한 큰 성세를 이루는 것이 당연했다. 허나 요즘 따라 주변 마을들에는 더욱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었으니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화산파에 있는 하나의 행사 때문이었다.

현 화산파 장문인인 양우조(梁優窕)의 팔순.

오랜 시간 화산파를 지켜 왔고, 또한 무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양우조를 위해 화산파에서는 대대적인 잔치가 있을 예정이었다.

오랜 시간 무림에 몸담아 왔고 많은 존경을 받아 온 무인인 만큼 양우조의 팔순 잔치에는 각지에 있는 이들이 몰려들어 축하를 전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물론 무인도 많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 관부의 인물이나 화산파와 관련된 장사꾼들도 제법 있었다.

각지에서 축하 행렬이 뒤따르는 행사이니 만큼 많은 이들이 모였고, 그것은 곧 화산파의 영향 안에 있는 마을들에게도 큰 호재였다.

때아닌 호황을 맞은 화산파 인근 마을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마을들 중 하나인 속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밀려드는 손님들로 인해 마을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피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속춘에 위치한 초린객잔.

그곳에 두 명의 사내가 들어오고 있었는데, 한 명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인 반면 다른 하나는 표정을 잔뜩 찌푸린 상태였다.

완전히 상반되는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낸 둘의 정체는 바로 한천과 단엽이었다.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초린객잔으로 들어서게 된 단엽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대체 여기는 왜 들르자는 거야? 당장 가자니까?"

"아, 그냥 내 말 좀 들으라니까 그러네. 우선 올라가 있어.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이야기는 방에서 하자고."

말과 함께 한천은 단엽을 먼저 방이 있는 초린객잔의 이 층으로 올려 보냈다. 거의 떠밀리다시피 계단을 올라야만 했던 단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잡아 둔 방으로 들어섰다.

텅 빈 방에 홀로 자리한 단엽이 여전히 맘에 안 든다는 듯 앉지 못하고 내부를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한천이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단엽이 빠르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야, 몇 번을 말해. 왜 이렇게 번거롭게 시간을 낭비하냐고."

지금 이처럼 단엽이 투덜거리는 이유는 바로 지금 이곳 초린객잔에 방을 잡았기 때문이다. 단엽은 이곳에 온 이유인 복수를 하기 위해 당장이라도 화산파로 가기를 원했다.

혈우일패도 나환위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허나 한천은 단엽과 생각이 달랐다.

단엽을 진정시키며 한천이 입을 열었다.

"지금 가서 나환위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그게 가능하겠어?"

"안 될 건 뭔데? 애초에 불가능하다 생각하면 이곳까지 왔을 리가 없잖아. 여기까지 같이 와 놓고 이제 와서 뭔 소리야?"

상대는 우내이십일성의 하나지만 단엽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렇게 찾아왔고, 다시금 몸을 감출지도 모르는 나환위를 찾아가 그에게 오래전에 졌었던 그날의 빚을 갚으려 했다.

그런데 이곳까지 군말 없이 동행했던 한천의 태도가 돌변하자 다소 짜증이 난 상태였다.

화를 쏟아 내는 단엽을 향해 한천이 천천히 자신의 말뜻을 밝혔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당연히 그자를 만나서 갚아 줘야지. 다만 그게 당장이어선 안 된다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그냥 보내자고?"

"아니지. 적어도 이틀 후까지는 참아."

"왜?"

"그래야…… 화산파 장문인의 팔순 잔치가 끝날 테니까."

한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었다.

제아무리 단엽의 원한이 깊다 해도 당장에 화산파로 쳐들어가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화산파의 손님으로 찾아온 나환위다.

그런 그를 찾아가 싸움을 벌인다는 건 분명 화산파의 입장에서 그리 유쾌하게 여기지 않을 부분이다.

하물며 그 같은 일이 장문인의 팔순 잔치를 앞두고 벌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결과가 어찌 되든 간에 잔치의 분위기는 엉망이 될 테고, 최악의 경우 관련된 모든 계획이 취소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렇게 될 경우 과연 화산파가 가만히 있을까?

아니, 적어도 구파일방의 하나이자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세력 중 하나인 그들이 그 같은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상대가 사파의 인물인 단엽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한천이 피하고자 하는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한천은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전했고, 이야기가 다 끝나자 단엽의 표정은 한결 풀어져 있었다.

그가 한 말은 분명히 틀리지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지금 당장 나선다면 행사가 엉망이 되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화산파가 직접 사전에 개입하게 될 가능성도 높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나환위를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천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엔 다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가 나환위 그놈이 빠져나가면?"

물어 오는 단엽의 질문에 한천이 기다렸다는 듯 씩 웃으며 답했다.

"걱정 말라고. 그 정도야 당연히 준비해 뒀으니까."

이미 화산파 내부에 있는 적화신루와 연이 닿아 있는 이에게 나환위의 움직임을 최대한 보고해 달라는 연락을 전해 둔 상태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는 건 무리겠지만, 적어도 그가 화산파를 떠나려 한다면 그 전에 미리 알아낼 수 있는 정도는 됐다.

거기까지 전해 듣자 단엽은 더욱 누그러진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십 년이 넘게 기다리다가 만들어진 복수의 기회다.

어렵사리 잡은 기회, 자신의 감정 하나로 놓쳤다가는 다시 언제 이런 절호의 순간이 찾아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자리에 앉는 단엽의 모습에서 한천은 굳이 말로 듣지 않고도 그가 어느 정도 수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천이 말했다.

"화가 많이 나겠지만 잘 생각했어. 이왕 복수를 할 거라면 완벽하게 해 줘야지. 더 세세한 작전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하고, 그동안은 여기서 좀 쉬고 있자고."

말을 하는 한천을 힐끔 올려다본 단엽이 귀찮다는 듯 자리에 벌렁 누우며 입을 열었다.

"썩 내키진 않지만 네 말이 맞는 것 같으니 우선 좀 참는 거야. 그런데 그 며칠 동안 우린 둘이서 뭐 하고 있냐?"

물어 오는 단엽의 질문에 뭔가 이야기를 하려던 한천은 들려오는 인기척을 감지하고는 이내 입가에 큰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을 받았다.

"뭐하긴. 당연히……."

말을 끌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 순간.

뒤편의 문이 열리며 커다란 술상을 든 점소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들을 뒤로한 채로 한천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술 아니겠냐?"

한천의 말과 들어오는 술상을 확인하는 순간 심드렁한 표정으로 누워 있던 단엽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눈을 빛냈다.

단엽이 입을 열었다.

"이러니까 너희 대장이 널 보내면서 그렇게 술 마시지 말라고 당부를 하지."

"그래서 싫다고?"

막 둘 가운데 놓인 술상 한쪽에 앉은 한천이 술잔을 든 채로 물었다.

물어 오는 한천의 질문에 단엽이 재빨리 맞은편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뺏길세라 술잔을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그럴 리가."

* * *

화산파 장문인 양우조의 팔순 잔치는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각계에서 몰려온 많은 이들이 축하의 뜻을 전했고, 그런 이들이 모인 자리이니 만큼 자리 또한 무척이나 성대했다.

호화로운 음식들과 사람들.

그런 이들이 모인 화산파가 시끌벅적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되었던 팔순 잔치는 끝이 났고, 그로부터 약 이틀의 시간이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잔치는 끝이 났지만 그날의 주인공이었던 양우조는 오히려 지금이 더 바빴다. 찾아온 손님들 중 일부는 화산파의 장문인인 그조차도 예의를 갖춰야 하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순차적으로 떠나는 그들과의 자리를 가지는 바람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막 관부에서 나온 인물과의 자리를 끝내고 일어난 양우조는 곧바로 이어질 다음 만남을 위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둘러 움직이던 양우조는 이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팔순 잔치라고 해 놓고 늙은이를 부려 먹기만 하는군."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아버지."

양우조의 핀잔에 대꾸를 한 것은 바로 옆에 함께 자리하고 있던 여인, 바로 양소유(梁昭裕)라는 이름을 지닌 그의 딸이었다.

이십 대 초반의 양소유는 양우조와 무척이나 나이 차가 났다. 그가 오십 대 후반 즈음에 갖게 된 막내딸, 그랬기에 양우조는 그녀를 무척이나 아꼈다.

어머니를 빼닮아 또렷한 이목구비와 선한 인상은 절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끈다.

화산파를 넘어 섬서라는 큰 지역을 대표하는 미인으로 성장한 그녀는 양우조의 자랑이기도 했다.

"다음 생일잔치는 절대 하지 말라 해야겠구나. 이러다가는 생일날이 제삿날이 되겠어."

위로하는 양소유를 향해 양우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뒤로는 일련의 화산파 무리가 뒤따랐다. 마침내 다음 목적지에 도착한 양우조는 입구에 그를 따르던 이들을 대기시켜 둔 채로 딸인 양소유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조가 되어 있는 이가 미리 자리하고 있었다.

양우조와 비슷한 나이 대의 인물,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보였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양우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네가 왜 여기에 있는가?"

"장문인 오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을 취하는 인물.

그는 다름 아닌 화산파가 자랑하는 최고의 무인 자운이었다.

십천야의 일원이자, 무림맹주의 자리를 노리는 인물인 그가 이곳에 먼저 와서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양우조와 자운의 사이는 그리 가깝지 않았다.

물론 껄끄러워질 무슨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어서, 대내외적으로도 그렇게 나쁜 관계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리고 실제로 예전엔 양우조도 자운을 무척이나 아꼈었다.

이토록 재능 있는 무인을 싫어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양우조는 자운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두각을 드러내며 위명을 떨쳐 갈수록 그의 욕심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욕심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 생각하지 않는다.

무인이라면, 사내라면 어느 정도의 욕심은 결코 나쁘지 않다 여겼다. 오히려 그것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여기며 살아왔거늘, 자운에게서 느껴지는 욕심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오랜 시간을 봐 왔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알 수 없는 그 속내 때문일 것이다.

삼십 년이 넘는 시간이다.

그렇게 긴 시간을 옆에서 봐 왔거늘 양우조는 단 한 번도 자운의 진짜 속내를 본 적이 없었다.

그처럼 완벽하게 자신을 감춘 상대.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숨겨 오는 상대를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랬기에 양우조는 시간이 갈수록 자운이 껄끄럽고 불편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론 두려웠다.

이런 사내가 가진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

하지만 이제 자운은 자신이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제는 화산파의 장문인인 자신조차 어떻게 하지 못할 정도로 커 버린 탓이다.

단순한 무력뿐만이 아니다.

화산파의 많은 이들이 자운을 따른다.

자신이 장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운은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반맹주파의 실질적인 수장인 자운.

그에 비해 장문인인 양우조는 중립적인 위치에 선 인물이었다.

양우조에게 포권을 취해 보인 자운이 말을 이었다.

"가신다고 하여 미리 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자운을 바라보는 양우조의 표정이 묘했다.

이 시간에 자신이 올 거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신이 만날 손님을 먼저 찾아와 이런 식으로 조우하고 있는 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단순한 실수?

아니면…….

‘스스로가 나와 동급이라는 걸 다른 이에게 보여 주려는 게냐?’

속 모를 미소를 머금은 자운을 보며 양우조는 밀려드는 의문을 애써 머리에서 지우려 했다. 확실한 증거도 없는 걸로 괜히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었으니까.

양우조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자네가 나 대협과 이리 각별한 사이인 줄은 몰랐군."

"훌륭한 선배님께 예를 갖추는 건 후배로서 당연한 예의지요."

"허허, 장문인 참으로 부럽습니다. 이런 아랫사람을 두고 있다니…… 과연 중원에서 손꼽히는 문파답습니다."

너털웃음과 함께 말을 받는 건 오늘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당사자였다.

양우조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비슷한 나이 대의 노인이 한 명 자리하고 있었다. 다소 마른 체형의 양우조와는 달리 제법 풍채가 있는 노인이었다.

커다란 도를 허리에 찬 채로 길게 기른 수염을 손으로 어루만지는 노인은 무척이나 선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자운과 시선을 맞춘 채로 웃고 있는 그 노인은 바로 단엽이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상대.

우내이십일성의 하나인 혈우일패도 나환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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