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검산파 ― 지켜 줘야지 (2)
여산과 화산이라는 각자의 목적지를 가진 천무진 일행은 함께 동쪽으로 움직이다 이내 원래의 계획대로 두 개의 조로 나눠 이동을 시작했다.
천무진과 백아린은 검산파가 있는 여산.
단엽과 한천은 화산파가 있는 화산으로 말이다.
헤어지는 와중에도 술 마시지 말라는 당부는 잊지 않았다. 물론 그 말을 들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단엽과 한천이 떠나가고 단둘이 된 천무진과 백아린은 빠르게 여산을 향해 나아갔다.
제법 거리가 있는 화산에 비해 여산은 그리 멀지 않았기에 그날 저녁 즈음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산 초입에 위치한 연경(聯經)이라는 마을은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오가는 장소였다. 여산과도 맞닿아 있지만, 관도와 중앙 지역을 잇는 교통적 요충지이기도 해서다.
게다가 섬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장사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좋은 경관을 즐기기 위한 여행객들 또한 쉼 없이 오고 가는 덕분에 이곳 연경은 번화가로 성장하기 충분한 조건들을 지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연경으로 들어선 천무진과 백아린은 곧장 어딘가를 향해 움직였다.
길 안내는 백아린이 맡았고, 천무진으로서는 그저 그 뒤를 쫓고만 있었다.
북적이는 연경의 외곽에 위치해 있는 중화객잔.
천무진이 백아린과 함께 들어선 객잔은 외곽에 있기 때문인지 다른 곳에 비해서는 그나마 다소 한산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층 자리의 절반 이상이 차 있는 상황이었다.
문이 열리며 들어선 두 사람을 향해 한창 바삐 움직이던 젊은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인사를 던졌다.
"어서옵……."
말을 내뱉던 젊은 사내가 백아린의 얼굴을 보더니 멈칫했다. 허나 이내 그는 능숙하게 말을 이었다.
"아고, 오셨군요. 방은 준비해 놨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말과 함께 사내가 성큼 옆에 있는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반응에 천무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들은 막 이곳에 도착한 상황, 그런데 마치 미리 이야기라도 해 놓은 것처럼 곧장 방으로 안내해 주는 모습이라니…….
허나 의아함도 잠시.
천무진의 어깨를 툭 치며 백아린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뭐 해요? 가죠."
"그러지."
뭔가가 있을 거라 판단한 천무진은 백아린의 말대로 사내의 뒤를 쫓아 위층으로 올라섰다. 그렇게 위층으로 올라선 두 사람은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문을 연 사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고, 두 사람이 그 뒤를 따라 방에 들어섰을 무렵.
끼익.
열고 있던 문을 닫은 사내가 곧바로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총관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야 석호(石虎)."
이름까지 부르며 인사를 건네는 백아린의 모습을 보며 천무진은 그제야 어렴풋이 하고 있던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천무진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적화신루 쪽 사람이었나 보군."
"맞아요. 그리고 그건 석호뿐만이 아니죠."
"그건 무슨 소리야?"
"여기 중화객잔이 바로 적화신루의 거점 중 하나거든요."
단순히 이 석호라는 사내가 적화신루의 인물이라고만 생각했거늘, 이 객잔 자체가 섬서성에 있는 거점이었던 것이다.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그때 백아린이 석호를 향해 물었다.
"부탁한 물건은?"
"당연히 준비해 뒀습니다. 다만 전달받은 것과 최대한 흡사하게 만들어 두긴 했는데 얼마나 비슷할지는 확인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 물건부터 가져와 봐."
"옙."
짧게 말을 마친 석호는 곧바로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서랍을 열고 안에 있는 뭔가를 꺼내어 들었다.
새카만 천에 감싸여 있어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들고 다가온 석호가 그걸 백아린에게 건넸다.
그녀는 곧장 검은 천을 풀어 젖혔다.
스윽.
천 안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붉은 보석이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붉은 보석을 든 백아린이 그걸 천무진을 향해 내밀며 물었다.
"어때요? 비슷해요?"
"흐음."
천무진이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눈앞에 있는 붉은 보석의 모습을 살폈다. 외부는 투명한 붉은색이었지만, 내부에는 마치 먹물을 떨어트려 놓은 것만 같은 새카만 물방울들이 장식되어져 있었다.
사실 눈앞에 있는 이것은 진짜 보석이 아니었다.
허나 중요한 건 이것이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다.
이것이 천무진이 기억하고 있는 검산파의 보석과 얼마나 흡사한 외형을 지녔는지가 중요했다.
천무진과 백아린의 계획은 바로 검산파의 보석과, 이 가짜를 바꿔 놓는 것이었으니까.
둘이 마음만 먹는다면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아도, 검산파의 보석을 훔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보석이 없어진 걸 안다면 검산파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노릇,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 같은 작전을 준비해 둔 것이다.
보석을 살펴보던 천무진이 이내 몇 가지 문제점을 짚었다.
"이것보다 각이 더 많이 졌었어. 그리고 이 검은 물방울무늬는 조금 많으니 줄여야 해. 지금보다 사분지 일 정도 줄이면 딱 맞을 것 같군. 다행인 건 내 기억대로라면 색깔은 아주 흡사해. 조금만 손대면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비슷한 모양의 가짜 보석을 부탁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흡사한 느낌의 물건을 가져올 줄은 몰랐기에 천무진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천무진의 표정에서 그런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백아린이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딱히 세상에 노출된 적이 없는 보석이라, 잘 안 나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맘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렇다면 지금 말해 준 부분을 고쳐야 할 것 같은데……."
말과 함께 백아린이 석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곧바로 말씀해 주신 부분을 고쳐서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걸리겠어?"
"기술자들을 대기시켜 놔서 하루면 됩니다."
"그럼 바로 부탁할게."
"예, 내일 물건 확인하실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짓도록 하죠."
서둘러야 하는 일이었기에 석호는 곧장 백아린이 들고 있던 붉은 보석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가져가는 와중에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다시금 검은 천으로 감싸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보석을 챙긴 석호가 말했다.
"방은 이곳으로 쓰시면 되고, 식사는 알아서 금방 올리겠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쉬고 계시지요."
"그렇게 해."
"이따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석호는 곧장 문을 통해 바깥으로 걸어 나갔고, 이내 방 안에는 천무진과 백아린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천무진이 가볍게 방 내부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객잔인데 신기하게 생겼군."
특이하게도 이곳은 마치 하나의 집과도 같은 구조였다. 연결된 방이 세 개가 있었고, 지금 서 있는 이곳은 거실 겸 집무실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사실 이 방은 적화신루 사람들만 사용하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조금 특이하게 만들어 뒀죠."
"그나저나 적화신루에서 객잔도 운영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눈속임용이죠, 뭐."
애초에 돈을 벌기 위해 객잔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 중화객잔에는 손님들이 꽤나 많이 드나들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괜찮은 수익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이 정도는 정보 몇 개 파는 걸로도 충분히 충당 가능한 정도였다.
어떤 거냐에 따라 다르지만 그만큼 정보의 가치는 대단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번거롭게 이런 곳을 운영하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객잔이 눈속임하기에 좋은 요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이들이 드나들어도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곳, 거기다가 오늘처럼 필요에 따라 적화신루의 인원들이 기거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천무진이 근처에 있는 탁자에 가서 자리하자, 마찬가지로 그쪽으로 움직이던 백아린이 갑자기 멈칫했다.
"어?"
그녀가 구석으로 가더니 그곳에 준비되어져 있는 커다란 짐 하나를 풀어헤쳤다. 그러고는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백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것도 준비가 끝난 모양이네."
백아린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천무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의 옆에까지 다가간 천무진은 바닥에 놓여 있는 짐 안의 내용물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여러 종류의 보석과 장신구였다.
천무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건 뭐야?"
"뭐긴요. 우리를 검산파로 들어가게 해 줄 물건이죠."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한테 들은 대로의 구조라면 검산파에서 보석을 훔치는 것이 꽤나 어려운 일일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저희가 원하는 건 보석을 바꿔치기하는 걸 검산파가 모를 정도로 조용히 마무리 짓는 거잖아요."
"그렇지."
"밤을 틈타 몰래 잠입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그랬다가는 사실 들킬 위험도 배제할 순 없죠. 그 상황에서 일을 마무리 짓는 거야 가능하겠지만…… 그렇다면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는 건 어려울 테니까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석을 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일을 매듭짓는 부분 또한 그만큼 신경 써야 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 백아린이 준비한 이 보물과 장신구들.
"들어 볼래요? 제가 짜 놓은 각본이 하나 있는데."
궁금증이 가득한 천무진의 얼굴을 보며 백아린이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던진 말.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무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말해 봐."
* * *
검산파(劍山派)는 여산에 오랜 시간 터를 잡아 온 유서 있는 문파다.
쓸 만한 무인의 숫자만 무려 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를 지녔고, 그 때문에 아무리 구파일방이라 해도 검산파를 쉽게 보지 못했다.
깊은 역사와 무시할 수 없는 힘까지.
그래서 검산파는 섬서에서 손꼽히는 세력 중 하나였다.
그런 검산파를 이끄는 현재 장문인은 이위현(李渭顯)이라는 자였다.
사십 대 초라는 이른 나이에 장문인 직에 올랐고, 약 오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젊은 장문인답게 모험적인 여러 가지 일들을 벌였는데 대부분이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이위현에게는 다소 나이 차가 나는 부인이 있었다.
소소홍(召召紅)이라는 여인으로 한때는 섬서에서 미녀로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삼십 대 후반의 나이로 이제는 검산파의 안주인으로 자리 잡은 그녀에게는 하나의 취미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값비싼 보석이나 장신구를 모으는 것이었다.
소소홍은 언제나 그리 어렵게 구한 것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뽐내는 걸 즐겼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언제나 그녀가 만드는 다과회에서 이루어졌다.
소소홍이 주최하는 이 다과회는 인근에 나름 세력이 있는 가문이나 문파의 여인들만이 초대받는 자리였다.
종종 멀리에 있는 이를 초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인근 마을에 있는 실세의 여인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봐야 옳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자리에서 주인공이 되는 건 언제나 소소홍이었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물건들로 언제나 이목을 끌었으니까.
그런데…….
"호호, 어때요? 정말 예쁘죠?"
"그러게요. 역시 서역의 물건이라 그런지 완전히 다르네요."
대화를 나누는 두 명의 여인을 바라보는 소소홍의 표정은 마치 못 먹을 걸 먹기라도 한 것처럼 불편해 보였다.
애써 감정을 감추긴 했지만 그녀의 심기는 무척이나 좋지 못했다.
벽운세가(霹雲勢家) 가주의 안사람인 부연이라는 여인이 가지고 온 목걸이 때문이었다.
중원에서는 쉬이 보기 어려운 종류의 것으로 화려하면서도 독특한 외양이 단번에 눈길을 잡아끈다.
그 때문에 여섯 명의 여인들이 자리한 이 다과회의 주인공은 그녀가 되어 버렸다.
소소홍은 괜스레 찻잔을 만지며 슬쩍 부연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콧방귀라도 뀌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리 생각하려 애써 봐도 자꾸 눈이 가는 걸 보면 소소홍 그녀 또한 저 목걸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그런 물건을 구했어요?"
다과회의 주최자이자 이 모임의 대장 격인 소소홍이 관심을 갖자 부연이 더 신이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틀 전에 서역을 오가는 상인이 벽운세가에 들렀거든요. 그때 구했지요."
"지금도요?"
"아뇨, 당시에 물건을 팔고 바로 떠났어요."
"그래요? 그럼 그 상인과는 이제 연락이 닿지 않겠네요?"
"그렇긴 한데…… 제가 듣기로는 한동안 연경에서 지낼 거라고 하던데요?"
"연경이요?"
연경이라는 말에 소소홍의 표정이 밝아졌다.
여산의 초입에 있는 그 마을은 검산파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소소홍의 눈치를 살피던 부연은 지금이 그녀에게 점수를 딸 기회라고 여겼는지 슬그머니 나섰다.
"소 부인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연결시켜 드릴까요? 사실 제가 사기엔 다소 부담이 돼서 손도 못 댄 물건들도 많았거든요. 소 부인에게 무척 어울릴 것 같던데……."
슬쩍 띄워 주기까지 하자 소소홍의 얼굴이 더욱 펴졌다.
사실 부연이 산 이후에 남은 물건들 중에 골라야 한다는 것 또한 내심 마음에 걸려 하던 차였다. 그런데 가격이 비싸서 손도 대지 못한 물건도 많았다고 하니 오히려 더 잘된 일이었다.
부연과 소소홍이 지닌 재력 자체가 달랐으니까.
소소홍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야 고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