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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36화 (136/293)

136화. 단엽의 과거 ― 박살 내 주려고 (2)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열한 살이었던 단엽이 열네 살이 되었을 무렵.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누나!"

큰 목소리와 함께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던 소녀에게 달려온 것은 다름 아닌 단엽이었다. 얼굴의 한쪽이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런 단엽을 맞이하는 소녀, 장소진(張小辰) 또한 어느덧 더 나이를 먹어 열일곱이 되었고 이제는 조금씩 어엿한 숙녀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날의 인연 이후 단엽에게 장소진은 커다란 버팀목이자,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줬다.

외로운 타지 생활에서 말벗이 되어 주는 사람이었고 속내를 털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단 한 명이기도 했다.

그런 장소진이 있었기에 단엽 또한 이곳 생활에 점점 적응할 수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국자를 내려놓은 장소진은 부어 있는 단엽의 얼굴을 보며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그녀가 급히 단엽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며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이 왜 이래? 또 누구한테 당한 거야?"

"당하긴, 대체 언제 적 이야기야."

단엽을 향한 괴롭힘이 끊긴 건 꽤나 오래전의 일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건 단엽을 건드리던 그들이 마음을 바꿔 먹어서가 아니다.

이유는 하나.

단엽이 강해져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단엽이 나이를 먹은 만큼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나 주어진 재능이 달랐다.

대여섯 살 정도 나이가 많았던 그들은 이미 성년이 되었지만, 열네 살의 단엽은 모두를 압도했다.

나름 실력 있는 무인들로 자랐지만 어린 단엽은 그들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그랬기에 한동안 누구에게도 맞고 다니지 않아 내심 안심하던 장소진이었는데 갑자기 퉁퉁 부은 얼굴로 단엽이 나타났으니 놀란 것도 당연했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얼굴은 대체 왜 이래?"

"오늘 다 마무리 지어 버렸거든."

"마무리를 지었다니?"

"나한테 까불던 놈들 있잖아. 그놈들 전부랑 혼자 비무를 펼쳤거든. 새끼들, 이제는 내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거야."

무려 이십 대 일의 비무였다.

태반이 이미 성년이 되고도 남은 이들이었거늘 단엽은 겨우 이 정도 타격만 입고 그들 모두를 쓰러트렸다.

단엽이 강해지면서부터는 오히려 그쪽에서 점점 그를 피하던 상황.

그러던 도중 이번에 완전하게 박살을 내 줬으니, 이제 그들은 피하는 걸로 모자라 단엽이 느꼈던 그 비참함을 감내해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좋다는 듯 단엽이 말하고 있었지만 장소진의 귀에는 그런 말들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상처를 보며 안쓰럽다는 듯 옆에 있는 깨끗한 천으로 어루만지며 그녀가 말했다.

"어휴, 하여튼 사내들이란.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이렇게 다치고 다니지 말라니까."

장소진의 핀잔에 단엽은 오히려 히죽 웃었다.

그녀의 이런 걱정이 좋았다.

자신이 굶고 다닐까 봐 항상 걱정했고, 다치고 오면 누구보다 마음 아파한다. 그런 걱정이 있었기에 단엽은 장소진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단엽이 말했다.

"이 정도 상처 가지고 뭘. 괜찮다니까."

말과 함께 단엽은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를 잠시 걱정스레 바라보던 장소진은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이는 단엽의 모습에 결국 웃음을 흘렸다.

"다치고 왔으면서 그렇게 좋니?"

"그럼. 앞으로 설설 기어 다녀야 할 그놈들 생각만 하면 웃음이 안 멈추는데?"

"알겠으니까 앞으론 이렇게 다치고 다니지 마. 이러고 오면 누나인 난 기분이 어떻겠어?"

"잔소리는. 이제 이러고 나타날 일도 없을걸. 신나게 갚아 줄 일만 남았으니까."

단엽은 옆에 놓여 있는 주먹밥 하나를 들어서 우적우적 씹었다.

아무렇지 않게 주먹밥을 집어 먹던 단엽은 이내 문득 과거의 일이 생각났는지 잠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쌓여 있는 주먹밥, 어쩌면 이 주먹밥이 있었기에 오늘의 이 복수가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때 단엽의 귓가로 장소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 안 먹었어? 기다려 봐. 금방 밥 차려 줄게."

"……."

말과 함께 뭔가를 부지런히 준비하는 그녀를 단엽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몇 년이라는 시간을 항상 어머니처럼 챙겨 줬던 장소진. 그런 그녀에게 단엽은 단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일까?

자신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장소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단엽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누나."

"응?"

무슨 일이냐는 듯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장소진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단엽은 입 밖으로 나오려던 고맙다는 말을 가까스로 눌러 담았다.

성격이 그런 탓이기도 했고, 어쩐지 고맙다는 그 말이 너무도 쑥스러웠으니까.

불러 놓고 아무런 말도 없는 자신을 향해 장소진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걸 본 순간 단엽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배고파. 빨리 밥 좀 줘."

재촉하는 단엽의 모습에 장소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겠으니까 그 주먹밥이라도 좀 먹으면서 기다려."

말과 함께 다시금 몸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단엽은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고맙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거늘 이 말을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다.

허나 이내 그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아직 시간은 많은데 뭐.’

그렇게 생각하며 단엽은 묵묵히 주먹밥을 입에 가져다 댔다.

* * *

운천에 자리한 대홍련의 분타에서 단엽이라는 존재는 점점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뛰어난 실력, 그리고 대홍련 련주의 조카라는 배경까지.

단엽을 괴롭히던 이들은 이제 모두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그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고, 하루가 다르게 강해져 가는 그의 존재는 분타에 소속된 고수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그런 이유로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찾지 못했던 누이 장소진을 만나기 위해 단엽은 저녁 시간쯤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운천 마을 바깥에 위치한 자그마한 촌락. 그런데 촌락에 들어서는 순간 뭔가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약 십여 채의 가구들이 모여 사는 이곳은 바로 인접한 운천과는 달리 집들도 허름했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촌락에 있는 집들 곳곳이 박살이 나 있고, 사람들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피 냄새와, 쓰러져 있는 이들의 모습까지.

촌락에 들어선 단엽은 그 모습에 놀란 듯 다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슈슈슉!

빠르게 달려간 단엽이 도착한 곳은 장소진의 거처.

그런데 이곳 또한 다른 거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름하긴 했어도 굳건했던 가옥 곳곳이 손상되어 내부가 드러날 정도였다.

그리고 입구 부분에서는 낯이 익은 이가 쓰러져 있었는데, 다름 아닌 장소진의 아버지였다.

단엽이 서둘러 다가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그를 부축했다.

"아저씨 괜찮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가 익숙한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머리를 맞은 탓인지,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정신 또한 몽롱해 보였다.

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너는……."

"나야, 단엽이라고. 대체 무슨 일이야? 누나는?"

장소진에 대해 묻는 그 순간이었다.

덥석.

그렇게 정신이 없어 보이던 그가 단엽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갑자기 돌변한 그의 모습에 단엽이 눈을 크게 치켜떴을 그때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내, 내 딸을 구해 주게! 그놈들이 내 딸을 비롯해 이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두 끌고 가 버렸어."

"끌려갔다고? 누나가?"

단엽의 질문에 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엽이 어깨를 움켜쥐며 급히 물었다.

"대체 누가!"

물어 오는 단엽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가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태웅채(太熊寨)……."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단엽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태웅채는 인근에 있는 산을 터전으로 잡고 활동하는 산적들이다. 물론 가까운 곳에 대홍련의 분타가 있어 크게 행패를 부리지는 못한다지만 이런 식으로 약자들을 건드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허나 비록 이곳이 운천 바깥에 따로 떨어진 촌락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약탈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새끼들이 감히 누굴!"

단엽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는 이내 부축하고 있던 그를 옆에 있는 평상 위에 눕혔다.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입지 않은 상황.

단엽이 말했다.

"아저씨, 좀만 버티고 있어. 누나를 구해서 돌아올게."

단엽의 목소리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그는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단엽의 손을 꼭 쥐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부탁하네."

"기다리고 있어, 아저씨."

말을 마친 단엽이 쥐고 있던 손을 풀며 곧바로 몸을 돌렸다.

대체 무슨 연유로 이 촌락의 젊은이들을 모두 끌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는 상대를 잘못 골랐어.’

단엽이 이를 악문 채로 걸음을 옮겼다.

납치된 장소진을 비롯한 다른 이들을 구해 내기 위해 단엽은 곧장 태웅채가 위치한 곳으로 움직였다. 거리도 멀지 않았고, 그들의 거점이 있는 산 또한 그리 크지 않았기에 도착하는 데는 두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태웅채는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마치 잔치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커다란 술 항아리들을 놓은 채로 신명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들, 태웅채의 산적들이었다.

태웅채는 대략 스무 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개개인의 실력 또한 뛰어나지 못했다.

무공을 익히고는 있었지만 대부분이 변변치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연신 술잔을 기울이며 웃어 댔다.

"하하하! 이제 우리 고생도 끝이라고."

"채주님, 이번에 돈 들어오면 청명루 한번 가죠. 오랜만에 분 냄새 좀 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채주의 옆에 있던 산적이 기녀가 나오는 기루를 언급하며 신이 난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한참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그때였다.

태웅채의 입구에 도착한 단엽은 망설이지 않고 술판을 벌여 대는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단엽의 등장에 술잔을 기울이던 산적들의 표정이 흉흉하게 변했다.

입구 쪽에 서 있던 험상궂은 사내 하나가 거칠게 술잔을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수염에 묻은 술을 소매로 닦아 내며 옆에 둔 커다란 도를 들어 올린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큭큭, 꼬맹아 엄마라도 잊어버렸니? 여기는 너 같은 꼬마가 올 곳이……."

말과 함께 비웃음을 지어 보이는 바로 그때.

빠각.

어느새 다가온 단엽의 손이 도를 들고 있는 그의 팔을 꺾어 버렸다.

순식간에 당한 일에 잠시 멍하니 있던 험상궂은 사내는 이내 고통이 밀려오자 비틀린 팔을 움켜쥔 채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단엽의 손이 곧바로 그자의 머리통을 잡아서 바닥에 내리쳤다.

쾅!

피와 함께 박살이 난 이가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단엽의 움직임에 비웃고 있던 태웅채의 다른 산적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태웅채의 채주가 당황한 듯 입을 열 때였다.

"대체……."

"어디 있어."

"뭐?"

"어디 있냐고!"

말과 함께 단엽이 주먹을 움직였다.

공격보다는 위협을 목적으로 한 움직임. 손에서 뻗어져 나온 권풍이 산적들 사이사이에 있는 술 항아리를 향해 움직였다.

쨍그랑!

여섯 개의 항아리들이 곧장 박살이 났고, 안에 담겨져 있던 술들은 곧바로 쏟아져 나왔다.

어린 나이로 보이는 그가 펼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무공.

놀란 태웅채의 산적들이 뒷걸음질 쳤다.

짙은 살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그때, 단엽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경고야. 아래에서 납치해 온 이들 어디에 있어?"

납치해 온 이들에 대해 말이 나오자 채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실 그들을 납치한 것은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채주의 입장에서 이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돈이 목숨보다 귀한 건 아니었다. 그랬기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애써 침착하게 정신을 다잡은 채주가 단엽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어디 소속이오?"

자신들이 건드려도 될 대상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가름하기 위한 질문.

태웅채의 채주를 향해 단엽이 답했다.

"대홍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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