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풍운무정검 ― 찾았습니다 (1)
"들어가도 돼요?"
천무진의 집무실 입구에 선 백아린이 가볍게 안쪽에 신호를 보냈다.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침상에 기대어 앉아 있던 천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들어와."
승낙이 떨어지자 백아린이 곧바로 문을 열고 집무실 내부로 들어섰다.
천무진은 혼자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백아린을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요즘 들어 부쩍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부총관은?"
백아린이 십천야의 두 명과 격돌을 벌인 이후 유독 더 뒤를 졸졸 쫓아다녔던 한천이다. 한시도 안 떨어지려던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이 답했다.
"남윤 어르신한테 들었는데 아까 나갔다던데요. 그것도 단엽이랑 같이요."
"단엽이랑? 둘이?"
"네, 그것도 아주 신이 나서 나갔대요."
"어딜 갔는데?"
물어 오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가볍게 손목을 꺾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흉내를 내 보였다.
그러곤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술이죠, 뭐. 그렇게 걱정하더니만 며칠을 못 가네요."
불만스럽다는 듯 툴툴거리고는 있었지만 사실 백아린은 그런 한천의 행동이 섭섭하지 않았다.
그녀의 상태가 완벽하게 호전된 걸 알기에, 이제는 괜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뿐이다.
슬쩍 백아린의 표정을 확인한 천무진은 그녀의 생각을 알았는지 자연스레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 며칠 전에 알아봐 달라고 하셨던 것 때문에요. 우선 말한 대로 알아보긴 했는데……."
말을 하면서도 백아린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우선 가져온 서찰들을 천무진에게 내밀었다.
내용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서찰에 적힌 것들을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쥐고 있던 서찰을 탁자 한편에 올려놓으며 천무진이 말했다.
"별건 없군."
"네, 찾아본 것들끼리의 연결점이 딱히 보이진 않아요."
천무진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백아린은 그에게 뭔가 아는 걸 최대한 말해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천무진을 통해 그가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전해 듣고, 뭔가 연결 고리가 없나 조사를 해 봤다.
허나 아쉽게도 딱히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는 없었다.
천무진이 의뢰한 건 자신이 과거 정체 모를 그녀의 부탁으로 죽였던 이들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수라천도(修羅天刀) 곽우민과, 검산파의 보석.
북해빙궁의 만년설화에 이어 마교의 소교주까지.
백아린이 물었다.
"저기 창고에 갇혀 있는 양휴부터 마교의 소교주까지 너무 다양한데 대체 이들 사이에 뭐가 있었던 거예요?"
사실 급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특히나 양휴는 과거의 생에선 그나마 이름을 어느 정도 날린 바 있었으나 지금은 아직 햇병아리 무인에 불과했다.
그런 그와 마교의 소교주라니.
아무리 봐도 이런 의뢰를 한 것에 대한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아린이 한 질문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린 천무진이 답했다.
"그들의 명령 때문에 죽이거나 뺏은 것들이야."
담담하게 말하는 천무진과는 달리 백아린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몇 개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녀가 물었다.
"허어, 혼자서 검산파를 부쉈어요?"
"그랬지."
"북해빙궁은 그래도 좀 힘들었겠는데요."
"그래도 마교보다는 나았어. 소교주를 죽이기 위해 호위전에 있는 사십팔 명의 호위 무사들을 쓰러트려야 했거든. 거기다 나오는 길목에 세 개의 무력 단체도 쓸어버렸고."
이야기를 듣고는 있지만 백아린은 기분이 뭔가 묘했다.
천무진의 입장에서는 분명 있었을 일.
하지만 지금 현세에서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이 뭔가 모순적이었으니까.
검산파는 아직 건재했고, 북해빙궁의 상징인 만년설화 또한 멀쩡하게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거기다 마교의 소교주 또한 지금 자신의 거점에서 잘 지내고 있을 터.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당신이랑 말을 하면서도 이게 지금 현실이 맞나 하는 생각이 좀 들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낫네요."
"낫다니 뭐가?"
"사실 예전엔 왜 갑자기 이런 의뢰를 하나 했는데 이제 그런 부분은 싹 해소됐거든요. 궁금한 게 있으면 잠을 못 자는 성격인데…… 적어도 잠을 설치지는 않게 돼서요."
천무진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일은 더 복잡해졌지만, 의문은 줄어들었다. 그가 알고 있는 많은 부분에 대해서도 굳이 어떻게 알았냐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미래를 살아 봤기에 알 수 있는 몇 가지 것들.
다만 아쉬운 건 천무진의 기억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백아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기억이 났다면 좋았을 텐데……."
자신들이 찾고 있는 그들에게 조금씩 다가가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확실한 뭔가를 찾지는 못한 지금.
청아원에 이어 사해도를 무너트린 이후부터 그들을 찾는 일이 다소 어려워진 상태였다. 그나마 십천야가 직접 나타나 준 덕분에 조금 더 단서들을 얻어 내긴 했지만 말이다.
백아린의 중얼거림에 천무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게. 좀 더 도움이 되어 줬어야 하는데 그게 한계라 아쉽네."
"아, 절대 탓하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요."
백아린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대꾸했다.
천무진이 보낸 전생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어느 정도 전해 듣긴 했지만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직접 함께 겪어 보지 않고서 어찌 어땠다고 정확히 말할 수 있으랴.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삶이 절대 순탄치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자신들이 찾는 그들에게 조종을 당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을 테고,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들로 가득할 터인데 그런 부분을 괜스레 쑤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나 전혀 상관없다는 듯 천무진이 짧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대답을 한 천무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이 전부일까? 혹시 뭔가 더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이 있는 건 아닐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천무진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며 슬쩍 백아린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아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있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약하게 깨문 입술.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안함으로 가득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표정에 천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당황한 백아린이 물었다.
"왜 웃어요?"
"지금 생각하는 게 너무 눈에 보여서.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뭔가를 더 기억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건 스스로도 자주 생각한 일이니까. 거기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니까. 그러니 이제 그 울 것 같은 표정 좀 지우지?"
"우, 울 것 같은 표정까지는 아닌데요."
억울하다는 듯 말을 쏟아 낸 백아린이 이내 마찬가지로 피식 웃었다.
천무진이 자신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이 같은 장난스러운 말을 던진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웃는 걸 보며 천무진이 말을 받았다.
"그래, 이제야 좀 당신답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칭찬 맞아. 항상 힘이 넘치는 게 장점이잖아."
"설마 이런 무기 들고 다닌다고 힘이 넘친다는 건 아니죠?"
백아린이 등 뒤에 매달린 대검을 툭툭 치며 물었고, 천무진은 곧바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런 그를 향해 억울하다는 듯 말을 쏟아 내려던 백아린의 시선에 자연스레 천인혼이 잡혔다.
문득 예전에 대화를 나눴던 걸 떠올린 그녀가 물었다.
"아 참, 일전에 천인혼에 대해 이야기했던 게 기억나는데 설마 저 무기도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어요?"
천무진이 자주 박살 나는 자신의 검을 보며 천인혼을 그리워하던 때, 백아린과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다.
물론 당시 백아린은 스쳐 가는 이야기로 여겼지만, 그의 특별한 삶을 알게 되니 뭔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질문에 천무진이 답했다.
"맞아. 전생에 내가 사용했던 검이지. 죽는 순간까지 내 옆을 지켜 준 유일한 녀석이고. 그리고…… 어떤 운명이 얽혔는지 이번 생에도 만났군."
말을 마친 천무진은 허리에 차고 있던 천인혼을 들어 올려 잠시 그 겉모습을 살폈다.
검집에 새겨져 있는 악귀 형상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았다.
천인혼을 바라보는 천무진을 잠시 기다리던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거 있어요?"
"계획이라……."
앞으로도 적화신루를 통해 정보를 긁어모을 생각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모자라다. 가만히 있다가 당하는 건 저번 생만으로 충분했으니까.
움직일 만한 단서는 없다.
허나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면 뒤져 볼 만한 곳은 분명 존재했다.
지금 백아린을 통해 조사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의심스러웠으니까.
곽우민과 검산파, 북해빙궁에 마교까지.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지금 조사 중인 네 가지 중 하나를 직접 들쑤셔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저희가 단서를 얻기엔 아무래도 그쪽이 확률이 높을 것 같아서요. 누굴 선택할 생각이에요? 가장 쉬운 건 역시 곽우민이겠죠. 어려운 건 북해빙궁과 마교고요."
곽우민 또한 나름의 세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북해빙궁이나 마교에 비한다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흐음."
천무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딱히 어딘가에 단서가 있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이내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줘.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내일 정해서 말해 주지."
"그렇게 해요. 저도 혹시 모르니 단서가 될 만한 뭔가가 없나 더 찾아보도록 할게요. 조금이라도 더 확률이 있는 쪽에 걸어 보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렇게 해 줘. 그럼 나도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서 뭔가 생각나면 말해 주도록 할게."
"알겠어요, 그럼."
말을 마치고 막 백아린이 움직이려 할 때였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아 참, 그들이 내게 전수했던 무공이 있는데 그것의 출처도 알아낼 수 있겠어? 사라진 무공들이라 쉽진 않겠지만 혹시 이게 단서가 될지도 모르니까."
"물론이죠. 모든 정보는 그런 자그마한 단서에서 시작되는 거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말했다.
"자령신공(紫靈神功), 그리고 잔마폭멸류(殘魔爆滅流)야."
천무진의 얼굴을 녹아내리게 만들고,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느끼게 했던 두 개의 마공.
완벽하지 못한 탓에 마공이 되어 천무진을 망가트렸던 바로 그 무공들이다.
모두가 실전되어 이제는 전설로 내려오는 두 가지무공에 대한 의뢰.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백아린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녀가 급히 물었다.
"잠깐만요. 잔마폭멸류라뇨? 전대의 고수인 풍운무정검(風雲無情劍)의 잔마폭멸류를 말하는 거예요, 지금?"
풍운무정검은 무려 백 년도 더 전의 인물이다.
그는 정파의 후기지수로 순탄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마교도들로 인해 가족을 잃었다. 그 이후에 돌변한 그는 소속되어 있던 문파를 떠나 단신으로 마교도들과 싸움을 벌여 댔다.
당시 마교의 모든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무인.
그것이 바로 풍운무정검이었고, 그런 그의 절초가 다름 아닌 잔마폭멸류였다.
놀라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런데 그게 왜?"
물어 오는 질문.
그렇지만 백아린은 너무도 놀라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잔마폭멸류가 그들의 손에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렇게 찾아도 찾지 못했던 거고……."
뭔가 심각해 보이는 모습에 천무진은 잠시 입을 닫고 그녀가 냉정을 찾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차린 백아린이 가만히 서 있는 천무진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잠시 넋이 나갔었나 봐요."
"괜찮아. 그보다 지금 이 반응이 더 궁금한데."
평소와 다른 모습에 천무진이 물었고, 백아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드러내는 걸 감수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는 충격적이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녀가 말했다.
"그거 알아요? 풍운무정검이 어떤 검을 사용했는지."
물어 오는 백아린의 질문에 천무진은 고개를 저었다.
풍운무정검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자도 아니고, 그리 많은 정보가 없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것이었다.
백 년도 더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이름이 전해질 정도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무인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모른다는 천무진의 반응에 백아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명을 이어 나갔다.
"풍운무정검의 목적은 마교도들을 죽이는 거였어요. 그는 대부분 혼자 싸웠고, 수많은 적들을 상대해야 했죠. 그랬기에 그의 무공은 폭발적인 힘을 지녔어요. 다수를 일격에 쓰러트려야 했으니까요. 그런 풍운무정검이 싸우는 모습을 본 이들은 이렇게 말했었대요."
백아린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태양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대검을 든 한 마리의 맹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