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회담 ― 원하는 것이 같으니까요 (2)
하얀 백의에 긴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노인 한 명이 사천성 성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간단한 짐 하나만 챙긴 채로 이곳까지 꽤나 먼 거리를 달려온 노인은 북적거리는 이들을 가볍게 둘러봤다.
그가 중얼거렸다.
"거참, 이리도 사람 많은 곳은 오랜만이군그래."
한동안 숨어 지낸 노인에게 이곳 성도의 북적거림은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잠시 길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가 걸음을 옮겨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삐 움직이던 노인이 멈추어 선 곳은 성도 한쪽에 위치한 화연관이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다관(茶館)이었다.
화연관은 크기는 작았지만 차를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는 제법 소문난 명소였다.
각양각색의 차를 파는 곳으로, 쉽사리 접하기 힘든 종류의 것들 또한 화연관에서는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었다.
화연관에 들어선 노인은 빈자리에 앉아 용정차를 주문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노인의 앞으로 향을 가득 머금은 찻잔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볍게 용정차의 향을 맡던 노인은 이내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댔다.
뜨거운 찻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고, 노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중얼거리던 그가 이내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삐 오가는 이들을 바라봤다. 그러던 중 노인의 시선이 한 명에게 틀어박혔는데, 이곳 다관에서 일하는 젊은 사내였다.
허리춤에 붉은 장식이 된 끈을 매고 있는 사내를 향해 노인이 말을 걸었다.
"이보게."
"뭐 더 주문하실 거라도 있으신지요?"
미소와 함께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노인이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말 좀 전해 주게. 내가 왔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묻는 사내를 향해 노인이 서찰 한 장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진균이 찾아왔다, 그리만 전하면 알 걸세."
진균이라는 이름에 젊은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이름을 지닌 이가 누군지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의선 진균.
그가 이곳 성도에 나타난 것이다.
의선이 화연관에 찾아온 이유는 바로 서찰에 적혀 있는 연결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연결책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사내였던 것이다.
사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모시겠습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 * *
새로운 정보의 확인차 적화신루의 성도 거점을 찾아갔던 백아린은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그토록 찾고 있던 의선이 직접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온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백아린의 표정을 본 천무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얼마 전에 제가 한 말 기억해요? 좋은 소식 하나 전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요."
"기억하지. 뭔지는 말 안 해 주고 그런 식으로 사람 궁금하게만 만들어 놨었잖아."
적화신루의 임시 총회를 떠나기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천무진이 대꾸했다.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백아린이 말을 받았다.
"맞아요. 그때 말씀드리지 못했던 그 좋은 소식을 이제는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뭔데 그 좋은 소식이."
"사실 찾던 사람이 한 명 있었거든요. 오랫동안 모습을 감춘 인물이라 찾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운 좋게 정보가 들어와서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어요."
"그게 누군데?"
"의선이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천무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의선이라니?
갑자기 왜 그를 찾았단 말인가. 거기다가 그게 왜 좋은 소식인지…….
순간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천무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입을 열었다.
"자모충?"
"맞아요. 적면신의가 다루고 있던 그 벌레요."
고아들을 상대로 벌이던 잔혹한 실험.
사람을 조종할 수 있게 만든다는 자모충이라는 벌레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는 특이한 종류의 것이었다. 허나 그건 일반인인 자신들에 한해서다.
다른 이도 아닌 의선이라면?
자모충에 대해 뭔가를 알거나, 아니면 이것에 당한 이를 치료하는 법을 알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처음 무림맹에 들어와 캤었던 홍천관 관주 금호를 통해 얻은 것들에 대해서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무진이 물었다.
"의선이 어디에 있지?"
"적화신루의 연락을 받고 곧바로 이곳 성도에 들어오신 모양이에요. 지금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는데 어떻게 할래요?"
물어 오는 백아린의 질문에 천무진이 곧바로 옆에 세워 두었던 천인혼을 집어 들며 말했다.
"뭐 해? 빨리 가자고."
서두르는 천무진의 모습에 백아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선을 만나기 위해 천무진은 곧장 거처를 박차고 움직였다.
그런 그의 옆에는 백아린과 한천, 그리고 단엽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네 사람이 향하는 곳은 의선이 도착했던 다관인 화연관이었다. 성도 내에 위치한 다관이었기에 도착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아린과 한천이 모습을 드러내자 두 사람을 알아본 사내가 빠르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그분은?"
물어 오는 백아린의 질문에 사내가 안쪽을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안쪽에 계십니다."
대답과 함께 사내가 안쪽으로 향하는 통로에 있는 자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는 곧바로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의선이 어디 있는지 확인한 백아린은 곧장 그쪽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 또한 빠르게 그녀를 뒤따랐다.
열린 문을 통해 드러난 장소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나름 이곳저곳에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다.
조경에 공을 들여 꽃과 풀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장소의 한쪽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삥 둘러져 있는 돌 위에 한 명의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얀 백의에 긴 수염을 늘어트린 선한 인상의 노인.
의선 진균이 그곳에 서서 물 안에서 노닐고 있는 물고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못 안을 응시하던 그가 사람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슬며시 시선을 돌려 입구를 통해 들어온 일행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네 명의 인물.
허나 그중 천무진이 누구인지 의선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직접 마주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천무진의 사부이자 천룡성의 진짜 주인인 천운백 때문이다.
그가 제자인 천무진에 대해 얼마나 떠들어 댔는지,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거참. 누가 천 대협의 제자분인지 바로 알겠습니다.’
피식.
스스로도 기가 막혔는지 의선이 웃음을 흘렸다.
이들 사이에 거리가 좁혀질 무렵 의선이 먼저 천무진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의선 진균이 천룡성의 작은 주인을 뵙습니다."
"의선을 뵙습니다."
천무진 또한 포권으로 그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포권을 푼 의선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듣던 그대로시군요."
"저 말입니까?"
"예, 천 소협에 대해 꽤나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덕분에 처음 뵙는데도 불구하고 단번에 네 분 중 누가 천 소협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사실 들어온 건 네 사람이었지만 애초에 백아린과 한천은 헛갈릴 대상이 아니었다.
백아린은 여인이었고, 한천은 나이 대가 맞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단엽만이 천무진으로 혼동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뛰어난 외모나, 비슷한 나이 대를 지녔으니 말이다.
의선의 말에 천무진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제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으셨다는 겁니까?"
이번 생에서 천무진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 의선이 말하는 것처럼 꽤나 많은 이야기를 들을 법한 뭔가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천무진의 질문에 의선이 답했다.
"천룡성의 작은 주인에 대해 누구에게 들었겠습니까? 당연히 천운백 대협이시지요."
천운백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천무진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사부의 이름 때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천무진이 물었다.
"제 사부님을 아십니까?"
"그럼요, 얼마 전까지 같이 있었는걸요."
"같이 있었다고요? 설마 지금도 같이 오신 겁니까?"
말을 내뱉으며 천무진은 다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던 고아인 자신을 받아들여 준 사람.
너무도 그리웠던 사부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천무진의 마음이 울렁였다.
허나…….
"아닙니다. 이곳에는 저 혼자 왔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에 천무진의 표정에 실망감이 맺혔다. 허나 이내 표정을 빠르게 지워 낸 그가 물었다.
"그럼 어디에 계신지는 아십니까?"
"얼마 전까지는 제 거처에 같이 계셨는데 뭔가 할 일이 있으시다며 떠나셨습니다."
"만날 수 있는 방도가 없을까요?"
"제자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그분이 마음먹고 움직이셨다면…… 찾는 건 어렵지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천운백이라는 이의 뒤를 쫓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뛰어난 무인이었으니까.
찾을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표정을 일그러트린 천무진을 향해 의선이 말했다.
"그리 찾지 않으셔도 언젠가 때가 되면 그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실까요?"
"하지만 지금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사부님을 만나서 말씀드려야 할 것들이……."
그 순간 웃는 얼굴로 의선이 입을 열었다.
"그분이 모르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진 의선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절 이곳에 보낸 것이 바로 천 대협이십니다."
"사부님이 말입니까?"
"예, 적화신루가 긴 시간 모습을 감춘 저를 이토록 쉽게 찾을 수 있던 이유가 뭐겠습니까? 천 대협이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이지요. 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입니다."
적화신루의 정보력이라면 결국 의선을 찾아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 몇 달, 어쩌면 몇 년 이상은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만큼 완벽하게 무림에서 몸을 감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헌데 고작 며칠 만에 그들에게 자신의 정보가 들어갔다.
이 모든 건 천운백이 직접 손을 썼기 때문이었다.
놀란 듯 서 있는 천무진을 향해 의선이 말을 이었다.
"그분이 정보를 흘리셨다면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아마도 제자이신 천 소협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은데 말입니다."
천무진의 머리는 복잡했다.
의선의 말대로다.
굳이 천운백이 적화신루를 위해 의선을 찾아 줬을 리는 없으니까.
천운백이 적화신루에게 의선의 정보를 흘렸다는 건 곧 천무진에게 그가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지금 자신의 행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는데…….
‘하아,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군요.’
사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았다.
헌데 그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뭔가를 위해 움직이고만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천운백은 결코 의미 없는 행동을 할 사내가 아니었다.
사부를 직접 만나지 않고서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애써 머리에 지우고 있는 그때, 의선이 물었다.
"그럼 적화신루를 통해 절 그토록 찾은 연유에 대해 물어도 되겠습니까?"
"의선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이번엔 백아린이 나서며 말했다.
그녀를 향해 슬쩍 시선을 준 의선이 물었다.
"그쪽은 누군가?"
"아, 인사가 늦었네요. 적화신루 사총관 백아린입니다."
"부총관 한천입니다."
뒤편에 있던 한천 또한 인사를 건네자 시선은 자연스레 마지막에 남아 있는 단엽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단엽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단엽."
"호오.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 조합이군요."
단엽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의 정체를 눈치챈 의선이 천무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사파인 대홍련의 부련주가 함께 움직이고 있고, 그 뒤를 무림맹주가 봐주고 있는 형세다.
그 누구도 아닌 천룡성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잠시 천무진에게 주었던 시선을 백아린에게 다시 돌린 의선이 물었다.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의 승낙이 떨어지자 백아린이 곧바로 물었다.
"혹시 자모충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의선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리고 그 표정만으로 이미 대답은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의선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갑자기 자모충에 대해서는 왜 묻는가?"
"얼마 전에 그 자모충을 가지고 이상한 짓을 벌이는 자를 잡았거든요."
"뭐? 자모충을? 대체 누가?"
놀란 듯 되묻는 그를 향해 백아린이 답했다.
"적면신의입니다."
누군가가 자모충을 가지고 이상한 일을 벌인다는 사실에 놀랐던 의선의 얼굴이 이번에는 크게 일그러졌다.
어찌 그를 모를 수 있겠는가.
실력은 의선이나 마교의 마의에 비해 다소 부족함이 있었지만, 중원의 삼대의원으로 손꼽히던 자다.
실제로 마주했던 적도 있었기에 적면신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의선이었다.
의원이었지만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끼던 자였다.
그랬기에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의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후우, 그놈이 결국 사고를 쳤군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