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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26화 (126/293)

126화. 위기의식 ― 그럴 리야 없겠지 (2)

개방 방주 장량과 적화신루 루주의 만남은 대내외적으로 비밀로 정해져 있었다.

약속된 장소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은 각 세력당 단 두 명.

장소와 시간을 적화신루 쪽에서 먼저 제안했고, 그중에서 가장 괜찮은 걸로 장량이 선택해 답신을 한 상태였다.

그렇게 정해진 두 세력 간의 만남.

오늘의 약속 장소로 정해진 곳은 사천성 성도에서 조금 벗어나 북쪽으로 가다 보면 있는 자그마한 가옥 한 채였다.

가옥은 오랫동안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는지 외부는 엉망이었지만 내부는 조금 달랐다.

오늘의 만남을 사전에 준비해서인지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다소 특이한 점은 한쪽에 검고 두터운 천이 길게 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백아린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사전에 준비한 물건이었다.

적화신루의 루주로 장량과 마주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체를 드러내 줄 생각은 없었다.

정체를 감추고 장량을 마주할 생각이었기에 이 가옥에 먼저 도착한 건 백아린이었다. 그녀가 한천만을 대동한 채 가옥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준비된 공간에서 백아린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흠흠."

가볍게 목을 가다듬는 그녀의 입에서 놀랍게도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걸쭉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아린이 옆에 자리하고 있는 한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총관 내 목소리 어때?"

"완벽합니다."

백아린 정도 되는 무인에게 목소리를 바꾸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렇게 시야를 완벽히 가리는 천막까지 자리하고 있으니 장량 또한 직접 마주한다 해도 그 상대가 백아린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할 것이다.

백아린의 준비가 끝나자 이번에는 한천이 가져온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가장 먼저 입 부분을 가릴 만한 검은 복면을 썼고, 그걸로 모자랐기에 죽립을 써서 얼굴 대부분을 가렸다.

한천까지 얼굴을 가려야 하나 다소 고민을 하긴 했지만 이런 중요한 자리에 루주의 호위로 그가 나온다는 사실도 조금 이상해 보였고, 혹여나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게 낫다 판단하여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바꾼 채로 한천이 입을 열었다.

"아아, 이 정도면 될까요?"

"평소 까불거리는 목소리보다 훨씬 좋은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제 원래 목소리가 훨씬 낫죠."

억울하다는 듯 한천이 곧바로 대꾸했다.

하지만 백아린은 못 들은 척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받았다.

"됐고, 나가서 먼저 자리나 잡고 있어. 손님 받을 준비 해야지."

"벌써요?"

"우리도 빨리 왔잖아. 그쪽도 뭔가 생각이 있을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나타나면 곧바로 이곳으로 모셔 오도록 하죠."

"부탁할게."

"그럼 이만."

말을 마친 한천이 빠르게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약속 시간까지는 무려 한 시진 이상 남아 있는 상황, 그렇지만 백아린은 모든 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약 반 시진 가까이가 지났을 무렵 가옥의 입구 쪽으로 두 명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걸어오는 이는 바로 개방의 방주 장량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쫓는 다소 사나운 인상의 거지는 종삼(鍾三)이라는 이름을 지닌 개방의 분타주 중 하나였다.

헥헥거리며 뒤쫓는 종삼을 향해 장량이 말했다.

"이놈 종삼아, 뭐 이리도 느리냐."

"아니 제가 느린 게 아니라 방주님이 급히 가신 거 아닙니까. 약속 시간이 이리도 남았는데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하여튼 누가 거지 아니랄까 봐 게을러 빠져 가지고. 약속 시간에 딱 맞춰 가는 게 어디 예의겠느냐. 먼저 가서 기다리고 할 줄도 알아야지."

"참내, 언제부터 예의가 있으셨다고……."

"뭐라고?"

허리춤에 찬 타구봉을 어루만지며 묻는 장량의 모습에 종삼이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별말 안 했습니다."

"분명 들었는데."

"나이를 들어서 헛것을 들으셨겠죠."

"그런가? 그런데 나이를 드니까 이상하게 자꾸 몸이 찌뿌둥하단 말이지. 어디다가 좀 풀어야 할 터인데……."

말과 함께 타구봉을 다시금 어루만지는 장량의 모습에 종삼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저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장량이라는 사내가 지닌 광기(狂氣)를 무시할 수 없어서다.

차마 앞에서는 말하지 못했지만 뒤에서 이 사내를 가리켜 개방의 미친개라 부를 정도였으니 그 성격이 오죽 독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종삼과 장난을 치던 장량이었지만 그의 신경이 향해 있는 곳은 뒤쪽에서 다가오는 누군가였다.

그리고 종삼 또한 그 존재에 대해 눈치챘는지 장난스러웠던 표정을 순식간에 지웠다.

그리고 매섭도록 서늘한 표정을 지어 보인 채로 다가오는 상대를 응시했다.

죽립에 복면까지 써서 얼굴을 완벽히 가린 상대.

한천이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척까지 다가선 한천이 발을 멈췄다. 그러고는 이내 바뀐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개방의 방주님이십니까?"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는 그쪽은 누구?"

타구봉을 어깨에 걸쳐 메며 장량이 히죽 웃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개방의 방주냐고 질문을 던졌던 한천은 이내 입을 열었다.

"적화신루의 루주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안쪽까지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래? 루주께서는 생각보다 친절하신 사람인 모양이야."

"그럼 절 따라오시죠."

쓸데없는 말에 휘말릴 생각 없다는 듯 한천은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몸을 돌렸다.

장량이 걸음을 옮기는 한천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가자."

장량의 말에 종삼 또한 그 뒤를 말없이 따라 걸으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종삼뿐만이 아니었다.

수하 한 명만을 대동한 채로 만나게 된 자리.

아무리 약속이라고 해도 개방의 방주인 장량으로서는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며칠 전부터 이곳 인근에 있는 모든 세력들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뭔가 일이 생기는 경우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다행히도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그랬기에 정말 약속대로 단둘이 이곳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안심할 수 없는 상황.

장량 또한 주변에 숨겨져 있는 누군가가 없는지 계속해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가옥.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리고 이 안에서도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선 한천이 짧게 말했다.

"들어오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이거야 원 기대가 되는군. 소문의 적화신루 루주를 만나 뵙게 될 줄이야."

적화신루는 개방보다 그 규모가 훨씬 작았지만 특유의 신비스러움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특히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적화신루의 루주에 대해서는 별별 소문이 다 있을 정도였다.

그런 소문의 당사자를 마주한다는 사실에 장량은 무척이나 설레는 눈치였다.

그렇게 장량이 먼저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을 때였다.

‘음?’

장량의 시선에 자연스레 가옥 내부의 절반가량을 가르고 있는 검은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몇 겹으로 둘렀는지 너무도 새카만 천막은 그 건너를 확인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천막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한 사람의 기척.

성큼 들어섰던 장량이 천막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거야 원,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군요. 늦은 점 사과의 뜻을 전하지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약속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요. 제가 조금 일찍 온 것뿐이니 사과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 생각해 준다면야 저야 고마운 일이지요."

말을 마친 장량은 가옥 내부를 가볍게 훑었다.

천막 너머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는 물건이라곤 그가 앉을 의자와, 앞에 놓여 있는 탁자. 그리고 그 위에 올려 있는 찻잔이 전부였다.

마치 자리에 앉을 것처럼 의자가 있는 곳으로 움직인 장량이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찻잔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면 루주를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거야 원, 보이는 건 새카만 천막뿐이군요."

"아시겠지만 적화신루의 루주는 무림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해해 주시지요."

"뭐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평소 아무리 얼굴을 꽁꽁 감춘다고 해도 이 자리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들만 있는 자리니까요."

"뜻은 알겠지만 이것이 저희의 규칙입니다."

담담하게 백아린이 답했을 때였다.

찻잔을 어루만지던 장량이 그것에서 손을 떼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렇게 천막을 놓고 대화를 하면 마치 저만 벌거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말을 마친 그가 갑자기 천막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어디 얼굴 한 번 봅시다."

검은 천막을 움켜쥔 손이 막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스윽.

귀신처럼 다가온 한천의 손이 장량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에 들어선 직후부터 계속해서 한천을 견제하고 있던 종삼은 대응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감히 어딜……!"

뒤늦게 놀란 종삼이 달려오려 할 때였다.

장량이 손을 들어 올리며 수하인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상대를 응시했다. 깊게 눌러 쓴 죽립과 입을 가린 복면 때문에 얼굴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자는 누구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자신의 손목을 움켜잡는 움직임, 그리고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자신이 데리고 온 종삼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순간 천막을 거두려 했던 장량의 손을 쥔 한천이 차갑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못 들어가십니다."

너무도 확고한 목소리에 장량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개방 방주인 나라도?"

"무림맹주님이 오셔도, 마교의 교주님이 온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이 너머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말과 함께 여전히 서늘한 기운을 풍겨 대는 한천의 모습에 장량은 직감했다.

이 검은 천막을 걷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이자는 결코 죽기 전까지 이 천막을 거두는 걸 용납할 상대가 아니었다.

장량은 쓴 입맛을 다셨다.

‘치잇, 이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는데.’

사실 장량 또한 정말로 이 천막을 벗기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벗길 수 있다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도의 생각을 한 채 이 같은 행동을 벌였다.

뭔가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건 기 싸움 정도일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걸 통해 상대들의 실력을 파악하고 또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 알아내서 대화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려던 계획이었던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될 거라 생각했거늘, 아쉽게도 그런 장량의 계획은 초장부터 완전히 어그러졌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오고, 그걸 자신이 받아쳐 버린다면 결국 가벼운 기 싸움 정도로 끝나지 않을 일이 된다.

그렇다면 두 세력 간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건데…….

개방이 적화신루에 비해 훨씬 큰 건 사실이었으나, 지금 이들과 다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만큼은 적화신루에게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분명한 이유가 하나 존재했다.

바로 천룡성이다.

그들이 적화신루의 뒤에 있거늘, 이런 이유만으로 두 세력 간의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량은 물러날 때와 나설 때를 아는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여기서 조금 더 자존심을 세웠다가는 오히려 물러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아무런 것도 얻어 내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긴 했지만 장량은 천막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가 천막을 놓자, 마찬가지로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한천 또한 손을 풀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한천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결례를 용서하시길."

"아니야, 됐어. 먼저 예의 없이 군 건 이쪽이니 사과는 내가 해야지."

말을 마친 장량은 오히려 천막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적화신루 루주로 이곳에 온 백아린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다소 격한 행동이었다면 용서하시지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빠른 사과에 천막 건너에 있던 백아린의 눈동자가 빛났다.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야.’

개방이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있는 방주로서 선뜻 사과를 하는 일이 쉬운 건 아니었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빠르게 사과를 건넨다는 것. 그건 상대가 생각보다 냉철한 머리를 지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천막으로 가려져 있긴 하지만 이미 건너편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던 그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할 수 있었던 건 역시나 한천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가 천막을 걷지 못하게 할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백아린이 담담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리 사과해 주시니 이해하겠습니다. 먼 길 오셨을 텐데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천막에서 떨어진 장량은 곧바로 자신의 의자로 돌아와 그곳에 착석했다.

자리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장량의 시선은 여전히 천막 옆에 자리하고 있는 한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이 데리고 온 종삼은 개방에서도 알아주는 고수다.

그런 그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의 실력자가 적화신루에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일전에 백아린을 총관으로 만났을 때도 그녀의 능력을 탐냈던 장량이다. 그리고 그 이후 오늘 만난 한천까지.

물론 당시에 만났던 이들과 오늘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같았지만 장량으로서는 그걸 알 방도가 없었다.

생각보다 적화신루로 인해 놀랄 일들이 많았다.

장량이 입을 열었다.

"적화신루에 저런 실력 있는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군요."

그런 장량의 말에 천막 너머 앉은 백아린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답했다.

"저희 적화신루엔…… 생각보다 능력 있는 이들이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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