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이야기 ― 도와줄까 (2)
웃고 있던 반조가 놀란 얼굴로 백아린을 바라보고 있는 주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 내가 도와줄까?"
이렇게 된 상황에서 자신이 도와주냐고 묻는 반조의 모습에 주란은 짜증이 확 치밀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게 물어보고 정할 일이야?"
"네 자존심이 워낙 세니까. 도와줬다가 욕먹으면 그게 무슨 억울한 일이냐?"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는 반조의 모습에 주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닥치고 빨리 죽여!"
"예예, 그러죠."
어깨를 으쓱하며 반조가 순식간에 주란의 옆에 다가와 섰다.
그 틈에 백아린은 재차 눈으로 들어가려는 피를 소매로 닦아 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시선은 지금 막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상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타격이 좀 있긴 했지만, 거동을 하는 데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싸움을 이어 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문제는…….
‘저 여자보다 훨씬 귀찮은 자야.’
반조는 주란과 마찬가지로 십천야 소속이었지만 무공 쪽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는 자였다. 그 말은 곧 같은 십천야라고 해도 실력 면에서는 주란보다 훨씬 위라는 소리다.
대검을 든 채로 성큼 다가오는 백아린을 보며 반조가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야? 안 도망쳐?"
주란에 이어 자신까지 나타났다.
제법 위력적인 일격까지 허용했으니 당연히 이 싸움을 피하기 위한 움직임부터 보일 거라 여겼거늘 오히려 상대방이 덤빌 것처럼 다가오자 반조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말을 백아린이 가볍게 받아쳤다.
"도망은 그쪽이 쳐야지. 그게 너희들 전문 아닌가?"
백아린의 말에 한 방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이마를 감싸 쥔 반조가 괴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런, 아니라고 하고 싶긴 한데…… 하필 막 이전에 그런 전적이 있으니 아니라고 할 수가 없네."
슬쩍 주란을 확인하며 반조가 대꾸했다.
그런 눈길에 주란의 표정이 붉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이 맞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나타나긴 했지만 꽤나 오랫동안 숨어 자신의 행동을 살펴봤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도망치려 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 없던 반조가 알 리 없지 않은가.
주란의 앞으로 나서며 백아린의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한 채로 반조가 입을 열었다.
"제법이야. 십천야 내에서도 너 같은 녀석은 찾기 어려운데……."
무공 실력도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저 모습이 무척이나 유쾌했다.
여유 가득한 반조를 향해 백아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굳이 그쪽이 뭘 찾고 그래. 다 데리고 오면 알아서 내가 판별해 줄게. 개중에 누가 제일 강했는지. 물론 모두가 죽을 테니 그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자도 안 남겠지만 말이야."
"푸하하하!"
백아린의 말에 반조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로 웃어 젖히는 그를 뒤편에 있는 주란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대체 뭐가 저리도 좋다고 웃어 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나 그런 주란의 시선은 신경조차 쓰지 않던 반조가 이내 힘겹게 웃음을 멈추며 말을 이었다.
"하하! 진짜 많이 아깝네. 너 같은 녀석 싫어하지 않거든.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는 법이니까."
말과 함께 반조가 손을 가볍게 흔들자 그의 손바닥 안으로 섭선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촤악!
섭선을 펼친 반조가 슬그머니 말했다.
"일전에 천무진을 만나고도 그냥 보내 줘야 해서 좀 아쉬웠는데 말이야. 그 아쉬움 네가 달래 주라고."
반조의 말에 백아린은 천무진이 말해 줬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일전에 자리를 비웠을 때 자신들이 찾는 그들과 연관된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내용의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그자의 이름까지도 떠올려 냈다.
"당신이 반조군."
"어라? 내 이름을 알아 주다니 영광이네."
"열심히 찾았거든. 그런데 여태까지 못 찾았어. 대체 어디 숨어 있나 했더니 꽤나 가까이 있었네."
적화신루의 정보망으로도 전혀 흔적을 찾지 못했던 자다.
백아린은 대검을 보다 강하게 쥐었다.
호언장담을 내뱉긴 했지만 사실 알고 있다.
이 싸움, 그리 유리하진 않다는 것 정도는.
반조 하나라면 모를까 옆에는 주란이 남아 있다. 최고의 상태는 아닐지라도 결코 얕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최악의 경우 둘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백아린과 마주하고 있던 반조는 그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투기를 느끼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섭선을 쥔 손바닥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
천무진과는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기에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허나 지금을 달랐다.
‘대체 이런 느낌을 받아 본 게 얼마 만이지?’
누군가를 앞에 둔 상황에서 긴장을 한다는 건 실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강한 상대라는 의미였으니까.
그 상태에서 반조가 막 섭선에 내력을 불어넣고 있는 그때.
휘유유웅!
그리 유쾌하지 않은 소리가 반조의 귓가에 울렸다.
새벽하늘을 가르는 그 자그마한 소리에 흥분한 얼굴로 섭선을 들어 올리고 있던 반조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그가 갑작스레 투기를 거뒀다.
돌변한 상대의 모습에 백아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때였다.
깊은 한숨과 함께 반조가 입을 열었다.
"하아, 이런. 정말 그쪽 말대로 되어 버렸네."
"그게 무슨……."
"방금 그 소리 들었지? 내 수하가 보낸 신호거든. 그리고 이 신호가 터져 나왔다는 건 지금 당신의 아군들이 오고 있다는 소리고. 당신 하나도 좀 어려운 상대인데 거기다 천무진에 단엽까지 끼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천룡성의 비밀 거점과는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싸움의 소리를 듣고 온 건 아닐 터.
대체 어떻게 백아린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이리 움직인 건지 의문이지만…… 지금 반조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 신호가 나왔다는 건 시간에 그리 여유가 있지 않다는 의미였으니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반조가 말을 이었다.
"당신 말대로 이번엔 도망쳐야 될 것 같네."
"누가 순순히 보내 준대?"
"뭐 그냥은 힘들겠지. 하지만……."
말과 함께 반조가 허공으로 몇 번 손을 휘젓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 이내 멈춰진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새카만 단환들이 가득했다.
반조가 그 단환들을 든 채로 웃었다.
"난 이 녀석보다 준비성이 철저해서 말이야. 벽력탄은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돼. 이건 도망치기 위해 만든 물건이라 단순하게 연기만 피어오르거든."
주란은 벽력탄으로 간단하게 시야를 가리는 정도로 만족했지만 지금 반조가 들고 있는 저것들은 달랐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연기가 피어오를 테고, 저 정도 고수라면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찰나의 순간 거리를 벌리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걸 알기에 백아린은 슬쩍 발을 반 보 앞으로 내디뎠다.
가능만 하다면 저 단환을 사용하기 전에 손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조가 손을 다급히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어이어이! 거, 생각이 다 보이거든? 내 손이라도 날려 볼까 하는 모양인데 좀 참아 달라고. 우리한텐 다음 기회라는 게 있잖아."
말과 함께 반조가 빠르게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단환들을 터트렸다.
팍!
이대로 보낼 순 없다는 생각에 백아린이 빠르게 그쪽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부웅!
빠르게 피어난 안개가 일순 밀려 나갔지만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그곳에 있었던 반조와 주란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순간 백아린이 비틀했다.
단순하게 안개만 피워올리는 물건이 아닌 듯싶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주변의 풍경들이 일그러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덩달아 살짝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지금 이 상황을 꿈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백아린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안개만 피어오른다더니 그것부터가 거짓말이었네.’
허탈한 표정으로 백아린이 위를 올려다봤다.
안개 때문에 쉽사리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하늘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에 보인다고 해서 그것 또한 모두 진짜가 아니었다.
기가 차다는 듯 그곳에 서 있던 찰나 갑자기 백아린의 시선에 안개를 헤치며 다가서는 누군가가 들어왔다.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는 바로 천무진이었다.
백아린은 다가오는 천무진을 바라보며 갸웃거렸다.
과연 저것도 가짜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천무진의 모습을 한 그 뭔가도 백아린을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치켜뜨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목청껏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백아린!"
그리고 마침내 거리가 좁혀지고 그 두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백아린은 알 수 있었다.
이자는 진짜라는 걸.
천무진이 백아린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어이! 괜찮아?"
피투성이가 된 얼굴과 엉망이 된 모습에 천무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백아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다 잡았는데…… 놓쳤네요."
"이런 상황에 미안하다는 말이 나와?"
천무진의 시선에 백아린의 이마에 진득하게 묻어 있는 피가 들어왔다.
거기다 곳곳에 입은 상처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느낀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그를 만났어요."
"그라니?"
"당신이 말했던 반조라는 이름의 그자요."
"그놈하고 싸운 거야?"
"아뇨, 그러기 직전이었는데…… 당신이 나타날 걸 알아차리고 도망치더군요. 전 다른 자들을 상대했어요. 여인이었고, 그 반조라는 자와 동료인 듯했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천무진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지금 이 말대로라면 그녀는 두 명이나 되는 그들과 마주했다는 의미였으니까.
천무진은 직접 반조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랬기에 안다.
그가 얼마나 위험한 자인지를.
그 순간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물었다.
"그런데 제가 위험한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어떻게 알긴. 치치 덕분이지."
"아……."
그제야 백아린은 알 수 있었다.
처음 싸움이 시작된 직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소매 속에 있는 치치를 뒤편으로 물러나 있게끔 했다. 그런데 치치는 그 틈을 이용해 거처로 돌아가 그곳에 있는 이들에게 백아린이 위험하다는 걸 알렸던 모양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 혼자예요? 부총관하고 단엽은요."
"오는 도중에 이상한 놈들을 발견해서 그쪽에 먼저 붙었어. 나만 급히 이쪽으로 왔고."
"아…… 아마 반조에게 신호를 보냈던 이들이겠군요."
두 사람은 어딘가에 숨어 천무진 일행이 오는 걸 알렸던 그들을 뒤쫓은 모양이다.
그 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백아린이 잠시 숨을 골랐다.
사실 고민했다.
이것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할지 말지를.
그에 대해서는 항상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던 그녀다. 허나 이번 건 조금 달랐다.
그랬기에 백아린이 결국 마음의 결단을 내린 채로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만난 자한테서 이상한 말을 하나 들었거든요. 그런데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말이라서요. 물어봐도…… 돼요?"
조심스러운 그녀의 질문.
천무진이 백아린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아무런 것도 묻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천무진이다.
그랬기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을 받았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어려운 듯 잠시 머뭇거리던 백아린이 이내 물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질문이라는 건 알아요.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그래도 이왕 말을 꺼냈으니 물어볼게요. 아니면 그냥 제가 미친 사람 한번 되고 말죠, 뭐."
숨을 내쉰 그녀가 이내 천무진을 똑바로 바라본 채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죽은 적이 있어요?"
물어 오는 백아린의 질문에 천무진이 움찔했다.
사실 거짓말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증거도 없었고, 오히려 죽었다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대답을 하는 게 더 우스웠으니까.
굳이 진실을 말할 이유가 없음을 잘 알았지만 천무진은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마주하고 있는 백아린의 시선 때문이었다.
천무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자 괜스레 무안했는지 백아린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죠? 제가 그들한테……."
"……맞아."
"네?"
놀란 듯 눈을 치켜뜨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 채로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있다고. 죽어 본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