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안건 ― 전혀 (1)
천룡성의 비밀 거점에서 약 세 시진가량 경공을 펼치면 도달할 수 있는 마을, 유춘(有春).
유춘은 그리 큰 마을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경관과 여러 볼거리들로 꽤나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덕분에 이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객잔이나 여타의 장소들 또한 외지인들로 가득했다.
그런 유춘의 수많은 인파 속.
그 안에 백아린과 한천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천은 얼굴을 드러내 놓고 있는 반면, 백아린은 죽립을 쓴 상태였다.
두 사람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오늘 이곳 유춘에서 적화신루의 총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해가 지기 조금 이른 시각.
그렇지만 이미 유춘의 번화가는 사람들로 꽉 차 발 디딜 틈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사람들 틈에서 움직이며 한천이 불만을 토해 냈다.
"사람들이 뭐 이리 많답니까."
"여기 사람 많은 게 하루 이틀 일인가. 투덜거릴 시간 있으면 빨리 길이나 좀 뚫어 봐."
백아린의 말에 한천은 길을 막고 서 있는 이들 사이에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좀 지나 갑시다!"
한천이 곳곳에 있는 노점을 이용하는 이들 사이에 길을 만들어 준 덕분에 백아린은 보다 수월하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북적이는 번화가를 지나 마침내 한숨 돌릴 정도의 여력이 생겼을 무렵, 마침내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꽤나 커다란 장원이었는데 인근에서 알아주는 거부인 양관(楊貫)이라는 자의 거처였다. 항상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보니 입구는 문전성시를 이뤄 댔고, 그건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에 선 채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던 백아린이 이내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에게 슬쩍 명패를 내비쳤다.
그녀가 짧게 말했다.
"초대를 받았어요."
건넨 명패를 확인한 자는 백아린의 얼굴조차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드시죠."
말과 함께 그가 누군가에게 수신호를 보냈고, 그러자 뒤편에 있던 자가 둘에게 다가왔다.
"안내하겠습니다."
말과 함께 그자는 장원 안에 있는 어떤 장소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리고 이내 어딘가 깊숙한 곳에 이르러서야 사내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이 안입니다."
"고마워요."
백아린이 짧은 말을 끝내고 곧바로 앞에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꽤나 넓은 공터, 그리고 수십여 개의 방이 준비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안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을 확인한 백아린은 그제야 눌러쓰고 있던 죽립을 풀었다.
스르륵.
죽립은 벗은 그녀가 주변을 둘러봤고, 이내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오셨소, 사총관."
인사를 건네는 인파들 중 가장 먼저 다가온 건, 적화신루의 일총관이자 백아린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진자양이었다.
그를 향해 백아린 또한 포권으로 답했다.
"잘 지내셨지요?"
"물론이오. 그나저나 이렇게 금방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총회가 끝나고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던 차에 급히 열리게 된 임시 총회, 그 이유는 바로 백아린의 요청 때문이었다.
백아린이 물었다.
"회의는 언제쯤 시작될까요?"
"아직 몇몇이 오지 않기도 했고, 루주님도 모습을 드러내시려면 한 시진 정도는 더 걸릴 것 같소. 시간이 좀 남았으니 배정된 방으로 가서 쉬다가 오면 되오. 저쪽으로 가면 방에 명패가 걸려 있을 테니 찾는 게 그리 어렵진 않을 게요."
"네, 그럼 이따가 다시 뵐게요."
사전에 오래 대기를 할 인원들을 위해 각자의 방을 배정해 두었고, 당연히 사총관인 백아린이 쉴 곳도 준비되어 있었다.
짧은 대화를 마친 채로 백아린과 한천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천이 잘됐다는 듯 길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하암, 피곤했는데 총회 시작 전까지 눈 좀 붙여야……."
말을 내뱉고 있던 한천은 이내 뭔가를 발견했는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자신들이 가는 길목의 한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장소.
몇몇 이들이 앉아 차를 즐기고 있는 그곳에 유쾌하지 않은 얼굴이 보여서다.
육총관 어교연과, 그녀의 부총관 경패였다.
혹여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까 황급히 입을 닫은 것이다.
그때, 거의 동시에 둘을 발견한 백아린의 눈초리가 슬며시 꿈틀거렸다.
이틀 전 있었던 천무진과 어교연의 만남 때문이다.
당시 어교연은 비밀리에 천룡성과 관련된 모든 일을 자신이 취하려 손을 썼었다. 물론 그 제안은 천무진의 매몰찬 거절로 끝났지만 말이다.
평소였다면 귀찮아 피했던 상대, 허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백아린이 오히려 어교연이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자 자신들을 발견할까 서둘러 하던 말도 멈추었던 한천이 식겁해서 입을 열었다.
"대, 대장. 거기에는……."
"어라? 육총관님이시네요."
다가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먼저 어교연을 향해 말을 거는 백아린의 모습에 한천이 표정을 구겼다.
‘뭐 잘못 드셨나.’
평소 같지 않은 모습에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였다.
백아린을 발견한 어교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뜩이나 이틀 전 천무진에게서 백아린과 비교당하며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그녀다. 그런 상황에서 보고 싶지 않은 당사자를 마주하자 짜증이 팍하고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에 이 뜨거운 찻물이라도 확 끼얹고 싶었지만…….
어교연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반가운 척 입을 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반가운 얼굴들이네."
백아린과 한천을 번갈아 보며 말하는 어교연의 말투는 싸늘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백아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겠어요. 담당하시는 구역에서 여기까지 꽤 멀죠?"
마치 놀리는 것 같은 말투에 어교연은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그녀가 답했다.
"그러게요. 중앙 지역에서 했으면 조금 더 편했겠지만…… 어쩔 수 없죠, 루주님이 내리신 명령이니까요."
백아린은 모든 총회를 자신이 있는 곳과 가까운 곳에서 열어 달라는 청을 했었고, 그걸 가짜 루주는 승낙했다.
어교연은 그 사실이 불만스럽다는 사실을 슬쩍 내비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었다.
루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저번 총회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까지 승낙해 준 루주의 모습을 떠올리자 어교연은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루주에 이어 천무진까지.
둘 모두가 백아린을 선택했다.
대체 왜?
백아린을 바라보는 어교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언제나 그녀에게 밀리는 이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더 뛰어나거늘 왜 사람들은 저 여인을 선택하는 걸까?
어교연이 생각하는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결국 그녀가 참지 못하고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내어 들었다.
"예뻐서 좋겠어요. 그 얼굴 하나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니까."
감추려 했지만 그 말투에서는 숨기기 어려울 정도로 가시가 돋쳐 있었다.
어교연의 그 말에 뒤편에 있던 한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정도를 넘어서는 말이라는 판단이 들어서다.
결국 참지 못한 한천이 입을 열었다.
"육총관님 말씀이 좀 이상하시군요."
"어머, 사총관 기분 나쁘셨으면 미안해요. 다른 뜻이 아니라 얼굴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말이었어요."
그저 칭찬이었다고 둘러대고 있었지만 백아린은 지금 어교연이 내뱉은 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틀 전 있었던 천무진과의 만남.
그 자리에서 매몰차게 거절당한 이유가 자신의 외모 때문이라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마치 그 반반한 얼굴로 천무진을 꼬드긴 것이 아니냐는 듯한 말투. 실력이 아닌 외모 때문에 자신이 밀렸다고 믿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변명을 내뱉은 어교연을 향해 백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칭찬이라고 하시니 저도 오해 없이 그 말 곧이곧대로 들을게요."
"역시 사총관은 성격도 좋으셔."
입을 가리며 웃는 시늉을 해 보이는 그녀에게 백아린이 짧게 말을 이었다.
"저희는 좀 가서 쉴게요. 이따 뵙죠."
막 말을 마치고 두어 걸음을 나아가던 백아린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억지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는 어교연을 향해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참, 그런데…… 얼굴도 쓸 만하지만 그것보다 실력이 더 쓸 만하지 않을까요?"
백아린의 그 한마디에 어교연의 얼굴이 일순 새빨갛게 변했다.
정확하게 뭔가를 짚고 이야기한 건 아니다. 그런데 저 말에서 묘하게 이틀 전 천무진과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 이유는 왜일까?
말을 끝낸 백아린은 여유 가득한 얼굴로 사라졌고, 그만큼 어교연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뭐야 대체? 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행동은. 설마 내가 찾아갔었다는 사실을 벌써 사총관한테 그대로 말한 거야?’
그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사라지는 백아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어교연은 짜증이 나는지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이틀 전에는 천무진에게, 그리고 오늘은 백아린에게.
두 사람에게 연속으로 한 방씩 얻어맞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어교연과 헤어지고 자신들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온 직후 한천이 입을 열었다.
"육총관이 오늘따라 감정 조절을 잘 못 하는데 왜 저런답니까?"
평상시에도 시비를 걸어 대던 그녀다.
하지만 언제나 적정선을 긋고 행동했었다. 추후에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고, 언제나 그 선을 잘 지키며 행동해 왔다.
물론 오늘도 다소 두루뭉술한 말로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놓고 도발을 걸어 대긴 했지만 평소에 비해서는 무척이나 깊게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참지 못하고 나설 정도로 말이다.
무례한 어교연의 행동에 한천은 불쾌해했지만 백아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해가 안 가는지 한천이 물었다.
"아니, 뭐가 그리 좋다고 계속 웃으십니까?"
"……있어. 그런 게."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여전히 웃고 있는 백아린의 모습에 한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 안 나쁘십니까?"
"전혀."
말을 마치고 백아린은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침상 바로 옆쪽에 있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을 이유가 하나 있거든."
해가 조금씩 사라지며 붉은 석양이 유춘이라는 마을을 물들이기 시작할 때였다.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한 회의장에는 곧 수많은 인원들이 자리했다.
워낙 갑작스럽게 정해진 총회고, 시간 또한 촉박했기에 평소보다는 적은 인원들이 자리했지만 그래도 그 수가 제법 되었다.
스무 명 가까운 인원들이 자리한 회의장은 조용했다.
그들 모두는 곧 나타날 루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화신루 루주가 정체를 가리고 있을 붉은 휘장이 쳐진 상석과 가장 가까운 곳에는 언제나처럼 일총관 진자양이 자리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곧 나타날 루주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
허나 진자양의 신경은 백아린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가 그녀를 슬그머니 바라보며 전음을 날렸다.
『회의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준비들 끝난 거 같으니…… 슬슬 시작하죠.』
『알겠습니다, 루주님.』
백아린의 승낙이 떨어지자 진자양은 슬쩍 붉은 휘장의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휘장 안쪽에 있는 문을 통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휘장 때문에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그 누군가.
하지만 모두는 그가 적화신루의 루주라 여겼다.
진짜 루주가 백아린이라는 걸 아는 몇몇만을 제하고는.
휘장 너머에 나타난 그림자가 의자에 자리하자, 기다렸다는 듯 진자양이 소리쳤다.
"적화신루의 루주님을 뵙습니다!"
"루주님을 뵙습니다!"
고함 소리와 함께 회의장에 자리한 스무 명에 달하는 적화신루의 인물들이 동시에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췄다.
그리고 그 예를 취하는 사람들 속에는 당연히 백아린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며 휘장 너머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를 바라봤다.
이윽고 휘장 안에 있는 가짜 루주의 입에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의를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