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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13화 (113/293)

113화. 제안 ― 시간 좀 괜찮으실까요 (1)

휘장 너머의 인물이 꿈틀했다.

"뭐? 실패?"

휘장으로 가려져 있어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는 그가 무척이나 화가 나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상황을 보고하던 수하는 휘장 안에서 쏟아지는 살기에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컥, 컥컥."

숨이 막혀 올 정도로 압도적인 기운이 쏟아져 나와서다. 그때 그런 그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왔다.

턱.

포권을 취하며 한쪽 무릎을 꿇은 건 다름 아닌 주란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 진정하시죠."

"지금 이게 진정할 일이더냐? 대체 왜! 매번 일이 이렇게 틀어지느냔 말이야!"

휘장 안의 인물은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처음엔 상대의 반격이 그저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허나 사해도를 잃으면서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다. 슬슬 화가 치밀기 시작했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 무림맹주를 쫓아낼 계획을 완성시켰다.

그런데…… 이것도 실패란다.

무림맹주는 제 자리를 지켜 냈고, 오히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자신들만 피해를 입는 상황이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은 이런 방식으로 무림맹주를 압박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 또한 문제다.

너무 대놓고 비슷한 방식을 쓰기는 어려웠으니까.

휘장 안쪽의 인물이 물었다.

"이번엔 또 뭐 때문에 실패했더냐."

"죽었어야 할 이지강이 살아서 돌아왔어요. 그로 인해 저희가 만들어 둔 판이 완전히 어긋나 버렸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거지?"

"천무진이 나타났더군요."

다시금 등장한 천무진이라는 이름에 휘장 안쪽의 인물은 뒤편에 있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마를 감싸 안은 손이 가볍게 떨렸다.

이무기일 뿐이라 생각하며 우습게 여겼던 상대.

그런데 그가 휘두르는 검이 견고한 자신의 성에 조금씩 흠집을 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장 너머의 인물이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나 그놈이구나."

분노를 꾹꾹 담아 내뱉는 한마디에 주란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이런 상황에서까지 굳이 살려 둬야 할까요? 그놈은 그저 방해거리예요. 더 크기 전에 차라리 지금에라도 제거를 하시는 것이……."

"죽일 수 있었다면 이미 죽였다!"

그가 버럭 소리쳤다.

죽일 수 있는 자라면 이미 골백번은 죽이고도 남았을 자신이다. 허나 지금은 천무진을 절대 죽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패였으니까.

잔뜩 화가 난 그가 명령을 내렸다.

"이번 일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관련된 놈들을 모두 죽여라."

"그렇게 하죠."

말을 마친 그녀가 옆에 있던 자를 향해 슬쩍 고갯짓을 했다. 나가 보라는 듯한 모습에 그자는 황급히 바깥으로 나갔다.

방 안에 단둘이 남게 된 상황.

휘장 안에서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놈이 어떻게 이 모든 일을 해내고 있는 거지?"

대체 뭘까?

어떤 것이 천무진이 이리도 날뛸 수 있는 판을 계속해서 만들어 주고 있는 걸까?

계속해서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하면, 언제나 한발 더 나가서 대처하고 있다.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허나 그것이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연관이 있을 리는 없다. 지금 벌어지는 이 일들은 그가 겪지 못했을 미래일 것이 분명할 테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같이 모든 일을 성공시키는 그 배후에는 과연 뭐가 있는 것일까?

이미 천무진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

그랬기에 그의 주변에 대해서도 파악이 끝나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조력자는 셋, 무림맹주와 대홍련 부련주 단엽.

그리고 정보 단체인 적화신루다.

잠시 그들에 대해 생각하던 휘장 안쪽의 인물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적화신루?"

허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적화신루는 뛰어난 정보 단체이긴 하지만 최고조차 아닌 자들이다. 개방조차 어쩌지 못하는 자신들을 그들의 도움만으로 이 정도까지 몰아붙이는 일이 가능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게 볼일을 본 후 뒤처리를 하지 않은 것 같은 찜찜함이 남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자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굳이 고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다면…… 없애면 그만 아니던가.

그가 물었다.

"천무진의 옆에 적화신루의 누가 있다고 했지?"

"백아린이라는 여인이 있어요. 부총관으로 한천이라는 작자도 있고요."

"백아린과 한천……."

두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작 육급과 칠급으로 분류되는 하찮은 존재들.

그랬기에 무공으로는 그리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그 보고서에 적혀 있던 하나의 글귀가 떠올랐다.

뛰어난 두뇌를 지녔고, 조사 후 제거 대상으로 분류 가능성이 있다고 적혀 있었던 백아린에 관련된 정보였다.

"주란."

"네, 어르신."

"아무래도 한 명을 죽여 줘야겠군."

죽여 줘야 할 것 같다는 말에 주란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누굴 죽일까요?"

그녀의 질문에 휘장 안쪽에서 다시 한 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아린. 그 여자를 죽여."

어르신이라 불리는 상대의 명령에 주란이 포권을 취하며 짧게 답했다.

"명 받듭니다."

* * *

며칠의 시간이 흘렀고, 점점 적화신루의 임시 총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전에 밀린 일 처리를 하기 위해서인지 백아린은 무척이나 바빴다. 그에 비해 나머지 세 사람은 다소 여유가 있었다.

한참 가지고 온 서찰들을 정리하던 백아린은 옆에서 느긋하게 놀고 있는 한천을 보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두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한천이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이상하게 속이 뒤틀렸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부총관, 언제까지 놀 거야?"

"놀긴요. 지금 엄청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재빠르게 옆에 있는 서찰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며 한천이 둘러댔다.

그런 그를 향해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방에 있는 다른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맞은편에 자리한 천무진은 백아린이 가져온 정보들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고, 멀리에서 이 일과는 아예 담을 쌓고 있는 단엽은 치치와 노는 데 바빴다.

치치를 제대로 돌봐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들.

‘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나.’

틈만 나면 단엽이 치치와 놀아 주는 덕분에 그런 쪽에 관련된 부담은 한결 덜 수 있었다.

처음엔 단엽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치치였지만 계속해서 다가오는 그가 싫지 않았는지 이제는 제법 장단에 맞춰 주는 모양새였다.

……물론 단엽의 명령까지 따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치치! 앉아!"

순간 들려오는 단엽의 목소리.

하지만 치치는 멀뚱멀뚱 선 채로 그런 단엽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치치의 모습에 단엽이 양손으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고통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백아린의 명령은 그렇게 잘 들으면서 왜 내 말은 안 듣는 거야, 치치."

"주인은 나니까."

서찰을 휙휙 넘기며 가볍게 던져 낸 백아린의 그 한 마디에 단엽이 표정을 구겼다.

그가 말했다.

"두고 보자고. 언젠가 반드시 내 말을 듣게 될 테니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지금 한 확신 어린 말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언제든지."

어깨를 으쓱하며 백아린이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승부욕이 불타는지 단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옥수수! 그래, 치치가 좋아하는 옥수수를 좀 더 가져와야겠다."

말과 함께 단엽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가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한천이 키득거렸다.

"큭큭, 치치가 저리도 좋을까요?"

"그래도 덕분에 치치도 심심하지 않고 다행이지, 뭐."

"한가해서 좋겠네요."

"허어."

부럽다는 듯 말하는 한천의 모습에 백아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나마 단엽은 치치라도 돌보지 한천은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일이 다반사였으니까.

그녀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 중에 제일 한가한 게 누군지 알아?"

"누군데요? 에이, 설마 저라고 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아니까 다행이네."

"무슨 소리십니까. 지금 이거 보시라고요."

앞에 놓인 종이 뭉치를 가리키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백아린은 그새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렇게 한천이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때였다.

드르륵.

자리에 앉아 있던 천무진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금 적화신루에서 받아 온 정보들을 확인하던 백아린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잠시 무림맹에 좀 다녀와야겠어."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총군사가 시간 될 때 잠시 보러 와 달라고 했었거든. 마침 시간이 좀 비는 것 같아서 지금 갔다 올까 하고."

"그래요? 저도 다녀와야 되긴 한데 아직 정리할 서류가 좀 남아서…… 아무래도 시간을 맞추긴 어려울 것 같은데 먼저 다녀와요."

"알았어."

말을 마친 천무진은 옆에 놓아 둔 천인혼을 쥔 채로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장원을 벗어나 무림맹이 있는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번화가 인근까지는 빠르게 경공술을 펼치며 달려 나가던 천무진은 무림맹 인근에 도착해서야 속도를 늦췄다.

그렇게 도착한 무림맹. 천무진이 입구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려 할 때였다.

먼저 그를 알아본 젊은 수문 위사가 빠르게 포권을 취하며 크게 소리쳤다.

"천룡성의 무인을 뵙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주변을 지나다니는 이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천무진에게 쏠렸다.

그런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는지 손으로 슬쩍 얼굴을 가린 천무진이 작게 말했다.

"됐으니까 그만."

"어서 안으로 드시죠!"

입구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안으로 들어선 천무진은 곧장 총군사 위지겸의 집무실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무림맹 내를 걷는 와중에도 천무진을 알아본 많은 이들이 선망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홍천관의 말단 무인으로 자리하고 있을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이름 하나만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만큼 천룡성이라는 이름이 무림에서 지닌 힘이 크다는 걸 의미했다.

천무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이런 분위기 부담스러운데 말이야."

용무를 끝낸 천무진이 무림맹의 입구에서 막 걸어 나올 때였다.

옆에서 갑자기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룡성의 분이시죠."

갑자기 말을 걸어온 것도 그렇지만, 그 당사자가 여인이었기에 천무진은 자연스레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화려한 인상의 삼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 한 명과, 중년의 사내 한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

허나 그럼에도 천무진은 방심을 하지 않은 채, 딱딱한 목소리로 차갑게 대꾸했다.

"누구지?"

그제야 여인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아,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어교연이라고 합니다. 적화신루의 육총관 직을 맡고 있죠."

여인의 정체는 바로 백아린을 시기하고, 그녀를 적화신루에서 쫓아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어교연이었다.

어교연이 인사를 끝내기 무섭게 옆에 있던 사내도 인사를 건넸다.

"어교연 총관님을 모시는 부총관 경패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자 그제야 천무진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이 둘이 백아린의 동료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적화신루에 신세 많이 지고 있어. 고마움을 표하지. 무림맹에 일이 있는 모양인데 잘 끝내고 돌아……."

"아니요. 저희가 용무를 가지고 찾아온 건 무림맹이 아닌 천 공자님이세요."

어교연이 말에 천무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

"네, 잠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시간 좀 괜찮으실까요?"

눈을 빛내며 물어 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천무진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적화신루의 일이라면 백아린을 통해 전달하면 될 터.

그런데 굳이 육총관이 직접 나타나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천무진이 짧게 답했다.

"잠깐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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