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의심 ― 하지만 아닙니다 (1)
당자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천룡성 무인에 대해 조금씩 소문이 퍼지고 있었지만 상황상 당자윤은 그 정보를 접할 수 없었다.
의방에서 환자 시늉을 하느라 외부에 나가지 못했던 탓이다.
그로 인해 천룡성 무인의 정체가 천무진이라는 사실을 접할 모든 기회를 잃었고, 지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도발로 상황을 더욱 최악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뜩이나 좋지 못했던 사이, 그걸 만회하기는커녕 더욱 상대를 조롱해 댔으니 이제 와서 그 어떤 말을 한들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뭔가 둘러대고 싶었지만 당자윤은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던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도 좋은 기억이 없거늘, 그가 자신을 어찌 생각할지 너무도 뻔했다.
‘젠장, 어쩐지 처음 만난 날부터 이상하게 눈이 간다 했더니…….’
무림맹 내에서의 첫 만남, 뭔가 범상치 않다 느꼈지만 이내 홍천관 소속이라는 걸 알고 관심을 끊었다. 그런 곳에 자신이 신경 쓸 만한 자가 있을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상대가 천룡성의 무인이란다.
자신이 그렇게 업신여기고 조롱해 대던 상대가 바로 전설의 무인이었던 것이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며 머뭇거리는 그때 방금 막 모습을 드러낸 당소련이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별거 아닙니다."
천무진은 당자윤에게 향했던 시선을 당소련에게로 돌리며 대꾸했다. 오늘 이 자리에 굳이 당자윤을 참석시킨 건, 여태 당했던 걸 되돌려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굳이 그런 이유로 이렇게 발걸음을 할 정도로 천무진은 한가하지 않았다.
사실 당자윤은 애초에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 자리에 참석시킨 이유는 오직 하나.
어떻게 살아서 이곳에 나타났는가에 대해 듣기 위함이다.
살기 위해 별동대를 버리고 사라진 걸로 파악되는 당자윤, 그리고 그가 없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난 적의 등장까지.
확신할 순 없지만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이 모든 상황들을 그냥 넘길 순 없었다.
최소한 당자윤의 입으로 직접 그날의 일에 대해 전해 들을 것이고, 혹여라도 뭔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그걸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본격적으로 그에게 이것저것을 캐묻기에 앞서 천무진은 먼저 오늘 이 자리를 만들어 준 당소련에게 인사를 건넸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때 대접하고 싶었던 걸 이제야 해 드리게 된 것뿐인 걸요. 사실 이런 조용한 자리보다는 조금 더 많은 분들께 저희 사천당문이 두 분께 입은 은혜에 대해 알리고, 그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사실 당소련이 원한 건 이런 조용한 만남이 아니었다. 성대한 잔치라도 벌이며 두 사람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자 했다.
솔직히 말해 이번 만남을 주선한 건 순수한 의도만 있어서는 아니었다.
은혜도 갚으면서 동시에 사천당문의 건재함을 주변에 알리려던 목적 또한 분명 있었지만…… 천무진의 정중한 요청에 그녀는 그런 사사로운 욕심은 바로 버렸다.
사천당문의 가주 대행으로 활동하며 가문의 이득을 위한 욕심이 나는 건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천무진과 백아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 부분에 있어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 은혜를 반드시 갚고 싶은 당소련이었다.
그랬기에 은밀히 만나자는 천무진의 부탁에 아쉬웠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 하나 내지 않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시끄러운 환대는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요."
"저도 이 정도 자리면 충분해요."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 또한 동조하며 나섰다.
세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당자윤은 천무진과 백아린이 뭔가 사천당문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말없이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때였다.
지금 당자윤의 상황을 알 수 없는 당소련으로서는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조금이라도 더 편히 대화에 끼어들 수 있도록 당소련이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아, 너는 모르겠구나. 일전에 가문 내 소란이 있었을 때, 날 구해 주셨던 것이 이 두 분이란다."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당자윤은 천무진과 백아린의 눈치를 살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랬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이미 자윤이와 아는 사이시겠네요. 같이 별동대로 임무에 나가셨으니까요."
보다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꺼낸 이야기였지만, 막상 당사자인 당자윤은 당소련의 말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괜한 벌집을 들쑤시는 듯한 그런 느낌. 그랬기에 당자윤은 더욱 긴장한 얼굴로 천무진을 조심스레 살폈다.
천무진이 이내 말했다.
"그럼요. 뭐 정확히 말하자면…… 그 전부터 조금 알고 있었죠."
말을 던지며 시선을 마주하자 당자윤이 움찔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그래요? 허기야 무림맹에 계셨다고 하셨으니 자윤이와 안면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그럼 우선 다들 모였으니 식사부터 할까요?"
"그러죠."
천무진의 대답에 그녀가 슬쩍 바깥에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들이 있는 방으로 세 명의 시녀들이 빠르게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백아린이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보며 놀란 듯 말했다.
"이런, 간단하게 해 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엄청 준비하셨네요."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인 당소련이 어서 먹으라는 듯 가볍게 손으로 음식들을 가리켰다.
백아린이 젓가락을 든 채로 짧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먹을게요."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던 탓에 한 끼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그녀다.
백아린이 식사를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천무진 또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식사를 시작했을 때, 당자윤은 수저를 쥔 채로 앞에 놓여 있는 죽 그릇을 가볍게 들쑤시고 있었다.
환자 흉내를 내고 있는 탓에 그에게는 죽이 전달되었는데, 사실 지금 같은 상황에 이런 것이 목구멍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당자윤은 그저 아무런 일도 없이 빨리 이 자리가 끝나기를 간절히 빌 뿐이었다.
앞에 놓여 있던 음식을 먹던 당소련의 시선이 천천히 백아린에게 틀어박혔다.
그녀가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꽤나 먹성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던 탓이다.
당소련이 놀란 듯 말했다.
"백 총관님이 생각보다 너무 잘 드시네요. 겉보기엔 밥 한 그릇도 제대로 안 드실 것 같은데……."
당소련의 말에 백아린을 잘 아는 천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완전 잘못 짚으셨군요. 겉보기만으로 판단해선 절대 안 될 여잡니다. 기본 두 그릇은 먹더군요."
굳이 먹는 것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겉보기와는 참으로 다른 여인이었으니까.
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대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흡사 전장의 맹수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또 알고 보면 뛰어난 두뇌를 지닌 탓에 그저 단순히 힘만 센 무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거기에 평소엔 사내처럼 털털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어떠한 여인보다 섬세하게 상대의 마음을 헤아린다.
며칠 전 비 오던 밤 바로 그날처럼.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억울하다는 듯 음식을 우물거리며 답했다.
"아침부터 누가 밥도 못 먹게 일만 시켰더라?"
일순 할 말이 없는지 천무진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고, 그런 그를 백아린이 가볍게 흘겨보고 있는 그때.
"풉."
터져 나온 당소련의 웃음소리에 두 사람이 그녀를 바라봤다.
당소련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해요. 그냥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여서 절로 웃음이 나왔어요. 나쁜 의도는 아니었으니 기분 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니 걱정 마세요. 아, 저기 있는 대단하신 천룡성 분은 모르겠네요. 속이 좀 좁아서요."
뒤에서 몰래 흉보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중얼거렸지만, 사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당연히 천무진이 곧바로 받아쳤다.
"속이 좁긴 누가 좁다는 거야."
"어? 들었어요?"
마치 어떻게 들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백아린을 보며 천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당소련이 다시금 끼어들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두 분이 어떤 사이신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꽤나 친밀해 보이셔서요. 천룡성과 적화신루가 오래 같이 일해 왔던 건가요?"
"음…… 그건 아니고요. 일 자체는 얼마 전부터 함께하고 있어요. 모두가 마찬가지겠지만 무림의 문파라면 천룡성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죠. 저희 또한 정보를 주면서 돈도 받고, 그 은혜도 갚는다고 보시면 돼요."
"그렇군요. 근데 그게 전부인가요?"
"네, 그렇죠. 왜요? 뭐 다른 거라도……."
"아뇨, 아니에요."
당소련은 웃음으로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혹시나 실례가 될까 봐 차마 잇지 않은 말이 있었다.
두 사람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그리고 단순히 빚을 갚는 사이로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도 말이다.
허나 그런 자신의 생각을 당소련은 애써 감췄다.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진행되던 식사 시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천무진이 슬쩍 백아린에게 시선을 보냈다.
굳이 전음을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이미 백아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사전에 약속된 대로 그녀가 당소련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주 대행님. 잠깐 저와 나가서 이야기 좀 나눴으면 하는데요."
"저희 둘만요?"
"네, 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럼 그렇게 하죠. 그럼 저희 둘은 잠시 다녀올 테니 식사하시고 계세요."
"그렇게 하죠."
기다리고 있던 천무진이 짧게 답했고, 백아린은 당소련과 함께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천무진과 당자윤 단둘만 남게 된 식사 자리. 당연히 당자윤으로서는 가시방석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죽 그릇만 바라보고 있던 당자윤의 귓가로 천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나지막한 목소리에 놀란 듯 고개를 치켜든 당자윤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이내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저 말입니까?"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당자윤의 존댓말.
일순간에 두 사람의 관계가 역전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당자윤은 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말을 걸어오는 천무진의 모습에 그나마 먹지도 않은 죽이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고, 긴장으로 등골이 써늘했다.
물어 오는 당자윤을 향해 천무진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그럼 여기 너와 나 단둘뿐인데 누구한테 하는 말이겠어."
당자윤이 움찔하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천무진이 그의 반응에는 관심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곧바로 시작하지. 너 어떻게 살아 돌아왔냐?"
툭 내뱉듯 던진 한마디.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당자윤의 속은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것처럼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당자윤이 짧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십니까?"
물어 오는 그를 보며 천무진은 피식 웃었다.
"뭐야 시치미 뗄 생각이야? 살아 있는 별동대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쳤잖아."
말을 내뱉은 천무진은 당자윤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자그마한 표정 변화 하나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자신을 향한 상대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면서 당자윤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진정하자. 진정해야 돼.’
이건 위기이자 기회였다.
어차피 별동대의 나머지 생존자들이 생환했을 때부터 이런 상황은 예측 범위 안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에 대해 물을 것이고, 당시 있었던 일들에 관해서 확인하려고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걸 알기에 지금 이처럼 다쳐서 돌아오는 연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이 그냥 벌인 일이 아닌 모종의 상황들을 진짜로 만들기 위한 물밑 작업이었다.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들킨다면 모든 걸 잃게 될 상황.
허나 당자윤은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는 그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위해 완벽하게 조작된 가짜 증거들과 증인들을 준비시켜 놓았다.
당자윤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전 도망을 쳤습니다."
아니라며 길길이 날뛰며 변명을 해 댈 거라 생각했던 천무진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당자윤은 너무도 쉽게 그 말에 수긍했다.
의외의 반응에 잠시 눈을 치켜떴던 천무진이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생각보다 쉽게……."
"허나 제가 도망친 이유는 저만의 목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별동대를 구하기 위해서였지요."
그의 말을 자르며 당자윤은 준비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당자윤의 말에 천무진이 와락 표정을 구겼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드리면 이해하실 겁니다."
두 눈을 빛내며 말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천무진이 결국 나지막이 대답했다.
"어디 설명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