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연기 ― 깨어났구나 (2)
점심시간이 막 지났을 무렵의 시간.
천무진은 백아린, 한천과 함께 무림맹으로 향했다.
정체를 드러낸 이상 굳이 홍천관의 무인 행세를 할 이유가 사라져, 출근할 필요가 없는 천무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림맹으로 가는 이유는 다름 아닌 맹주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란히 걸어가던 도중 한천은 옆에서 피곤하다는 듯 길게 하품을 하는 백아린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가 물었다.
"대장, 잘 못 주무셨습니까?"
"응, 어쩌다 보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 옆에서 끼어들었다.
"부총관이 술 귀신인 줄 알았는데, 진짜 술 귀신은 따로 있던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쪽 대장 있잖아. 완전 술 귀신이라고."
천무진이 백아린을 향해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허나 그 말에 한천은 까무러칠 듯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분이서…… 술을 마셨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그의 질문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보통이 아니던데. 여태 술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깜빡 속았다니까."
"한 잔도 아니라 그렇게 많이 드셨다고요? 그게 진짭니까?"
한천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백아린에 대해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함께 술자리를 갖지 않았다. 하물며 둘뿐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상황에 따라 한두 잔 정도야 마시는 경우가 제법 있었지만 제대로 된 술자리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실제로 백아린은 천무진을 처음 만났던 그날도 객잔에서 술을 한 잔 마셨으니까.
허나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천무진의 입장에서 지금 한천의 모습은 의아함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왜?"
"허어!"
다시금 돌아온 대답을 들으며 한천이 놀랍다는 듯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이내 그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백아린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껴서일까?
백아린이 한천의 시선대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피고는 물었다.
"왜 그래?"
"흐음."
뭔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한천의 모습에 백아린은 이상하게 발끈했다.
슬그머니 등에 지고 있는 대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하자 한천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둘러댔다.
"에이, 왜 그러십니까! 대장. 그냥 대장이 술 마셨다니까 놀래서 그랬죠. 엇? 무림맹이 저기 보이는군요. 언제 여기까지 왔데."
갑자기 손으로 멀리에 있는 무림맹을 가리키며 한천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백아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소란스레 도착한 무림맹.
세 사람은 곧바로 맹주 추자후를 만나기 위해 안쪽으로 움직였다. 미리 말이 오갔던 덕분인지 그를 만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세 사람은 곧바로 맹주의 집무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집무실 입구에 도착하자 이곳까지 천무진 일행을 안내해 준 사내가 안쪽으로 보고를 올렸다.
"맹주님, 약속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아, 그래? 드시라고들 하게."
곧바로 안에서는 추자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사내는 슬며시 문을 열며 옆으로 비켜서 줬다. 말은 안 했지만 그의 시선은 천무진에게 틀어박혀 있었다.
아직 완전히 소문이 난 건 아니지만 천무진에 대한 건 이미 조금씩 알려지는 중이었다.
천룡성의 무인 천무진.
그를 직접 본 사내의 눈동자에는 경외감이 가득했다.
그렇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추자후의 집무실.
그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추자후와 군사 위지겸, 그리고 또 한 명의 인물이었다.
먼저 와 있던 다른 손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위무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무진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남궁위무를 향해 안으로 들어서던 세 사람 또한 포권으로 답했다.
남궁위무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군요. 남궁세가 가주 남궁위무입니다."
"천무진입니다."
"이야기는 윤이를 통해 들었습니다. 우리 가문의 아이를 살려 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천 소협이 아니었다면 전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맹주님을 의심할 뻔했으니, 실로 은인이라 하실 수 있습니다."
남궁위무는 추자후를 의심했었다.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자신의 가문인 남궁세가 무인 둘을 죽게 만들었다고 여기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헌데 살아 돌아온 남궁윤을 통해 자신이 완전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제 남궁윤이 살아 돌아온 걸 확인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
회의가 끝나고 직접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날이 밝기 무섭게 실례를 범했던 일에 대해 사과를 하기 위해 추자후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남궁위무의 사과를 추자후는 웃는 얼굴로 받아 줬다.
남궁위무가 앉아 있는 추자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님들이 오셨으니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번 일에 범했던 실례에 대해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합니다, 맹주님."
"됐다니까 그러네. 오히려 사죄를 할 사람은 날세."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별동대를 파견했다는 건 분명 거짓이었다.
허나 바뀌지 않는 하나의 진실은 결국 그 별동대에게 이번 임무를 내렸다는 것이 자신이라는 거다.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떠났던 건 사실이지만, 결국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었다.
한 무리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긴 했지만 추자후로서도 결코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런 추자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남궁위무가 답했다.
"아닙니다, 맹주님. 사죄를 해야 할 건…… 맹주님이 아닌 그놈들이지요."
아직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들.
그들에게서 자신의 동생을 죽인 죗값은 반드시 받아 낼 생각이었다.
남궁위무가 추자후를 향해 다시금 인사를 던졌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지요."
"조심히 가게."
짧은 인사를 끝낸 그가 집무실을 벗어났고, 이내 추자후의 시선이 천무진 일행에게로 향했다.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앉으시지요."
추자후의 말에 세 사람은 비어 있는 자리에 가서 착석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추자후가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어제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군요. 세 분 덕분에 위기를 잘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별동대의 생존자들을 구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깊게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천무진과, 적화신루의 두 사람 덕분에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허나 그보다 더욱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은 건 비록 몇 안 되긴 했지만 생존자들을 구해 왔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들이 없었다면 그들 또한 결코 살아서 무림맹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을 테니까.
고마움을 표하는 추자후를 향해 천무진이 짧게 답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전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짧게 대화를 주고받은 직후 기회를 엿보고 있던 위지겸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서찰을 통해 대충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대체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청아원의 일까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 직후 벌어진 상황들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물어 오는 위지겸의 질문에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저희는 청아원을 치고, 그들의 배후에 다른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곧바로……."
백아린은 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을 이어 갔다.
흑마신의 거처인 사해도로 네 사람이 쳐들어간 다음,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 무림맹의 별동대들을 구해 내기까지.
꽤나 긴 이야기였으나, 놀라울 만한 요소가 가득했던 탓인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추자후와 위지겸은 연신 탄성을 토해 냈다.
긴 이야기가 끝났고, 집무실 안에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놀랐는데 특히나 믿기 어려운 부분은 단 네 명이서 흑마신이 이끄는 흑마련을 쓸어버렸다는 거다.
아직까지 이 일에 대해서는 중원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건 사해도가 섬이라는 이유가 컸다.
외부인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기에, 그들이 무너진 사실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허나 이미 모두가 제압당한 마당이니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은 흘러나올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소문으로 인한 관심은 천룡성의 주인인 천무진, 그에게로 향할 게 자명했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추자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허허, 단 네 명이서 흑마련을 정리했다니."
과연 지금 중원에서 그 같은 일이 가능한 이들이 몇이나 될까?
실로 놀라운 일을 해낸 당사자들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백아린이 말을 이었다.
"일단락하긴 했지만 정리를 하는 데 있어 무림맹의 도움이 좀 필요해요."
"말해 보게나."
추자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구해 낸 아이들은 단엽의 대홍련이 보호하고 있고, 그곳 섬에 점혈당해 있던 흑마련의 무인들은 적화신루를 통해 이곳 무림맹으로 호송되고 있다.
이 이후에는 관부로 넘겨 그들이 지은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허나 단 한 명, 관부에 이대로 넘길 생각이 없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아이들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실험을 일삼던 적면신의다.
"아까 말씀드렸던 적면신의를 이곳 무림맹의 지하 감옥에 가둬 뒀으면 해요."
"더 캐낼 것이라도 있는가?"
"조금 더 알아보긴 해야겠지만 아마 그런 건 없을 거예요."
적면신의는 그저 하수인에 불과했다.
그는 아이들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것에 쾌락을 얻었을 뿐, 그 외에 것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그로 하여금 이 같은 일을 벌이도록 만든 그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 모든 걸 관리했던 건 아마도 죽은 흑마신일 터.
자신이 살기 위해 많은 걸 술술 불어 대던 적면신의다.
그것이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성정을 보고 추측건대 아는 걸 숨기고 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허나 이대로 관부에 넘기기엔 다소 찜찜한 것이 많은 것도 사실, 거기다가 아직 그에게서 얻어야 할 뭔가가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백아린은 비밀리에 그를 무림맹 지하 감옥 안에 가둬 두기를 원했다.
그녀의 청에 추자후가 슬쩍 옆에 있는 위지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적면신의의 신분을 아예 바꿔서 지하 감옥 안에 가둬 두도록 하지요."
무림맹의 지하 감옥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위지겸은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 적면신의를 꽁꽁 감춰 둘 생각인 것이다.
"좋은 판단이네요, 군사님."
"하하, 칭찬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위지겸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방금 전에 들어온 깜짝 놀랄 소식, 직접 들어온 보고다 보니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냈다 자부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닌 백아린이다.
적화신루는 정보 단체고, 그랬기에 자신이 먼저 이런 정보를 얻었다 확신하지 못했다.
백아린이 물었다.
"무슨 이야기요?"
"그…… 별동대에 생존자가 한 명 더 있다더군요."
말을 하며 위지겸은 이곳에 온 세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는 얼굴들.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위지겸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미 알고들 있었군요."
그의 말에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자윤, 그가 살아서 사천당문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을 이곳 무림맹으로 출발하기 한참 전에 이미 전해 들었던 상태다.
생존자가 더 있다는 소식은 분명 반가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자후나 위지겸이 이런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생존자들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서다.
그건 바로 그가 동료를 버리고 도망친 것 같다는 의심이었다.
추자후가 입을 열었다.
"총관의 생각은 어떤가? 정말로 그가 동료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보이는가?"
물어 오는 질문에 백아린은 잠시 생각했다.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는 상대인 건 맞지만, 정보 단체의 인물인 만큼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사사로운 마음을 모두 배제한 채로 결론을 내렸다.
허나 그럼에도 생각은 크게 달라지기 어려웠다.
모든 정황들이 말하는 답은 하나였으니까.
그녀가 솔직히 말했다.
"다른 가능성이 있는 걸 배제할 순 없겠지만…… 사실 그래요."
"이거야 원."
추자후가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존자가 한 명 더 늘어났거늘 마냥 반기기가 어려운 이 상황이 못내 마음이 쓰렸다.
어쨌거나 아직까지 확실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으니 섣부른 판단은 자제해야만 했다. 아주 만약에라도 그게 아닐 경우 또한 생각해 둬야 했으니까.
백아린이 물었다.
"좋지 않은 상태로 사천당가에 나타났다는 말은 들었어요. 아직도 그 상태인가요?"
사천당문 내부로 들어간 이후의 일은 아직 파악할 만한 시간이 없었기에 그의 상태가 어떤지는 더 깊게 알아내지 못했고, 그랬기에 직접 추자후에게 물은 것이다.
그녀의 질문에 추자후가 답했다.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전해 들었네. 깨어나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겠지. 그러니 자네도 가능하면 이 일이 보다 확실해질 때까지 함구해 줬으면 하는데 그럴 수 있겠는가?"
추자후의 부탁에 백아린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도 확실하지 않은 걸로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거든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가 옆에 있는 천무진과 한천은 바라봤다.
그들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까지 확인한 추자후가 감사의 뜻을 내비쳤다.
당자윤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고, 이후에도 이번에 있었던 별동대의 일과 관련한 뒤처리에 대해 간략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렇게 이번 일정의 일을 정리한 이후 세 사람은 맹주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무림맹을 나와 거처로 돌아가던 도중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아, 전 부총관과 잠시 적화신루에 의뢰를 넣으러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먼저 가요."
"그래? 그러면 이따가 보자고."
천무진이 알겠다는 듯 말을 끝내고 움직이자, 백아린은 한천과 함께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천무진과 적당히 거리가 벌어지자 그제야 한천이 입을 열었다.
"급히 뭐 의뢰하실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응. 의뢰를 할 것도 있고, 상부에 보고할 일도 하나 생겨서."
"상부에 보고해야 할 일이라뇨?"
물어 오는 한천을 향해 백아린이 담담하게 답했다.
"개방 방주가 루주님을 만나고 싶다네."
"……예?"
적화신루의 루주가 백아린이라는 걸 아는 한천이 기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이내 그가 황급히 다시 물음을 던졌다.
"어쩔 생각이십니까?"
물어 오는 질문에 걸음을 옮기던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글쎄 어떻게 해야 되나."
개방 방주의 제안.
사실 백아린으로서도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건 채로 백아린이 중얼거렸다.
"만나 줄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