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연기 ― 깨어났구나 (1)
깊어지는 밤.
그리고 짙어지는 어둠만큼 누군가의 속 또한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방에 앉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화산파의 자운이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그렇지만 그의 속은 그리 평온하지 못했다.
오늘 있었던 무림맹 회의 때문이었다.
‘맹주의 숨통을 끊었어야 했는데…….’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추자후를 옭아매기 위해 오랫동안 심어 두었던 모용세가의 모용진이라는 패도 이용했다. 맹주가 그를 믿도록 만들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들여 준비했는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추자후는 허허로워 보이는 외향과는 달리 무척이나 날카로운 인물이었다. 그에게 믿음을 주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그를 속이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렇게 힘겹게 맹주를 속여 옆자리에 두었던 모용진이 정체를 드러내게 만든 건 그만큼 지금 이 기회가 확실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룡성의 놈이 모든 걸 망쳐 놨군.’
천무진이 이지강을 살려서 나타난 순간, 자운은 준비했던 모든 계획들을 취소하고 한발 물러나야만 했다. 지금은 이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려서다.
그 때문에 괜히 자신들의 패만 몇 개 날아간 상황.
자운의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당연했다.
홀로 조용히 앉아 있던 자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던지는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림맹까지 당자윤을 데리고 왔던 여인, 주란이었다.
그리고 자운은 천무진이 찾는 그들과 관련이 있는 주란과 안면이 있는 모양새였다.
은밀하게 나타난 주란을 보며 조금의 놀람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채로 입을 열었다.
"한심하긴. 완벽하게 밥상을 차려 줬는데 그거 하나 못 해낸 거야? 왜? 떠먹여 주기까지 했어야 해?"
주란의 도발에 자운의 표정이 구겨졌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한 채로 자운이 짜증스레 말했다.
"지금 네가 나한테 뭐라 지껄일 상황이나 돼? 일이 왜 이렇게 됐는데? 대체 넌 뭘 하다 그놈을 놓친 거야?"
자운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사실 이번 계획이 실패한 것에 대해 책임을 논하자면 자신의 잘못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일이 어그러지게 된 모든 원흉은 이지강을 놓친 다른 쪽에 있었으니까.
주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지강을 죽이라는 임무를 내가 맡았다면 그자가 살아서 이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
하지만 그 말을 자운 또한 인정하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그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번 일을 어르신이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일이 엎어진 것 또한 분명 큰 문제였다.
허나 자운이 더욱 두려운 건 이번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며 자신이 모시는 어르신의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주란이 말했다.
"맞아. 이번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어르신께서는 무척이나 화가 나실 거야.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납득하고 있어. 이지강이 살아서 나타나는 건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했거든. 아마도 그 책임을 네게 묻지는 않으실 거야."
"……그래?"
대답을 하는 자운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그나마 고민하던 것 중에서 가장 커다란 부분이 해결된 덕분이다. 허나 주란은 그런 그를 비웃듯 입을 열었다.
"아직 마음 놓지 마. 어르신의 결정이 내려온 건 아니니까."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너무 드러냈다는 걸 느낀 자운이 서둘러 얼굴에 가득했던 감정을 다시금 감췄다.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만이 감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향해 주란이 말을 이었다.
"어떤 판결이 내려오든 개인적으로 앞으로는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십천야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건 같은 일원인 내가 그리 탐탁지 않아서 말이야."
어르신이라 불리는 그 존재의 최측근을 일컫는 십천야.
그리고 놀랍게도 화산파의 자운은…… 그 십천야의 일원이었다.
주란의 경고에 내심 불쾌감도 치밀었지만 자운은 짧게 답했다.
"새겨듣지."
그녀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천야.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열 개의 밤하늘.
자신들의 이름이자, 곧 천하를 좌지우지할 이들의 단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내 자운이 물었다.
"그나저나 이 밤에 무슨 일로 내 거처에 찾아온 거야? 설마 이런 말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아,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김에 겸사겸사. 그놈들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놈들이라니?"
"잡혀간 가짜 증인들 있잖아. 그놈들 때문에 또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으면 미리 손을 써 둬야 할 거 아냐."
추자후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던 두 사람.
모용진과 노효방이다.
두 사람에 대한 질문에 자운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한 놈은 아는 게 없고 모용세가의 놈은…… 말할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을 할 수 없을 거라는 뜻 모를 의미심장한 한마디.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란은 곧바로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자운이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모용진이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해도 그놈 또한 아는 것이 별반 없는 건 크게 다르지 않으니 문제 될 건 없어. 기껏해야 필요 없는 놈 몇 정도 던져 주고, 꼬리를 자르면 절대 위에까지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다."
분명 맹주파는 반맹주파를 의심하고 있을 게다.
허나 그게 뭐가 문제인가?
증거가 없다면 그건 그저 의심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자운이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렵게 모용세가를 조종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다소 복잡해지게 생겼군. 앞으로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차질이……."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어."
주란이 자운의 말을 자르며 들어왔다.
자운이 그녀를 응시하며 물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
"모용세가보다 더 큰 걸 물어 왔으니까."
자신만만한 주란의 말투에 자운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에서 모용세가보다 크다고 칭할 만한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누구냐고 묻는 듯한 그 눈빛을 받으며 주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천당문."
"그게 진짜야?"
"이번 일로 한 놈을 손에 넣었거든. 뭐 아직은 햇병아리지만 잘만 굴리면 우리의 일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주란이 말하는 건 다름 아닌 당자윤이었다.
그리고 이곳 자운의 거처에 직접 찾아온 이유 중 하나는 당자윤을 살리기 위해서기도 했다. 지금 이대로 흘러간다면 그는 무림에 다시는 발도 못 붙일 상황이 되어 버릴 테니 말이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놈을 키우기 위해서는 네 힘이 조금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지?"
말을 하며 주란이 천천히 몸을 낮춰 양손으로 탁자를 짚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자운과 시선을 맞춘 그녀.
자신감 가득한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자운이 입을 열었다.
"……뭐가 필요한지 말해 봐."
* * *
밤이 늦었지만 사천당문의 입구는 꽤나 많은 숫자의 무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내전 이후 경비가 꽤나 삼엄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수문위사 중 한 명이 갑자기 옆에 있는 동료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어이, 저기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있긴 뭐가 있다는 거야?"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던 사내는 눈을 부릅떴다. 어두운 밤, 그리고 꽤나 먼 거리긴 했지만…….
그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주변으로 신호를 보냈다.
가뜩이나 어두운 밤, 비까지 와서 분간하는 것이 더 어렵긴 했지만 분명 뭔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무엇인가는 자신들이 있는 사천당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내의 수신호에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사천당문의 모든 무인들이 자리를 잡고 앞을 향해 정신을 집중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빗줄기 속에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그 누군가의 모습이 점점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허나 문제는 상대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긴 장포를 머리에서부터 눌러쓴 탓이다.
비에 젖은 장포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상대가 비틀거리며 계속해서 다가오자, 수문위사들의 수장이 앞으로 나서며 경고의 말을 날렸다.
"이곳은 사천당문,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신분을 밝히십시오."
"……."
터벅, 터벅.
신분을 밝히라는 말에도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상대를 보며 결국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어 들었다.
혹시라도 상대가 공격해 들어온다면 그걸 막아 내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다가오던 그 정체 모를 장포의 사내는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러 갑자기 쓰러졌다.
철퍼덕.
비 때문에 엉망이 된 바닥으로 넘어진 상대는 가볍게 부르르 떨었다.
그런 상대를 바라보며 사내 하나가 물었다.
"조장 어떻게 할까요?"
"……."
수문위사를 이끄는 그가 정체불명의 사내를 잠시 고민스레 바라보다 이내 수하들을 향해 짧게 말을 이었다.
"내가 가서 확인할 테니 모두 대비들 해.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종을 울리도록."
"예, 조장."
말을 마친 그는 조심스럽게 쓰러진 상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어느 정도 거리에 이르자 검집을 내뻗었다.
스윽.
검집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포의 일부분을 걷어 냈고, 그렇게 안쪽에 감춰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는 그 순간…….
장포 너머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놀란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의, 의원을 불러라!"
생각지도 못한 외침에 수하들이 잠시 머뭇거릴 때였다. 그가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재차 소리쳤다.
"뭣들 해! 의원을 부르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의 뒤편에 쓰러져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
수적해진 얼굴로 빗줄기를 정면으로 맞으며 혼절해 있는 그의 정체는 바로…… 당자윤이었다.
죽었을 거라 알려진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이다.
내부로 뛰어 들어갔던 이는 곧 늙은 노인 한 명과 함께 바깥으로 달려왔다.
당사옹이라는 이름의 의원이었다.
뛰어난 독인이면서, 그만큼 의술에도 능통한 그는 사천당문 내에 있는 환자들을 살피는 의원 중 하나였다.
의복도 잘 차려입지 못한 그가 황급히 달려오더니 곧바로 당자윤의 맥을 짚었다.
기혈까지 확인한 그가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그런 당사옹의 표정에 조장 사내가 물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안 좋은 겁니까?"
"음…… 다행히 목숨은 붙어 있네만 치료를 서둘러야겠군. 내상이 깊어."
자리에서 일어난 당사옹이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어서 의방으로 옮겨야 해.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옮기게."
"알겠습니다."
당사옹의 명령에 수문위사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몸을 굽혀 쓰러진 당자윤을 둘러업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당사옹의 의방으로 움직였다.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기에 의방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의방에 준비되어진 침상에 당자윤을 눕히자, 당사옹이 다급히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환자를 치료해야 하니 나가 있게."
"알겠습니다."
침을 뽑아 드는 당사옹의 모습에 그자는 서둘러 의방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막 침을 침상에 누워 있는 당자윤의 손목에 가져다 대는 그 순간이었다.
덥석.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당자윤의 손이 당사옹의 손목을 잡아챘다.
쓰러져 있던 환자가 자신을 움켜잡았거늘, 그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깨어났구나."
당사옹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는 이미 상체를 일으켜 세운 당자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표정을 찡그린 채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멀쩡했던 거 잘 알고 있었잖습니까. 누굴 고슴도치로 만들 생각입니까?"
당자윤의 말에 당사옹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처음 맥을 짚기도 전부터 이미 당사옹은 그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걸 떠나 애초에 오늘 밤에 당자윤이 나타날 거라는 것조차 알았다고 해야 정확할 게다.
처음부터 준비되어진 연극.
그저 그 연극에 장단을 맞춘 것뿐이다.
투덜거리는 당자윤을 바라보던 당사옹이 갑자기 침 하나를 빠르게 그의 팔목에 툭 하고 놓았다. 그런 그의 행동에 당자윤이 불만을 터트렸다.
"대체 뭘……."
"네 역할이 뭐더냐. 환자 아니더냐. 그럼 적어도 침 몇 방 정도는 맞고 누워 있어 줘야지. 그래야 좀 환자 같아 보일 것 아니냐."
말과 함께 당사옹은 당자윤이 일으켜 세우고 있던 상체를 손바닥으로 밀어 다시금 침상에 눕혔다.
그러고는 이내 옆에 놓여 있는 침통을 들어 올리며 안에 든 침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검지보다 긴 날카로운 침을 스윽 손가락으로 훑으며 당사옹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왕 연기를 할 거라면 말이다……."
이윽고 그 긴 침을 당자윤의 어깨에 살짝 박아 넣은 그가 말을 이었다.
"같은 편도 속일 정도로 완벽해야 하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