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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06화 (106/293)

106화. 주선 ― 만나고 싶어 (2)

예상치 못했던 장량의 말에 백아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희 루주님을 뵙고 싶다고요?"

"그래. 오래전부터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더군. 적화신루의 총관들에게도 모습을 감출 정도니 찾는 게 쉽지 않더라고."

"……찾아보셨나 봐요?"

"물론이지. 날 누구로 보는 거야? 개방의 방주야. 세상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게 제일 싫다고."

말을 마친 장량은 다시금 호리병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

사실 오늘 장량의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세상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음을 알게 돼서다. 정체불명의 세력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한 일.

그런데 자신들이 모르는 그걸 적화신루는 알고 있었단다.

그 사실이 장량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물론 오늘 이렇게 백아린을 통해 적화신루 루주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건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만나 뵙고 하시려는 이야기가 뭐죠?"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지만 뭐겠어? 개방의 방주와 적화신루의 루주가 나눠서 할 이야기는 하나 아니겠어? 당연히 사업 이야기지."

아직까지 양 세력이 크게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결국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이.

그렇다면 언젠가는 마찰이 생길 것이고, 또 누군가는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백아린은 루주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꺼낸 장량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마도 그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자신이 만나고 싶어 하는 그 적화신루의 루주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꽤나 중요한 이유로 만남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백아린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애초부터 적화신루의 루주는 정체를 감추고 살아간다. 휘장 속에 숨어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다.

헌데 백아린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가짜 루주까지 내세웠다.

이중으로 안전장치를 해 둔 채로, 직접 움직이며 적화신루를 키워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만남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백아린이 짧게 답했다.

"제가 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실 거예요. 우선 루주님께 말씀은 드리죠."

"그거면 충분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연락 부탁한다고 전해 줘. 그리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라고도 전해 주면 좋겠군."

먼저 만나자는 청은 하고 있었지만 무림 내에서 개방의 방주는 적화신루 루주보다 위에 위치한 인물이다. 설령 뭔가를 부탁해야 할지라도 자신이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없는 장량이었다.

말을 전해 들은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하실 말씀은 이제 다하신 건가요?"

"뭐, 그렇다고 봐야지."

"이 정도 이야기셨으면 간단하게 전음으로 하셨어도 될 것 같은데요."

"맞는 말이야. 그런데 내 제안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자네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기도 했고."

"저를요?"

물어 오는 백아린을 향해 장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예전부터 궁금했거든. 정말 소문대로 대단한 자인지 말이야. 아까 그 친구에게도 말했지만 혹시라도 적화신루에서 떠날 마음이 생긴다면 언제든 개방으로 찾아오라고. 그쪽 정도라면 특별히 자리 하나는 만들어 주지."

"왜 그리 높게 쳐주시는지 모르겠지만, 말씀만이라도 감사히 들을게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장량이 갑자기 남의 이야기처럼 툭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 년 전에 말이야 섬서성에서 큰 싸움이 하나 벌어질 뻔한 적이 있었지."

섬서성 북부 지역의 패권을 놓고 시작된, 무려 여덟 개에 달하는 문파들이 얽힌 일이었다.

물론 그들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는 아니었지만 이 싸움은 단순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 여덟 개의 문파 중 일부의 뒤에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와 관련된 이들 또한 분명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쪽의 교역로와 연결되어 있는 장포산의 땅을 지니길 원했다.

모두의 욕심이 같으니 다툼이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일은 점점 커져 가면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을지도 모를 상황이 벌어지려던 찰나, 놀랍게도 일곱 개의 문파가 모두 장포산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덕분에 장포산은 나머지 하나의 문파가 지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도 북쪽의 교역에 있어 무척이나 큰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백아린은 갑자기 말을 꺼낸 장량을 가만히 바라봤고, 그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 싸움의 승자는 바로 서권문(書拳門)이었지. 허나 그들의 승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 그들은 그 여덟 개의 세력 중에 중간 정도밖에 가지 못하는 이들이었으니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

그것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어 낸 승리였기에 더더욱 의미가 깊었다.

장량이 백아린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뒤에…… 자네가 있었지."

당시 서권문은 이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고 싶어 적화신루에 의뢰를 맡겼다. 조금의 도움이라도 받고 싶어 부탁한 의뢰, 그런데 그 의뢰가 승부를 결정지었다.

백아린이 직접 나서서 무력을 휘두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보.

그 정보력만으로 일곱 개의 문파들이 나가떨어지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실로 아름답지 않은가?

정보 하나가 모든 걸 바꾸고, 정하는 상황.

정보 집단의 수장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 소문을 뒤늦게 접한 장량은 정말 미친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손바닥을 쳐 대며 웃었다.

기분이 좋았고, 실로 감탄스럽기까지 했으니까.

그때의 기억이 나서인지 보다 유쾌한 표정으로 장량이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자네에 대해 궁금했어. 정보 하나만으로 모든 상황을 좌지우지해 버린 그 능력에 흠뻑 빠졌거든. 그리고 기쁘기도 했지. 그 모든 걸 정보만으로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물론 그게 우리 쪽의 인물이 아니라는 게 좀…… 아니, 많이 아쉬웠지만."

그때부터 탐이 났다.

그렇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개방으로 오라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개방은 스스로 모든 걸 버린 이들이 찾아오는 곳.

스스로의 발로 오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여겼다.

백아린은 장량의 칭찬에도 전혀 들뜨는 기색 없이 답했다.

"정보를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죠. 칭찬받을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맞아, 그게 정답이지."

백아린의 대답에 장량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재목이었다.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 또한 분명 빼어났지만 장량에게 그런 겉모습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썼다면 개방에 몸담고 방주의 자리까지 오르지 못했을 게다.

사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백아린도, 장량도 서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못내 아쉬운지 장량이 말했다.

"다음번엔 술 한잔하지. 내가 모르는 자네의 무용담을 조금 더 듣고 싶거든."

허나 이번에도 백아린의 대답은 같았다.

"아쉽게도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말씀드렸지만…… 술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마셔서요. 그것도 단둘이서는 더더욱요."

* * *

쏴아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둑해진 밤, 쉼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천무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천무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나무 아래에 위치한 정자였다. 그곳에는 남윤이 준비해 준 술상이 있었고, 천무진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꽤나 독한 술을 다섯 병이나 비웠거늘 정신은 멀쩡했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천무진이 술잔에 담긴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술잔을 비운 그가 잠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봤다.

이번 별동대의 임무를 통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천인혼이 사실은 흑마신의 거점인 사해도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자가 자신이 찾던 그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도.

저번 생에서 그들은 자신에게 흑마신을 죽이게끔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지금까지 그들의 아군이었다. 그렇다면 훗날 무슨 이유로 상황이 변하고, 그로 인해 자신을 통해 흑마신과 그의 패거리를 몰살시켰다는 건데…….

거기다 그곳에 있던 자모충이라는 이름의 벌레 또한 계속 머리를 어지럽혔다.

분명 저번 생에서 자신 또한 그 자모충에 당했던 거 같은데 대체 그게 언제였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러웠던 상황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념을 이어 가던 천무진을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만든 건 빗소리와 뒤섞인 누군가의 발소리였다.

처벅 처벅.

떨어지는 비를 양손으로 가린 채로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백아린이었다. 그녀가 서둘러 정자의 지붕 아래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젖은 옷을 가볍게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나."

중얼거리던 그녀가 이내 정자 위로 성큼 올라서서 천무진에게 다가왔다.

백아린이 물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그러는 그쪽은 왜 온 거야?"

"신경 쓰고 있을까 봐 돌아왔다고 말해 주러 왔죠. 그런데 여기 있다고 해서요."

"걱정 안 했다니까 그러네."

시큰둥한 대답과 함께 천무진이 술을 다시금 훅 들이켰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아린이 이내 옆에 빈 병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 술을 혼자 다 마신 거예요?"

"어쩌다 보니."

"우리 부총관이 술 좋아하는 병이라도 옮긴 건 아니죠?"

"그 정돈 아니야."

천무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어쩌다 보니 꽤나 많은 술을 마시고 있고 때론 즐기기도 했지만 한천을 따라가려면 한참은 멀었다.

한천은 정말 술 귀신이 붙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주당이었으니까.

백아린이 정자의 기둥 한쪽에 몸을 기댄 채로 가만히 천무진을 바라봤다.

연거푸 술을 마시며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이 이상하게 자꾸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린의 시선을 느껴서일까?

천무진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돌아온 거 알았으니까, 이제 들어가. 쓸데없이 비 맞고 다니지 말고."

들어가도 된다는 말을 들은 백아린이 기둥에서 몸을 떼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바깥이 아닌 오히려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천무진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건너편에 자리한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이 이해가 안 가는지 물었다.

"안 들어가?"

"뭐 그냥…… 잠깐 옆에 있어 줄까 해서요."

"갑자기 왜?"

"아뇨, 그냥 혼자 두기에는 뭔가 좀 쓸쓸해 보여서요."

"……."

생각지도 못한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잠시 침묵했다. 허나 이내 뭔가 기분이 나쁘다는 듯 퉁명스레 받아쳤다.

"난 그런 거 몰라."

"어련하시겠어요."

웃는 얼굴로 받아친 백아린은 천무진의 앞에 놓인 술잔을 빠르게 잡아챘다. 그러고는 이내 술잔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치사하게 혼자만 먹지 말고 저도 한 잔 줄래요?"

"……."

"뭐 해요. 사람 손 무안하게 할 거예요?"

잔을 쥔 채 좌우로 손을 흔들어 대는 그녀의 모습에 천무진이 결국 술병을 들고야 말았다.

비어 있는 잔에 술을 채워 주며 천무진이 말했다.

"이거 한 잔만 마시고 들어가. 멀리까지 다녀오느라 피곤할 텐데 굳이 여기 있지 말고."

천무진을 위해 광서성까지 쉴 틈 없이 동행했던 그녀다. 그 먼 거리를 급박한 일정에 맞춰 움직였으니 무인이라고 한들 지치는 건 당연했다.

그런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백아린은 잔에 채워 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술을 단번에 삼킨 그녀가 기분 좋은 찡그림과 함께 탄성을 내질렀다.

"크, 좋네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천무진이 갸웃했다.

"……술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많은 부분 그녀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술에 관해서였다.

아예 입에도 안 대는 건 아니었지만 그리 술을 즐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천의 성화에 식사를 하며 반주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 또한 그리 많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여겼거늘…….

바로 그때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그녀가 잔을 내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술 마시는 거…… 좋아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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