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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03화 (103/293)

103화. 피아(彼我) ― 들어오시죠 (1)

덤덤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천무진.

그렇지만 그로 인한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화산파의 자운이 이를 꽉 깨물었다.

‘……이 구슬의 주인이라고?’

천루옥의 주인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뭐겠는가.

바로 천룡성의 인물이라는 거다.

정파와 사파, 마교를 가리지 않고 무림에 몸담은 이들에게 천룡성이라는 문파는 무척이나 특별했다.

특히나 정의를 수호한다는 자부심으로 뭉친 정도 무림에게 천룡성의 이름은 더더욱 의미가 깊었다.

무림맹주인 추자후가 천무진을 처음 본 그날부터 그에게 극진한 예를 갖췄던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수백 년간 어둠 속에서 무림을 지켜 온 그들은 정도 무림에게는 크나큰 은인이었으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맹주라는 배를 침몰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밀어붙여 대던 폭풍우가 어느덧 잠잠한 미풍이 되어 사그라지고 있었다.

허나 이런 분위기를 반맹주파가 반길 리 만무했다.

한눈에 봐도 맹주는 천룡성의 무인과 뭔가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처럼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더군다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놀라움 또한 보이지 않는 추자후의 얼굴.

자운은 직감했다.

‘오늘 이곳에 저자가 올 걸 미리 알았다는 말인가?’

추자후의 최측근인 군사 위지겸의 모습까지 확인한 그는 이내 자신의 예상이 맞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위지겸의 입가에 걸린 자그마한 미소.

왜 자신들의 공격에도 묵묵히 듣고만 있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천무진이 도착한 건 오늘 아침이었고, 위지겸과 추자후는 이를 알고 있었다.

천무진은 무림맹으로 오는 도중 적화신루를 통해 위지겸에게 연락을 취했었고, 그로부터 무림맹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전해 들었던 것이다.

현재 무림맹주가 구금당한 상태라는 것도.

그 때문에 천무진은 복귀하는 속도를 높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정말 아슬아슬하게 회의가 시작하기 한 시진 정도 전에 이곳 무림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갇혀 있는 추자후는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위지겸을 통해 오늘 있을 일에 대해 사전에 고지했고 지금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연히 추자후는 위지겸에게서 천무진이 이곳에 올 거라는 걸 전해 들은 상태였다.

분위기가 급변했으나 반맹주파가 이대로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제아무리 천룡성의 무인이 나타났다 한들 무림맹주의 죄가 사실이라면 그 어떠한 말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자운이 손에 쥐고 있던 천루옥을 옆에 있는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이내 앞으로 걸어 나와 천무진과 마주 섰다.

맹주의 자리에 서 있는 천무진을 향해 자운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나이는 자운이 많았지만 천룡성에 대한 예를 보이는 것이다.

"말로만 전해 듣던 천룡성의 무인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을 표합니다. 화산파의 자운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천무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자가 자운이로군.’

화산파의 자운.

불세출의 기재라 불리는 자다.

많은 젊은 무인들이 우러러보고 우상으로 꼽을 만큼 뛰어난 인물.

무림의 쟁쟁한 무인들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던 천무진조차 저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위명을 떨치는 자다.

우내이십일성의 한 명이자 반맹주파를 이끄는 실질적인 수장.

그랬기에 위지겸은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상대로 그를 언급했었다.

포권을 취했던 자운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 이렇게 나타나신 것이 맹주님 때문인 것 같은데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천무진이 숨기지 않고 짧게 답했다.

그러자 자운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아무리 천룡성의 무인이라 하시어도 무림맹의 일에 이리 개입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이 일은 인의를 벗어난 행동입니다. 제가 알기로 천룡성은 정도에서 벗어나는 걸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들었는데…… 아닙니까?"

"그, 그렇습니다! 맹주님은 지금 혐의를 받고 있고, 그것이 명확한 지금……."

천룡성이라는 뜻밖의 존재가 나타난 사실에 넋을 놓고 있던 하후경이 다급히 끼어들어 자운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는 그때였다.

천무진이 손을 들어 올리며 하후경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이내 짧게 말했다.

"여기 있는 분들이 모두 저한테 한마디씩 할 생각입니까? 전 한 분과 대화하고 싶은데 그쪽이 여기 대표입니까?"

하후경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자신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를 날린 것이다.

"큭큭."

하후경의 일그러진 얼굴에 멀찍이에서 관망만 하고 있던 개방 방주 장량이 웃음을 흘렸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장량으로선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유쾌했던 모양이다.

하후경의 입을 단번에 닫아 버린 천무진의 시선이 자운에게로 향했다.

물론 이곳에는 자운을 제외하고도 많은 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 그보다 배분이 높은 무림의 고수들도 많았다.

무당파의 장문인인 청허진인이나 개방의 방주 장량만 해도 그렇다. 그리고 그 둘을 제외하고도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위무를 비롯해 각 문파를 대표하는 무인들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허나 천무진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

자운, 이자를 막아야 반맹주파의 기세가 수그러든다.

자운과 시선을 맞춘 채로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천룡성은 결코 정의롭지 않은 일에 힘을 실지 않습니다."

수백 년이 넘게 지켜 온 정신.

모든 이들이 천룡성을 우러러보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사사로운 이득이 아닌 오로지 인의(人義)를 위해 싸우는 그들이었기에 모든 이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천무진의 대답에 자운이 대꾸했다.

"그러신 분이 이번 일에 나서신다 이겁니까? 뭔가 좀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맹주님은 개인의 욕심을 위해 자신의 수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선 겁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자운의 눈동자는 말하고 있었다.

그저 막무가내의 말이 아닌 증거를 보여 달라고.

천무진 또한 쉽사리 넘어갈 일이 아님을 알기에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지금 의심받고 있는 그 별동대 안에 제가 있었거든요."

자신 또한 별동대에 속해 있었다는 천무진의 발언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놀란 이들을 향해 천무진은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전 얼마 전부터 무림맹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홍천관 소속 무인 무진이라는 이름으로요. 물론 이걸 도운 분이 바로 맹주님입니다. 그리고 제가 정체를 숨기고 무림맹에 들어온 이유는 바로 이번 별동대의 일정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천무진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회의장 내부에 있는 이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로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천룡성 소속의 인물이 정체를 숨기고 무림맹에 들어와야 할 정도의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제가 쫓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십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만 명의 고아들을 납치했고, 그 아이들을 실험의 용도로 사용하며 잔인한 방법으로 죽게 만드는 사악한 집단입니다."

천무진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맹주파는 물론이고 반맹주파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금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냥 좌시하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사실 저번 회의에서도 맹주인 추자후가 직접 언급했던 부분이다.

허나 이번엔 다가오는 무게감이 그때완 많이 달랐다.

당시에 참석했던 자들과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 다르기도 했고, 그때는 이렇게 확실한 숫자를 언급하지 않아 그 사건의 경중이 그리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다른 이들도 아닌 천룡성이 나선 일.

그만큼 이 사건이 큰일이라는 느낌을 주는 효과도 있었다.

천무진이 웅성거리는 그들을 향해 재차 말을 꺼냈다.

"이번 별동대의 임무는 바로 그들을 타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기의 목적은 어느 정도 성사시켰고, 그로 인해 수백에 달하는 아이들을 구해 냈습니다."

"오오."

아이들을 구해 냈다는 말에 누군가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맹주파의 얼굴에는 감추기 어려울 정도로 화색이 돌았다.

반맹주파 쪽으로 돌아섰던 일부 수장들의 표정이 복잡해졌고, 중도적인 위치를 취하고 이들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완전히 돌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자운이었다.

그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지금 하신 말이 맞다 칩시다. 그럼 왜 별동대가 전멸당한 겁니까? 그곳에 천룡성의 분께서 있으셨는데 별동대가 전멸했다는 건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군요. 저희 쪽 증인들에게서 천룡성의 도움에 대해서는 일절 들은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핵심을 짚고 들어오는 자운의 말.

순간 들썩이던 분위기가 확 하고 가라앉았다.

이런 상황에서 곧바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고 들어오는 자운의 모습에 천무진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 이자가 반맹주파의 수장이 되었는지 알 법하군.’

단순히 무공에만 재능이 있는 자가 아니다.

머리도 상당히 빠르게 돌아가고, 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역시 잘 아는 자다.

천무진이 담담하게 답했다.

"광서성에서의 일을 해결하고 전 그들의 본거지를 섬멸하기 위해 움직였으니까요."

천무진의 대답을 듣는 순간 자운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가 먹이를 문 맹수처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한마디로 자리를 비우셨다, 이거군요. 맞지요?"

"그랬습니다."

"그럼 그 이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증인이 되어 주실 수 없다는 소리군요?"

"그것도 그렇군요."

"지금 그래 놓고 맹주님에게 아무런 죄도 없다는 증인으로 나서시겠다고 한 겁니까?"

기가 차다는 듯이 말하는 자운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시늉을 하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이들을 가볍게 스윽 둘러봤다.

지금까지 해 온 대화들이 모두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모두에게 각인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굳이 그가 이토록 더 크게 행동을 취하는 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였다.

천무진에 대한 신용도를 더욱 떨어트려, 그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쉽게 믿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당연히 천무진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엔 불신이 서렸다.

결론적으로 그는 아무런 것도 보지 못했고, 그런 그가 증인으로 나선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자운이 말을 이었다.

"후우, 아쉽게도 그렇다면 증인이 되어 주시긴 어렵겠군요. 우선 무림맹의 회의고 저희끼리 마무리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 잠시 빠져 주시면……."

그때였다.

천무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내민 증인들의 발언이 그리 결정적입니까?"

"그럼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합니까? 맹주님의 말? 아니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천룡성 무인님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 저도 슬슬 제대로 된 증인을 내세울까 하는데 말입니다."

"……증인이요?"

슬쩍 표정을 찡그리긴 했지만 자운은 애써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죠."

말을 끝내자 입구에 서 있던 무인이 조금 더 문을 열었다.

이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서는 일련의 무리들.

그리고 그 안에는…… 별동대의 수장 이지강과, 함께 떠났던 무인 몇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별동대의 생존자 다섯과, 백아린이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처투성이의 모습들.

무척이나 지친 모습에 행색들은 남루했지만 분명히 그들이었다.

흘러가는 이 모든 상황을 불편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남궁위무가 들어선 이들을 바라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안에 죽었을 거라 여겼던 남궁세가의 무인 둘 중 한 명인 남궁윤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 윤이가 아니냐."

놀란 그가 말을 꺼냈을 때였다.

남궁위무를 발견한 남궁윤이 포권을 취하며 가문의 어르신에 대한 예를 갖췄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남궁위무가 채 말을 잇지 못할 때였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선 이지강이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털썩.

무릎을 꿇은 이지강이 예를 갖추며 추자후를 향해 소리쳤다.

"별동대 수장 이지강, 무림맹주님을 뵙습니다!"

우렁찬 그의 목소리가 회의장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 이지강을 바라보던 추자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서둘러 단상을 날듯이 뛰어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거처에 구금되어 있는 그 긴 시간 동안 하루하루 이지강을 떠올리며 마음 아파했다.

자신의 명령이면 그게 무엇이든 앞장서 주었던 충성스러운 수하.

그가 살아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얼마나 기뻤던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살아 있는 이지강을 보게 되자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순식간에 이지강에게 다가간 추자후가 몸을 굽혀 무릎을 꿇고 있는 그와 마주했다.

추자후의 손이 이지강의 어깨를 부둥켜 잡았다.

고개를 치켜든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추자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고맙네. 살아 있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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