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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92화 (92/293)

92화. 자모충 ― 적이다 (2)

중원을 대표하는 의원은 셋이었다.

정파의 의선(醫仙)과, 마교의 마의(魔醫). 그리고 바로 신의라 불렸던 적면신의.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신의가 사라졌다.

이야기는 많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여겼다. 나이도 많았고, 세상에서 그의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명망 높은 의원이었던 그가 이곳 비밀 거점에 숨어 살고 있었다.

그것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실험을 자행하며.

충격적인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바로 이곳 사해도의 뒷정리였다.

혈라신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있던 적면신의를 제압한 직후 비밀 공간 안에 있던 남은 사해도 무인들 모두를 제압했다.

그들을 쓰러트린 후 천무진과 백아린은 그 안에 갇혀 있는 아이들을 구해 냈다.

그렇지만 그 숫자는 고작 백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매번 천 명 가까운 숫자의 아이들이 주기적으로 이곳 사해도로 보내졌다. 그런 일들이 일 년에 서너 번씩 벌어졌지만, 결국 구해 낼 수 있는 건 운 좋게 살아 있는 이 아이들이 전부였다.

언제나 그렇게 많은 인원들이 들어왔다는 말은 곧 그 시간 안에 그만큼 죽었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대부분이 이곳에서 실험을 당하다 죽었고, 또 일부는 혈라신이 말했던 것처럼 어딘가로 끌려가서 그들의 인형이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간신히 백여 명의 아이들을 구해 내긴 했지만 그들의 상태는 하나같이 좋지 못했다.

어차피 죽어야 할 실험물이라 생각해서인지 관리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식사나 물을 공급받지 못했고, 각종 병에 걸려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사람을 지배하는 연기에 계속 노출되며 심신이 망가진 탓인지 대부분이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서둘러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지금 이곳이 섬이라는 점이었다.

단엽, 한천과 다시금 조우한 천무진이 말을 꺼냈다.

"우선 잡아 둔 흑마련 놈들은 그렇다고 쳐도 아이들은 최대한 빠르게 사해도 바깥으로 빼내야 할 것 같은데."

"상태가 그렇게 안 좋습니까?"

"최악이야."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돌아오는 천무진의 대답에 한천이 표정을 구겼다.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 대답만으로도 상황이 좋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함께 돌아온 백아린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선 이 섬부터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여기서는 치료할 방도가 없으니까요."

"그건 아는데…… 이 많은 아이들을 끌고 나갈 방법이 있을까?"

이곳 사해도에는 흑마련이 이용하는 많은 배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의 크기는 무척이나 컸고, 그들끼리 배를 움직이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천무진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긴 백아린이 이내 빠르게 해답을 내놨다.

"이거 어때요? 흑마련 무인들 중 일부를 쓰는 거죠."

"저들을 이용한다고?"

"네, 많이도 필요 없어요. 열 명이면 충분할 테니까요. 그들을 이용해 배를 광서성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리고 곧바로 저희 적화신루가 움직여 실력 있는 의원들을 불러 모으죠."

"선장 역할은 제가 하겠습니다. 배를 몰아 본 경험이 좀 있으니까요."

옆에 있던 한천이 뱃머리는 자신이 맡겠다며 나섰다.

이곳 사해도로 올 때야 지키고 있을 무인들 때문에 직접 배를 몰지 않고, 굳이 복잡하게 상단의 선박에 숨어서 들어왔지만 돌아갈 때는 다르다.

날씨만 나쁘지 않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 게다.

그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단엽이 백아린에게 물었다.

"가능하면 광서성에서 좀 동쪽으로 가 줄 수 있겠어?"

"그건 왜?"

"왜긴. 아이들을 지켜야 할 거 아냐."

단엽은 생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 온 그들이라면 증거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그냥 살려 두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렇다면 아이들을 그냥 마을에 두는 건 위험하다.

그리고 적화신루에게 맡겨 둔다 해도 아이들을 지켜 낼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두 사람의 무위는 정말 믿을 수 없이 놀라웠지만…… 적화신루 자체만 본다면 그 무력이 그리 빼어난 집단은 아니다.

광서성에서 최대한 동쪽으로 가 달라고 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광서성의 동쪽은 운남성과 붙어 있고, 그곳에는 대홍련의 거점이 있었으니까.

단엽이 말을 이었다.

"아이들은 우리 대홍련이 지킬게."

"……좋은 생각이야."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그리 진행되자 옆에서 있던 한천이 물었다.

"그럼 여기 있는 나머지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숫자가 제법 됩니다."

천무진 일행에게 죽은 숫자도 적지 않았지만, 흑마련 자체의 인원수 또한 꽤나 많았다. 제압당한 채로 갇혀 있지만 그들 모두를 배에 태우고 이동하는 건 무리였다.

백아린이 곧바로 대답했다.

"놈들까지 데리고 갈 순 없으니 혈도를 제압하고 우선 여기에 둬야 할 것 같은데. 나가자마자 사람을 모아서 여기 있던 놈들을 모두 추포하는 식으로 마무리 짓자고."

"예, 그렇게 하죠. 그럼 제가 다시 혈도들을 점혈해서 한동안 절대 못 깨어나도록 만들어 두겠습니다. 며칠 정도야 굶겠지만…… 그 정도야 뭐."

실험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진 않았다 해도 아이들을 납치하고, 악행을 벌이는 데 도움을 주었던 자들이다. 그들 또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말한 대로 배를 몰아야 하니 고분고분 말 잘 들을 것 같은 놈들 열 명 정도만 추려 오고."

"그러죠, 대장."

"우리는 아이들을 배에 옮기고 있을게. 부총관은 일 끝나는 대로 우리가 타야 할 배 한 척을 제외하고 다른 건 모두 불태워. 조그만 나룻배 하나도 남기지 말고."

혈도를 점혈해서 꼼짝 못하게 할 예정이지만 혹시라도 벌어질 수 있는 만약의 상황을 방비하기 위해서다.

배를 모두 불태우면 꼼짝없이 섬에 갇혀야만 했으니까.

백아린의 명령에 한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가 옆에 있는 천무진과 단엽을 향해 말했다.

"그럼 저희도 움직이죠."

말을 끝낸 세 사람은 곧장 흑마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그곳에 있는 비밀 거점에 갇혀 있던 아이들을 모두 자신들이 탈 배로 옮기기 시작했다.

백여 명에 가까운 숫자였기에 몇 번을 오가고서야 모든 아이들을 배에 싣는 일이 끝났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천 또한 일을 끝내고 배에서 기다리는 일행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편에서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열 명의 흑마련 무인들이 있었다.

선두에 서서 배를 향해 다가오는 그를 향해 뱃머리에 앉아 있던 백아린이 퉁명스레 소리쳤다.

"늦어!"

"어휴, 그 많은 일을 혼자서 다 하는데 이 정도면 엄청 빠르게 끝낸 거죠."

"됐으니까 빨리 올라와. 뒤편에 있는 그자들이 부총관이 뽑은 사람들이야?"

"네, 워낙 험상궂게 생긴 놈들 일색이라 개중에 고르느라 좀 힘들었습니다."

특유의 능글거리는 말투와 함께 한천이 웃어 보였다.

백아린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을 때였다. 한천이 배 위에 오르며 뒤편에 있는 이들에게 빨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뭣들 하십니까? 어서 오라니까요."

웃으며 정중하게 내뱉는 말이었지만 그걸 보는 이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부드러운 모습 뒤에 감춰진 진면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흑마련 무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때의 그는 야차와도 같았다.

모두가 배에 타기 전에 서로 눈치를 보는 그때 한천의 입가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들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배 위로 올라섰다.

그들은 한천의 앞에 일렬로 도열한 채로 명령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흑마련 무인들의 모습을 난간에 앉아서 보고 있던 단엽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주 기가 바짝 들어갔네."

단엽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한천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 출항입니다.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칩시다."

그의 유쾌한 목소리와 함께 사해도에 남은 유일한 한 척의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휘장 안의 인물이 꿈틀했다.

늦은 시각, 갑작스레 느껴진 인기척 때문이었다. 그자가 막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문 건너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르신 깨어 계십니까?"

"이 야밤에 무슨 일이야."

대답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다소 짜증이 묻어 있었다.

종일 꽤나 바삐 움직였던 탓에 오늘 하루만큼은 좀 푹 쉬고 싶었던 그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시각 갑작스레 찾아온 수하의 방문으로 인해 그의 휴식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퉁명스러운 대답에 수하가 다급히 대답했다.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들어와."

승낙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수하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곧바로 부복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상대를 향해 휘장 너머의 인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이리도 급히 찾아온 게냐."

"천무진이 일을 벌였습니다."

"고작 그놈의 일로 내 잠을 깨웠다고?"

천무진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

평소 자신의 상관이 천무진을 어찌 생각하는지 잘 알기에 사내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둘러 자신이 온 이유를 그에게 설명해야만 했다.

"천무진이 청아원을 박살 냈습니다."

"……뭐?"

심드렁한 어투로 반쯤 누워 있던 휘장 너머의 인물이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천 무림맹에 있던 천무진이 별동대에 소속되어 움직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뭔가 의심스러웠기에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목적지가 운남이라는 말에 청아원 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제야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애송이에게…… 내가 당했구나."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

동쪽으로 가는 듯하다가 서쪽을 친다는 전술이다.

분한지 이를 부득 갈던 휘장 너머의 인물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청아원을 안 거지?"

그것과 관련된 정보는 일체 흘리지 않았거늘 천무진이 움직인 것이다.

허나 지금 중요한 건 청아원이 아니었다.

휘장 안에서 심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사해도도 드러난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청아원을 무너트렸다고 해도 사해도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당시에 함께 움직였던 별동대가 곧바로 복귀하고 있다니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수하의 말에 휘장 안의 인물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 그럴 게야.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해. 청아원을 잃은 건 회복할 수 있는 문제지만 사해도까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청아원은 분명 중요한 거점이었다.

허나 그들이 손가락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사해도는 팔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손가락 하나 잃는 정도야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지만 팔 자체가 잘려져 나간다면 그 타격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스스로에게 절대 그럴 일이 없다 다독이던 그가 수하를 향해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사해도 쪽에 사람을 보내 무슨 이상한 낌새는 없었는지 확인하도록 해. 그리고 뭔가 있다면 서둘러 본거지를 옮길 채비까지……."

막 말을 이어 가던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건 또 다른 수하였다.

그가 다급히 부복하며 소리쳤다.

"특급으로 분류되는 전서구가 날아들어 급히 왔습니다. 휴식을 방해하여 송구합니다."

"됐으니 가져와 봐."

이미 잠은 깬 지 오래.

휘장 안 인물의 명령에 전서구에 달려 날아온 서찰을 가져온 수하가 서둘러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휘장 안에서 빠져나온 손이 서찰을 가로챘다.

수하에게서 받은 서찰을 펼친 그자가 갑자기 움찔했다. 그러고는 이내 참기 어려웠는지 서찰을 와락 움켜쥐었다.

청아원이 들통나서 사라졌다는 말을 전해 들은 직후 날아든 소식.

그건…….

심각한 분위기를 느껴서인지 먼저 와 있던 수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르신 무슨 일입니까?"

"……사해도가 무너졌다."

"예? 그, 그게 사실입니까?"

으드득!

휘장 너머에서 풍겨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에 이곳에 자리한 두 명의 수하들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무시무시한 공력이 주변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휘장 너머에서 그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무진……!"

너무도 우습게 여겼던 상대.

그런 자에게 지금 자신이 연달아 얻어맞아 버렸다. 더군다나 이번에 들어온 건 상당히 아팠다.

사해도는 자신들의 거사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거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같은 실험을 하고 있는 곳이 사해도 하나만은 아니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입은 이 피해는 상당히 컸다.

그가 중얼거렸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계속 날뛰는구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당해 줄 수는 없었다.

맞았으면 갚아 준다.

그것이 바로 상대에게 얕보이지 않는 방법이니까.

그가 입을 열었다.

"일전에 준비해 두라고 한 일은 어찌 되어 가고 있지?"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는 다 된 상태입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곧바로 실행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연락을 취해. 이제 움직일 때라고."

"알겠습니다."

"아, 작전의 일부는 바뀐다. 그에 맞춰 계획도 조금 수정하도록 해."

"어떻게 말입니까?"

물어 오는 수하의 질문에 휘장 안쪽의 인물이 잠시 침묵하다 서서히 입을 열었다.

"청아원을 건드린 별동대가 곧장 복귀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아마 그 안에 천무진은 없겠군. 그놈은 사해도로 갔을 테니까."

"사해도를 무너트린 것이 천무진이 맞다면 분명 그럴 겁니다."

"그놈일 게야. 확실해."

위치나, 모든 걸 보았을 때 의심할 수 있는 건 오직 천무진뿐이다.

그런 지금 그가 내릴 수 있는 선택.

휘장 안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 별동대 놈들의 목숨으로…… 무림맹주를 죽인다."

수하들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사내 하나가 짧게 답했다.

"명 받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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