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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87화 (87/293)

87화. 천인혼 ―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1)

자신이 보낸 삼귀의 목을 들고 나타난 상대의 모습을 보며 흑마신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 하나에게도 점점 아군의 머리 숫자가 줄어들고 있던 상황에 나타난 또 한 명의 적.

‘귀찮게 하는군.’

거기다가 천무진의 말을 듣고 안 사실이지만 지금 나타난 자를 제외하고도 다른 이들 또한 존재한다는 것 또한 맘에 걸렸다.

소란이 커지며 외부에서 흑마련의 무인들이 알아서 나타나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정도의 지원으로는 모자라다.

허나 지원 병력을 불러 모으기 위해 움직였던 삼귀가 한천의 손에 죽어 버린 지금 흑마신은 새로운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들을 불러올 수 없다면…… 이쪽이 움직인다.’

상황이 다소 불리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식간에 쓸려 나갈 수준은 분명 아니다.

천무진에게 쓸려 나간 숫자가 대략 백여 명이 넘었지만, 소란을 듣고 추가적으로 온 이들 덕분에 이곳에는 지금 처음 있던 머리 숫자와 비슷한 이백에 달하는 무인들이 있다.

흑마신은 보다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조금 더 피해를 입더라도 모든 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흑마련의 중앙 거점으로 움직여야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당장에 등을 보여야 하니 순간적으로 피해는 커지겠지만, 지금 결단이 늦어지면 몇 곱절은 더 큰 타격을 입게 될 상황이다.

마음을 정하자 흑마신은 빠르게 흑사귀의 생존자인 일귀와 이귀에게 전음을 날렸다.

『전장을 바꾼다. 중앙 거점으로 움직이며 흑마련 무인들에게 지금 이 상황을 알려야 해. 최대한 피해 없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진형을 구축하도록.』

전음을 전해 들은 두 사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로서도 지금 흑마신의 결정은 최선의 선택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무진에게 연신 달려들던 흑마신이 슬그머니 뒤로 빠졌고, 일귀가 기다렸다는 듯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지원군이 곧 합류한다! 최대한 빠르게 조우할 수 있도록 천천히 물러서며 중앙 지역으로 움직인다! 등은 보이지 말고, 싸우며 이동하도록!"

우르르 도망치게 된다면 결국 피해는 더 클 거라 생각한 일귀가 최대한 시간을 끌 수 있도록 싸우며 움직이라는 명을 내렸다.

물론 흑마신과 자신, 그리고 이귀까지 빠르게 빠져나가고 선두가 무너지면 대부분의 인원들이 등을 보일 것은 자명하다.

허나 그 틈을 이용해 자신들은 보다 빠르게 중앙 지역으로 가서 다른 무인들과 합류할 수 있다.

일부의 무인들을 희생양으로 던질 속셈인 것이다.

일귀의 명령에 뒷걸음질 치는 와중에도 몇몇이 천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앙!

천무진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다가오던 이들이 거짓말처럼 주변으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시선은 이미 뒤쪽으로 사라지고 있는 흑마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자마자 천무진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먼저 중앙 지역으로 도망칠 생각이로군.’

흑마신이 점점 멀어져 갔지만 천무진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에서 멀어지는 건 천무진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고아들이 있는 비밀 공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일부러 바깥으로 움직였던 천무진이 아니던가.

물론 그만큼 많은 숫자의 무인을 감당해야 했지만 그건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곳에 있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막 옆으로 치고 들어오며 길을 여는 한천, 그리고 곧 도착할 다른 두 명까지.

천무진은 곧바로 검을 든 채로 앞을 향해 성큼 걸어 나갔다.

선두에 서 있던 이들은 그가 다가오자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너무도 일방적인 싸움이다.

자신들 수십이 죽어 나가며 얻어 내는 건 고작 자그마한 생채기 두어 개 정도가 전부다.

천무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비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흡사 천둥소리처럼 크게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움찔.

길을 막아서고 있던 무인들이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정말로 몸을 옆으로 틀었다. 허나 이내 그들은 이를 악물었다.

이곳은 사해도, 그리고 자신들은 사파에서 손꼽히는 세력 중 하나인 흑마련의 무인들이다.

이렇게 꼴사납게 당할 수는 없었다.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 그때 막 떠나려고 하던 이귀가 마지막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뭣들 해! 당장 막아!"

뒤편에서 들려오는 명령에 몇 명이 엉거주춤 앞으로 나서는 그때였다.

촤악! 촤악!

소리와 함께 가슴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갔다.

동시에 앞으로 걸음을 옮기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뒤편으로 나가떨어졌다.

너무도 쉽게 다섯 명을 베어 버리고는, 그 시체 위를 지나서 다가오는 천무진의 악귀와도 같은 모습은 명령에 용기를 얻고 걸음을 옮기던 이들의 발목을 다시금 붙잡았다.

천무진은 이가 나가 버린 검을 바닥으로 휙 집어던지고는 인근에 나뒹구는 아무런 무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별거 아닌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가까이 있던 이들은 놀란 듯 퇴로를 확인했다.

허나 적은 천무진 하나가 아니었다.

부웅, 붕.

가볍게 날아오른 한천의 발이 아래에 있는 무인들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발아래가 폭발하며 그 범위 안에 있던 자들은 넝마가 되어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길을 만들어 낸 한천이 소리쳤다.

"가시죠! 따라붙는 놈들은 최대한 제가 막겠습니다!"

"부탁할게."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앞에 있던 이들이 황급히 각자의 무기를 겨누었지만, 애초에 그들 정도로 천무진을 막아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번쩍!

천무진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강이 사방으로 요동쳤다.

쿠카카캉!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사방으로 나자빠지는 그들 사이로 천무진이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가 움직이는 길목을 따라 한천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스스슥.

검이 곧장 천무진이 움직이는 길을 향해 위력을 떨쳤다. 순식간에 중앙이 뚫렸고, 선두가 박살이 나자 자연스레 버티고 서 있던 흑마련의 무인들은 사방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통솔을 해야 할 흑마신과 흑사귀들은 이미 중앙 지역으로 가기 위해 도망친 상황.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쿠웅!

천무진의 검이 떨어지면 그곳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거기다가 뒤를 막아 주는 한천의 도움까지 있자 그는 거칠 것 없이 정면으로 쭉 뚫고 들어가 단번에 흑마련의 중심으로 향할 수 있었다.

비밀 장소에서 멀어지는 건 천무진 또한 바라던 바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흑마신이 흑마련의 모든 무인들을 결집시키는 것까지 두고 볼 요량은 아니었다.

빠앙!

천무진의 검이 폭발하듯 내력을 쏟아 냈고, 동시에 그곳은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커다란 구멍이 생겨 버렸다.

주변으로 쓰러져 나가는 흑마련의 무인들.

"죽어!"

고함 소리와 함께 옆에서 짧은 검을 든 무인 하나가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채 검이 닿기도 전에 천무진의 손이 먼저 적의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퍽.

사내를 가볍게 바닥에 처박아 버린 천무진이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으로도 많은 숫자의 무인들이 모습을 보였지만 그들은 쉽사리 천무진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천무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에 겁을 먹은 것이기도 했지만, 중간에서 연신 움직여 대는 한천 덕분이기도 했다.

‘쓸 만한데.’

곁눈질로 한천의 움직임을 확인하던 천무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쏟아 내는 무공이 엄청나게 파괴적이진 않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움직임이다. 작은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얻는 특유의 검법으로 적들을 요리조리 휘저어 대고 있었다.

왼손을 사용하는 좌수검이라는 특이점을 이용해 방어하기 힘든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무공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이 밑바탕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움직임이다.

그를 믿어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자 천무진은 더욱 거칠 것 없이 정면으로 밀고 들어갔다.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리려던 흑마련의 무인들이 성난 호랑이처럼 달려드는 천무진의 모습에 기겁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마, 막아!"

몇몇 무인들이 황급히 검을 겨누며 천무진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들 정도로 막아 내기엔 상대가 좋지 못했다.

천무진의 검이 그들의 정중앙으로 날아들었다.

쾅!

그들의 몸이 사방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중앙 지역으로 빠르게 도망쳐 수하들을 규합하기 위해 움직이던 흑마신은 뒤편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사방으로 날아가고 있는 수하들의 모습이었다.

‘미친 자식.’

천룡성의 무인이라더니 그 무력이 나이에 맞지 않게 실로 놀라운 수준이다. 그에 반해 자신이 이끌고 온 이들의 수준은 기껏해야 일류 정도 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이들로 우내이십일성 수준의 무인을 막아 내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다.

죽어 나자빠지는 수하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혔지만, 지금으로선 서둘러 중앙 지역으로 가는 것이 먼저였다.

그곳으로 가서 퍼져 있는 흑마련의 고수들을 불러 모아야 지금 날뛰고 있는 천룡성의 무인이라는 저자와, 그의 동료들을 막아 내는 것이 가능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

다만 문제는 생각보다 당장 자신의 뒤를 쫓는 두 무인의 능력이 빼어나다는 거다. 이 속도라면 자신들이 입을 피해는 생각보다 훨씬 클 것 같았다.

‘조금 더 서둘러야겠어.’

흑마신은 급히 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옆에 있는 흑사귀의 생존자인 일귀와 이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귀, 외곽을 돌면서 곧바로 흑마련의 주요 부대들을 집결시켜."

"알겠습니다, 련주님."

"이귀 넌 지금부터 추가 병력들이 천룡성 놈을 막기 위해 개입하기보다는 중앙 지역 쪽으로 오도록 유도해."

"넵, 그리하겠습니다."

피해는 지금 저곳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로 족하다.

빠르게 명령을 내리며 중앙 지역을 향해 내달리는 흑마신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뿌드득.

오늘 흑마련이 입은 피해는 어떤 걸로도 환산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손가락에 꼽히는 사파의 세력이라는 위명 또한 오늘부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정도라면 어떻게든 그 피해를 수습이라도 해 볼 수 있겠지만, 이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흑마신의 옆에서 함께 달리던 일귀와 이귀가 곧바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양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더욱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수십의 수하들만을 대동한 채로 움직이던 흑마신.

그런데 안쪽으로 향하던 그의 코로 진한 피 냄새가 밀려들었다. 동시에 몸을 튼 흑마신의 시야에 의외의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대로 위에 많은 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뭐야 이건.’

중앙 지역이 점점 가까워진 상황에 만나게 된 그들은 바로 흑마련의 무인들이었다.

문제는 그 많은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쓰러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쓰러진 이들의 위에 서 있는 한 쌍의 남녀.

두 사람의 정체는 바로 백아린과 단엽이었다.

커다란 대검을 쥔 채로 등을 돌리고 있던 백아린이 힐끔 뒤편을 바라봤다.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자가 흑마신이야?"

"맞을걸. 예전에 본 적이 있거든."

옆에 있던 단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엄청난 숫자의 무인들을 쓰러트린 채로 두 사람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흑마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흰……."

천무진의 입에서 나왔던 나머지 두 사람이라 칭한 존재가 바로 이자들일 거라는 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뭣 빠지게 도망치고 있는 걸 보니 내 주인을 만난 모양이니 굳이 우리가 적이라는 소개는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대로를 가득 채운 채 쓰러져 있는 수하들을 보는 흑마신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중앙 지역으로 가기 위해 도망치던 와중에 뒤가 막혀 버렸다.

조금만 더 가면 아군들을 불러 모으기 좋은 장소가 나타날 터인데, 그 전에 오히려 포위된 양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기가 파 놓은 함정에 제 스스로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상황만으로 이미 기가 찰 정도인데 문제가 또 있었다.

그건 바로 눈앞에 있는 상대였다.

여자 쪽은 생면부지의 인물이었지만 사내의 정체는 흑마신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왠지 모를 낯익은 얼굴에 기억을 더듬던 중 마침내 상대의 정체를 떠올린 것이다.

"설마 네놈…… 단엽이냐?"

"쯧, 역시 알아보네."

사파의 회합 때 잠시 스치듯 본 일이 있었다.

꽤 오래전의 일인지라 기억이 안 날 법도 하련만, 아쉽게도 단엽은 그리 쉽게 잊힐 외모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도 두각을 드러내던 단엽을 흑마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순순히 수긍하는 단엽을 향해 흑마신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감히 날 건드려? 그러고도 네놈이 무사할 듯싶더냐!"

"……감히?"

단엽이 피식 웃었다.

그가 이곳에 쓰러져 있는 수많은 무인들을 신나게 두들겨 팬 자신의 주먹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런 되도 않는 사파 무리 하나 이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본데…… 네 눈앞에 있는 상대가 누군지, 그 뒤에 누가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대홍련과 흑마련.

같은 사파라고는 하지만 그 급이 다르다.

흑마련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파 세력이라고는 해도 애초부터 상위 세 개와 견준다면 차이는 어마어마했으니까.

순간 단엽이 발을 굴렀다.

쿠웅!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그 충격이 주변을 뒤덮었다. 진동이 가라앉으려는 찰나 단엽이 입을 열었다.

"난 단엽, 대홍련의 부련주 단엽이다. 그럼 이제 알겠지? 누가…… 감히인지."

말을 내뱉는 그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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