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확신 ― 투입할 수 없습니다 (2)
마차 한 대가 남쪽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그 마차 안에 자리한 이들은 다름 아닌 천무진 일행이었다. 지금 그들은 바다와 닿아 있는 남양이라는 마을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들이 남양으로 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사해도로 들어갈 배를 구하기 위해서다.
청아원의 일이 마무리된 상황에서 천무진은 결국 자신의 일행들만 끌고 움직여야 했다. 추가 병력을 받은 후에 움직이자는 이지강의 강한 만류가 있었지만 천무진은 거절했다.
자신이 아는 그들이라면 제아무리 이곳 청아원의 일을 숨기려 한다고 해도 금방 상황을 알아차릴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그들이 도망치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알기에 청아원의 뒤처리를 이지강에게 모두 맡긴 채로 이렇게 네 사람만 달랑 목적지로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재밌게도 흑마신의 거점인 사해도에 가는 이들의 얼굴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가 평온해 보였다.
천무진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백아린은 그곳에서 가져온 비밀 장부를 다시금 확인했다. 거기다 정말 별생각 없어 보이는 한천까지.
단엽은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세 사람을 바라보다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어이, 지금 우리가 가는 사해도가 어떤 곳인지는 알아?"
장부를 바라보던 백아린이 힐끔 그에게 시선을 주고는 이내 짧게 답했다.
"대충은?"
"설마 이번에도 내가 어떻게 해 줄 거라 생각하고들 있는 건 아니지?"
일전에 무림맹의 별동대들이 구천회에게 잡혔을 때는 단엽의 힘을 이용해 쉽게 빠져나왔다. 같은 사파이자, 대홍련의 부련주라는 직책이 있었던 덕분이다.
허나 이번엔 아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천이 화색을 띠며 물었다.
"오, 그게 됩니까?"
"아니 안 돼."
"에이, 괜히 기대했네."
"그게 되겠냐? 그놈들은 사파에서도 골칫거리라니까. 말귀가 통하는 놈들이 아니야."
흑마신이 이끄는 사파의 무리를 사람들은 흑마련(黑魔聯)이라 일컬었다. 이들은 사파를 대표하는 네 개의 세력 바로 뒤에 순위로 분류될 정도로 큰 힘을 지녔다.
거기다 흑마련을 상대하는 데 있어 가장 까다로운 점은 바로 이들이 섬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신들의 거점인 사해도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문제였다.
자신들의 지역에서만 싸운다는 말이었고, 그곳이 천연의 요새나 다름없는 섬이라는 점도.
흑마련의 대표 고수는 당연히 흑마신이다.
그렇지만 그를 제외하고도 위험한 고수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눈여겨볼 이들은 흑사귀(黑四鬼)라 불리는 흑마신의 최측근 네 명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림에 이름이 쟁쟁한 고수들이었다.
단엽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그 흑마련 놈들을 바깥으로 빼낼 수만 있다면 진짜 별거 아닌데 말이야. 하여튼 그놈의 사해도가 문제라니까."
사해도에 대해서는 외부에 크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곳에 흑마련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들어서는 초입에 꽤나 많은 함정들이 있어서 외부의 침입자를 완벽히 차단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얼거리는 단엽을 향해 한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뭡니까? 설마 긴장한 겁니까?"
"긴장은 무슨! 그냥 좀 귀찮겠다 싶은 거지."
단엽이 발끈했다.
하지만 사실 아니라고 말은 하면서도 단엽은 이번 여정이 생각보다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흑마련이 만만치 않다는 걸 잘 알아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 그곳으로 향하는 이들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거다.
천무진과 한천, 그리고 이번에야 실력을 보게 된 백아린까지.
한 명 한 명 허투루 상대할 만한 이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들 별걱정 없어 보이는 지금 자신만 괜히 전전긍긍하는 것이 어쩐지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단엽은 깍지를 낀 채로 마차의 벽에 기댔다.
그가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적어도 이 조합이라면 어디다 던져 놓아도 쉽사리 당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 * *
"거긴 안 갑니다."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이었다.
예상을 했는지 백아린은 곧바로 말을 받았다.
"금액은 얼마를 불러도 좋아요. 거기까지만 가 주시면 충분히……."
"어휴, 아무리 돈을 많이 주셔도 마찬가집니다. 거길 가는 미친놈은 여기 없을 겁니다."
중년의 선주는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목적지인 남양에 도착하고 어느덧 한 시진이 훌쩍 넘었다. 그 시간 동안 천무진 일행은 사해도로 들어갈 배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배는 꽤나 많았지만 그중 누구도 사해도로 가려는 이가 없었다.
"끄응, 이거 나룻배를 구해서 직접 노를 저을 수도 없고."
한천이 골치 아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거리도 제법 멀었고, 거기다가 강이 아닌 바다다. 작은 나룻배로 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결국 배를 구하지 못한 천무진 일행은 우선 쉬기 위해 객잔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객잔에 도착한 이들은 방을 잡고 그곳에서 식사를 주문했다.
자리에 둘러앉은 상황에서 백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해도로 들어갈 배를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거 생각보다 더한데요?"
"그만큼 이곳 사람들이 흑마련을 두려워한다는 소리겠지."
천무진의 말대로였다.
이곳 남양은 사해도와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당연히 흑마련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적화신루를 통해 배를 구하려고 해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아, 단엽 네 쪽은 어때?"
백아린의 질문에 단엽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여기는 우리 세력권이랑 거리가 좀 있어서 나도 바로는 힘들 것 같은데."
"흐음, 결국 어떻게든 여기에서 해결을 봐야 한다는 말인데……."
백아린이 골치 아프다는 듯 중얼거릴 때였다.
점소이 소년이 주문했던 음식을 가지고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쟁반 위에 담겨져 있는 음식을 내려놓는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꼬마야."
"예?"
아직 어린 티가 물씬 나는 소년은 자신을 부르는 천무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가 물었다.
"혹시 인근에 무슨 상단이라고 있지 않았나?"
"상단이요? 음……."
잠시 고민하던 점소이 소년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남양에 있는 상단은 아닌데 인근 마을에 두 개 정도 있어요."
"그 상단들 이름이 뭐지?"
"금황상단(金皇商團)이랑 남해상단(南海商團)이요."
"그래, 고맙다."
말과 함께 천무진은 동전 몇 개를 점소이에게 건넸다. 소년이 기분 좋게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별것도 아닌데요, 뭘."
점소이에게 인근에 있는 상단에 대해 묻는 천무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머지 세 명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다른 이가 있는 자리에서 물을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점소이 소년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모든 음식을 전해 주고 소년이 사라진 바로 그때였다.
궁금한 것에 대해 묻기도 전에 천무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식사 끝내고 곧바로 금황상단의 배편을 알아봐."
"네? 그건 왜요?"
되묻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찻물을 마시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들의 배가 사해도로 들어갈 거야. 금황상단은 비밀리에 흑마련과 거래하는 곳이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알아."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기에 천무진은 그냥 안다고만 말했다.
사실 이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었다.
섬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물자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금황상단이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흑마련이 필요한 식자재와, 필수품들을 거래해 왔다.
천무진이 이 같은 사실을 아는 이유는…… 저번 삶에서의 기억 덕분이다.
그때에도 천무진은 금황상단을 이용해 흑마련이 있는 사해도로 들어갔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어떻게 아냐는 질문에 딱히 할 대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저번 생에서 알았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백아린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 천무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분명 뭔가가 있지만…….
"알겠어요. 그럼 알아보죠."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백아린은 곧장 한천과 함께 금황상단의 배편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천무진은 홀로 객잔을 나와 바닷가로 향했다.
어느새 주변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바닷가.
얼굴로 밀어닥치는 바닷바람은 거칠었고, 꽤나 서늘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다를 앞에 둔 채로 천무진은 먼 곳을 응시했다. 이곳에서는 눈으로 보이지 않을 그곳, 사해도가 있는 방향을.
밤바다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파도가 철썩였다.
천무진은 말없이 선 채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다시 올 줄이야.’
그에게는 끔찍했던 기억 중 하나를 안긴 곳이 바로 사해도다. 아주 오래전이기도 했고, 정신을 조종당하던 때인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이곳에 왔었던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떠올랐다.
당시의 자신은 괴물이었다.
얼굴이 반쯤 녹아 망가지고 처음 나섰던 여정.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무서워하는 표정들이 떠올랐다. 거기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복부를 찢는 것만 같은 고통까지.
사해도에 있는 모두를 도륙했던 과거의 삶.
어쩌면 지금 또한 그때와 똑같은 일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 적어도 지금 천무진에게 흑마련은 적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허나 같은 일이라고 해도 그 의미는 달랐다.
당시엔 정체 모를 그녀와, 그녀의 뒤에 있을 그들을 위해 흑마련을 없앴지만 이번엔 다르다.
‘나를 위해서다. 이번 생에서의 모든 싸움은 모두 나를 위해서.’
지금의 정황으로 보면 분명 흑마련은 자신이 찾는 그들과 같은 편이다. 그런데 과거의 삶에서 그들은 흑마련을 제거하려 했다.
대체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의심할 수 있는 건 역시나 흑마련이 그들의 눈 밖에 났을 거라는 것 정도다.
물론 그건 한참 후의 일이겠지만.
그렇게 한참을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거기서 뭐해요?"
뒤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천무진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하얀 백의를 입은 백아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옛날 생각 중."
천무진이 짧게 대답했다.
그녀가 그런 그를 향해 다가와서 나란히 섰다.
천무진이 옆에 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단엽이 말해 주던데요. 잠깐 밤바다 보러 가겠다며 나갔다고. 저한테는 일 시켜 놓고 혼자서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백아린의 장난스러운 말에 천무진은 피식 웃었다.
"별로 좋은 시간은 아니었어. 안 좋은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거든."
"……그래요?"
말을 하며 백아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천무진의 눈동자에 감돌고 있는 어둠을 보았으니까.
그걸 알기에 오히려 농담처럼 말을 건넸던 것이다.
덕분에 한결 편안해진 어투로 천무진이 화제를 돌렸다.
"금황상단의 배편은 알아봤어?"
"네, 알아봤어요. 다행히 주기적으로 배편이 있어서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언제지?"
"내일이요."
"그나마 오늘은 쉴 수 있겠군."
다행이라는 듯 말하며 천무진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손끝에 말끔한 자신의 피부가 만져졌다.
괴물이 되어 이곳에 섰던 자신과, 지금의 자신.
백아린이 가만히 서 있는 천무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볍게 툭 쳤다.
그가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뭐해요. 단엽이랑 부총관이 술 마시자고 기다린대요. 둘이 객잔 술 전부 동나게 만들기 전에 어서 가죠."
"……그놈의 술들은."
투덜거리며 천무진은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렸다.
그때의 삶에선 혼자 흑마련 전부와 싸워야 했기에 마공을 익히게 됐다.
허나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