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연기 ― 뭐 하는 거야 (1)
적화신루를 통해 받아 온 정보.
그것은 추론의 근거가 되어 줄 뿐, 적들의 위치나 정체에 대해 밝혀져 있진 않았다.
그리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자들이었다면 이처럼 긴 시간 동안 고아들을 잡아가서 끔찍한 일들을 자행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을 터.
그렇지만 적화신루를 통해 들어온 이 정보는 분명 큰 도움이 되어 주고 있었다.
십수 년에 걸쳐 있었던 여러 가지 의심스러웠던 정황들이 간략하게나마 정리되어져 있었고, 이런 일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서찰에는 의심스러워 보이는 곳들에 대해서도 나름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 숫자는 지금 이곳 합포를 기점으로 하여 인근 마을까지 포함시켜 무려 삼십여 개에 달했다. 전부 뒤집어엎기엔 그 숫자가 많았다.
고아들을 데리고 있을 만한 공간이 있고, 주변의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이들의 숫자만 추린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이 안에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 확률이 무척이나 높았다.
서찰 몇 장은 그런 삼십여 개 정도 되는 장소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 외의 서찰에 적혀 있는 것은 놀라울 만큼 간단한 정보들이었다.
백아린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서찰을 확인하던 천무진이 이해가 안 가는지 물었다.
"이건 대체 뭐야?"
"뭐긴요. 그들을 찾을 가장 확실한 단서죠."
"이걸로 그게 가능해?"
"그럼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 가지가 뭔지 알아요? 바로 지낼 거처와 입을 옷, 그리고 식사죠."
거처야 이미 있을 터이고, 옷은 대충 물려주거나 자체적으로 만들어 쓴다 해도 단 하나 외부에서 구입해야 할 수밖에 없는 물품이 있다.
바로 음식이다.
그리고 지금 이 서찰에 적힌 것들은 그 의심스러운 이들이 약 오 년간 식료품을 거래한 장부 내역이었다.
많게는 한 번에 수백 명 이상씩 고아들이 거래가 됐다. 그 말은 곧 그만큼 입이 늘었다는 소리고, 자연스레 식료품 또한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전부를 감당하는 건 무리였을 게다.
백아린은 그걸 이용하고 있었다.
"다른 건 전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음식은 달라요. 기한이 지나면 곧바로 상해 버리니 일정 시간 이상 축척을 해 두는 것도 불가능하거든요. 식료품을 구입하는 것이 의심받을 일은 아니니 굳이 그걸 숨겨서 했을 이유도 없고요."
사람은 허름한 옷을 입는다고 죽지 않는다. 하지만 식사를 하지 못하면 사람은 살지 못한다. 실험을 위해 끌고 가는 아이들, 건강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항상 생각해 왔다.
기록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랬기에 이번 일의 결정적인 단서 또한 분명히 이 안에 있을 거라 확신했다.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방법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짧게 설명을 끝낸 백아린은 이내 서찰에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손에 쥐인 붓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긴 아니고, 여기도 아니야.’
식료품의 거래 내역을 보며 확실히 아닌 것 같다 여길 만한 몇 군데를 먼저 제외하고, 의심스러운 곳은 따로 표시를 해 뒀다.
추가적인 의뢰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지운 곳이 대략 절반 정도.
백아린은 남은 열여덟 곳의 이름을 보며 표정을 구겼다.
이것만으로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
백아린이 중얼거렸다.
"우선은 이 정도네요. 아직 너무 많은데……."
아쉽다는 듯 말하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대답했다.
"두 시진 만에 절반을 줄였어. 그리고 추가적으로 표시해 둔 곳까지 확인하면 또 많이 줄 테고. 우선 절반 가까이를 줄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야. 감시해야 할 곳이 그만큼 줄었다는 소리니까. 고생했어."
무림맹 별동대의 무인들과는 별개로 적화신루의 사람들이 인근 곳곳에 자리한 채로 수상한 움직임을 감시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처럼 절반 가까이 감시해야 할 장소를 줄인다는 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천무진의 고생했다는 말에 백아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만족은 되지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다.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을 뿐이고,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노릇이다. 이제부터 하나씩 단서를 모아 아닌 자들은 지워 나가서 결국 그들을 찾아내면 그만이니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부총관."
"말씀하시죠, 대장."
잠시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한천이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런 그에게 백아린이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서찰에서 제거한 이들에 대한 감시는 최소한으로 바꾸고, 다른 곳에 더 집중하는 식으로 운영을 변경하라고 전해 줘. 그리고 따로 표시해 둔 이들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정보 요청하고."
"넵, 그렇게 하죠."
"그럼 부탁할게, 부총관."
백아린이 건넨 서찰을 쥔 한천이 곧바로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 이후에 돌아올 답변을 통해서는 추가적으로 어느 정도를 줄일 수 있을까?
운이 좋다면 다섯 개 이내로 범위를 좁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그 이후론 직접 현장으로 뛰어도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을 집중적으로 감시하여 의심스러운 부분을 찾아내는 쪽으로 일을 진행할 생각이다.
이 모든 걸 해결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신이 찾는 그들 또한 움직일 테니까.
한천이 나가자 침상 근처에서 치치와 시간을 보내고 있던 단엽이 길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하암, 뭐야. 그럼 오늘 당장 할 일은 끝난 건가?"
"당장에는. 아직 감시할 곳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오늘은 좀 쉬어."
"그래?"
천무진의 말에 단엽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먼 여정에 단엽 또한 상당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힐끔 침상 위에 자리한 치치를 다시 한 번 바라본 그가 곧장 입구로 가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내일들 보자고."
짧은 인사를 마치고 단엽이 방에서 사라졌다.
한천에 이어 단엽이 사라지자 방 안에는 천무진과 백아린 단둘만이 남게 됐다. 백아린은 아직까지 의자에 앉은 채로 한천에게 쥐여 준 것 외의 서찰을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살펴보는 중이었다.
시선은 서찰에 박혀 있었지만 사실 지금 그녀의 신경은 다른 쪽으로 쏠려 있었다.
천무진이다.
한천이 나갈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단엽까지 나가며 단둘만이 남게 되자 백아린은 이상하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부부 연기를 하는 바람에 얼결에 같은 방을 쓰게 된 상황.
사실 처음엔 별거 아니라 생각했다.
같이 정보들을 모으며 밤을 지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느낌이 다소 달랐다.
왠지 모를 어색함에 백아린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하, 이거 생각보다 신경 쓰이네.’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안 자요?"
"자야지. 그런데 그쪽이 누워야 눕지."
천무진의 대답에 백아린은 크게 당황했다.
단언컨대 살면서 이만큼 당황했던 적은 없다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부, 부부 연기를 한다고 해서 굳이 같이 누울 필요는 없잖아요?"
기겁하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이 표정을 구기며 받아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쪽이 자려고 누워야 나도 불을 끄고 잘 거 아니냐는 말이야."
"아……."
혼자 헛짚고 이상한 소리를 해 댔다는 사실에 백아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있던 찰나, 다행히도 천무진이 말을 꺼냈다.
"내가 이쪽 쓸 테니까 그쪽에 있는 침상 쓰면 될 것 같네. 마침 치치도 거기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애초에 두 명 이상이 묵는 방이라 침상이 두 개가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백아린은 이것만으로도 꽤나 긴 시간 고민에 빠져 있었을 테니까.
천무진의 말에 그녀가 치치가 있는 침상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백아린이 다가오자 잠시 나와 있던 치치가 재빠르게 소매 속으로 들어갔고, 그녀는 곧바로 침상에 드러누웠다.
자리에 누운 채로 백아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저 먼저 잘게요. 쉬어요."
백아린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천무진은 방 안에 켜져 있던 촛불을 껐다.
순식간에 방 안에는 어둠이 감돌았다.
그리고 이내 몸을 돌리고 누운 백아린의 귓가에 침상에 눕는 천무진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찾아온 깊은 정적.
자리에 누웠지만 백아린은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방금 전 내뱉었던 자신의 헛소리가 계속 머리에 남아 있던 탓이다.
계속해서 뒤척이던 그녀가 결국 이불을 머리끝까지 확 뒤집어썼다.
‘아이씨. 창피해 죽겠네.’
이불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에 빠졌다.
‘으이구 멍청아. 그 상황에 왜 그런 헛소리를 해 가지고는.’
그리고…….
‘대체 이불 속에서 뭐 하는 거야?’
백아린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아직까지도 잠에 들지 못했던 천무진은 퍼덕거리는 이불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의심스러웠던 열여덟 개의 용의자들은 일곱 개로 줄어 있었다. 추가적인 정보를 통해 하나씩 제외해 나가다 보니 유력한 이들로 그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더 줄이기 위해 백아린은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 서른 개가 넘었던 이들을 이 정도로 줄여 낸 것만 해도 그녀가 아니면 쉽사리 해내기 어려웠을 일이다.
애초부터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이들.
그런 그들의 행적을 찾아낸다는 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의심스러운 이들의 숫자를 확 줄이며 감시망을 보다 촘촘하게 해 두기는 했지만, 이 상태로 얼마나 기다려야 그들의 덜미를 잡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백아린이 시켜 둔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툭툭.
가볍게 젓가락으로 탁자를 치는 소리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백아린이 정신을 차리며 앞을 바라봤다.
천무진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너무 안 먹는 것 같아서. 그 면 다 불었어."
"……이런."
그제야 백아린은 앞에 놓여 있는 소면의 면이 퉁퉁 불어 있는 걸 확인했다. 그녀가 서둘러 불어 버린 소면을 먹으려고 할 때였다.
천무진이 젓가락으로 가볍게 그릇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식사도 잘 안 하면서 먹을 때라도 제대로 먹어야지. 기다려."
말과 함께 천무진은 지나가는 점소이에게 서둘러 소면 한 그릇을 더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생각지도 못한 천무진의 모습에 백아린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굳이 새것으로 시켜 주실 필요는……."
"어차피 얼마 걸리지도 않아. 어제도 겨우 한 끼 간신히 먹었잖아."
"맞습니다. 이왕 드시는 거 잘 잡수셔야죠."
옆에서 한천이 천무진의 말을 거들며 나섰다.
일에 몰두하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는 백아린이다. 그런 그녀를 항상 옆에서 지켜봐 왔던 한천이니 자연스레 천무진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말에 결국 백아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대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주문한 소면은 금방 나왔다.
소면을 백아린을 향해 밀어 주며 천무진이 말했다.
"이번엔 불기 전에 먹어."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백아린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신경을 써 준다는 생각에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이 같은 자그마한 배려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천무진의 말대로 백아린은 이번에는 불지 않은 소면을 입에 넣었다. 그렇게 그녀가 막 식사를 끝내 갈 무렵이었다.
따뜻한 국물로 속을 달래고 있는 그때 객잔 바깥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로 세 번째 보는 상대.
장사꾼의 행색으로 계속해서 정보를 가져다주는 적화신루의 사내였다. 허나 오늘의 등장은 여태까지 있었던 다른 두 번의 만남과는 조금 달랐다.
사전에 약속된 만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백아린의 눈빛이 변했다.
연락조차 하지 못하고 나타났다는 말은 그만큼 중요한 뭔가를 가져왔다는 의미였으니까.
중년 사내가 서둘러 다가왔다.
얼굴에 다소 상기된 표정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성큼 다가온 사내가 자리에 앉으며 넉살 좋게 말했다.
"아이고, 전에 부탁하신 물건이 드디어 들어왔습니다. 너무 급한 일이라 연락도 못 드리고 왔습니다. 괜찮으시지요?"
"그럼요. 그럼…… 물건 한 번 볼까요?"
객잔에 있는 다른 이들의 시선 속에서 사내가 가지고 온 물건을 내밀었다. 물건을 감싸고 있는 천을 풀자 안에는 손바닥만 한 향로 하나가 있었다.
특이한 무늬, 그렇지만 중요한 건 역시 이 향로가 아니었다.
슬쩍 향로의 뚜껑을 열어 안을 보자 그곳에는 하얀 서찰이 들어가 있었다. 백아린은 이내 뚜껑을 닫으며 자연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
"괜찮네요."
"서역에서 들어온 귀한 물건입니다. 보수는 추가적으로 전해 드릴 물건이 들어오면 그때 한 번에 받으면 될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추가적으로 정보 의뢰를 할 것이 있다면 말하라는 신호였다. 허나 당장에 필요한 건 없었기에 백아린은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전 가 보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중년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백아린은 건네받은 향로를 다시금 천으로 감쌌다.
급히 들어온 정보, 분명 무엇인가 도움될 것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는 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는지 백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들 다 하신 것 같은데 그럼 올라가도록 해요."
말을 마친 그녀가 성큼 걸음을 옮겼고, 그 뒤로 향로를 대신하여 들고 있는 한천이 빠르게 뒤쫓았다.
천무진까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지막까지 젓가락을 쥐고 있던 단엽이 투덜거렸다.
"참내, 난 아직인데 말이야."
불만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단엽 또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또한 저 향로 안에 담겨 있을 내용이 내심 궁금했으니까.
그렇게 네 사람이 건네받은 향로와 함께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백아린이 빠르게 향로를 감싼 천을 풀어 헤치고는 그 안에 든 서찰을 꺼내어 들었다.
서찰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을 읽어 나가던 백아린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천무진이 물었다.
"무슨 내용이야?"
"……찾았어요."
"누굴?"
되묻는 천무진을 향해 서찰에서 시선을 뗀 그녀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이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