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교섭 ― 어쩌시겠습니까 (1)
단엽의 어쩌다 보니 라는 말에 심방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세상에 이런 답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상대가 단엽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불같이 화를 냈겠지만…….
"그러시군요."
심방은 화를 애써 누르며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힌 단엽이 이내 주변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영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하기는 좀 그렇고."
보는 눈도 있고, 여기서 이야기를 하다가는 안쪽 연무장으로도 주고받는 대화들이 들어갈 수 있었기에 단엽은 장소를 옮기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건 심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잡아 온 자들 중에 대홍련의 부련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황이 골치 아파진다.
기다렸다는 듯 심방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지요. 조용한 장소로 안내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심방은 단엽을 대동한 채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곧장 따라가던 단엽은 이내 주변에서 놀란 눈으로 자신과 심방을 바라보고 있는 구천회의 무인들을 향해 가볍게 손 인사를 건넸다.
"수고들 하라고."
말을 마친 그가 훌쩍 떠나 버렸고, 순식간에 정적이 감도는 연무장 앞의 분위기는 뭔가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심방에게 보고를 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무인은 이제는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기에 저 지랄 맞은 작자가 저리도 설설 기는 거지?’
나이는 들었어도 여전히 욱하고 성질이 올라오면 주변 사람들이 말리지 못할 정도로 난동을 부려 대는 심방이다. 그게 얼마나 심하면 수하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광견(狂犬)이라는 별명까지 붙었겠는가.
그런 그가 갑자기 고양이 앞에 쥐 마냥 얌전하게 돌변했다. 그것도 겨우 무림맹의 길잡이나 하던 인물에게 말이다.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자자, 다들 정신들 차려!"
자신과 비슷한 생각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수하들을 향해 사내가 집중하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심방이 단엽과 함께 움직인 곳은 자신의 거처였다.
찾아보면 조용한 곳은 많았지만, 그래도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에는 역시 이곳만 한 곳이 없었으니까.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림 족자들이 걸려 있는 방 내부를 휘휘 둘러보며 단엽이 고개를 저었다.
‘안 어울리게 그림은.’
실소가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단엽은 애써 감정을 누른 채 심방이 안내하는 자리로 향했다.
"앉으시지요."
말과 함께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둔 채로 마주 앉았다. 들어오며 만났던 시녀에게 명령했던 차가 곧바로 따라 들어왔고, 차까지 따라 준 이후에야 그녀가 방에서 모습을 감췄다.
순식간에 둘만 남게 된 내부.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사실 그리 유쾌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딱히 오랜만에 만났다고 해서 주고받을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잠시 찻잔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던 단엽이 딴에는 생각했다고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나한테 당했던 상처는 이제 좀 괜찮아, 영감?"
"……."
으드득.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심방을 보며 단엽은 턱을 긁적였다.
‘이게 아닌가?’
아무래도 대화의 시작을 잘못한 모양이다.
할 말이 없어서 내뱉은 그 말이 오히려 심방의 치부를 건드린 꼴이 되어 버렸다.
속을 달래려는 듯 심방이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망할 새끼가 날 놀리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힘겹게 분을 삼킨 심방이 애써 태연한 척 말을 받았다.
"허허, 괜찮습니다. 그게 몇 년 전인데요."
"아, 그래? 다행이네. 그때는 나도 좀 어리고 해서 욱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 좀 해 줘. 그래도 딴에는 손속에 사정을 둔 거 알지?"
웃으며 말하는 단엽을 보며 심방은 몇 년 전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대홍련과 구천회의 사이에서 문제가 생겼고, 약 반 년 가까이 전쟁을 벌였다. 당시 활발하게 싸움터를 휘젓고 다니던 심방은 운명처럼 단엽을 만났다.
그와의 싸움.
당연히 승자는 자신일 거라 여겼거늘, 그 대가는 처참했다.
단엽을 그저 재능이 있는 젊은 후기지수 정도로 생각하며 맞섰던 심방은 그의 주먹에 갈비뼈는 물론이거니와, 내상까지 입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
은퇴를 고민해야 했을 정도의 타격.
당시 옆구리에 박혔던 단엽의 열화신공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자신을 그렇게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고 손속에 사정을 뒀던 거 알지 않냐며 말하는 단엽의 모습에 다시금 살심이 꿈틀거렸지만…….
‘끄응, 대홍련의 부련주에게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반년에 가까운 전쟁.
오히려 그런 싸움이 있고 나니 서로에게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물며 그 전쟁을 통해 구천회는 대홍련의 힘을 절실히 느껴 버렸다.
서로 협정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고 알려져 있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지만 사실 싸움이 길어졌다면 승자는 결국 대홍련이 되었을 게다.
당연히 그런 대홍련의 후계자인 단엽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에 개인적인 악연까지 더해지니 실로 불편한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가능하면 죽을 때까지 다시금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상대.
그렇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심방 또한 알아야 했다.
"아까도 여쭈어 봤지만 왜 부련주님이 무림맹 무인들 사이에서 나오신 겁니까?"
"자세히 말해 주기는 조금 어렵고…… 어쩌다 보니 대의를 위해 잠깐 그들 사이에 섞여 있다고 봐 주면 될 거 같은데?"
"그럼 무림맹 무인들도 부련주님의 정체를 압니까?"
"아니, 모른다고 봐야지."
몇몇 아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단엽은 굳이 그런 세세한 것까지 자세히 말할 생각은 없었다. 천룡성에 대해 언급할 계획은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사실 심방이 크게 알아낸 사실은 없었다.
그저 어떠한 연유로 인해 단엽이 비밀리에 무림맹 무인들과 움직인다는 것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세세하게 따지고 보면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았지만 애초에 그 모든 걸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는 상황.
심방이 이내 질문을 바꿨다.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질문은 던졌지만 그는 답을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심방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단엽이 곧바로 답했다.
"안에 갇힌 무림맹 사람들 가던 길 계속 가게 부탁 좀 할게, 영감."
"……그들은 저희의 영역을 침범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던 것뿐이야. 그건 내가 보증하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한마디.
그렇지만 그 말에 담긴 힘은 생각보다 무겁게 심방을 짓눌렀다.
대홍련의 부련주인 단엽이 보증하겠다 말했다.
그 말을 어찌 가벼이 흘릴 수 있겠는가.
‘이걸 어찌해야 하나.’
사실 단엽이 그 무리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무림맹에서 나온 별동대가 자신들에게 어떠한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거나,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였었다면 그걸 핑계 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귀주성을 가로지르던 것뿐이었고, 그 이유만으로 계속해서 가둬두려 하기엔 지금 개입한 상대가 좋지 않았다.
오히려 대홍련의 부련주를 잡아 온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처럼 보였다.
허나 그걸 다 알면서도 심방은 지금의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러나야 한다 해도 그냥 곧바로 꼬리를 내릴 수는 없지.’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 그냥 못 보내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정 가야겠다면 이곳에 있는 구천회 무인들 모두를 쓰러트려야 한다면요?"
결국 못 이기는 척 단엽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지만 그 전까지 어느 정도 강하게 나가려고 마음먹고 내뱉은 말이었다.
심방은 자신의 행동에 단엽이 당황할 거라 여겼다.
허나 그건 착각이었다.
단엽은 오히려 웃음을 흘렸다.
피식.
‘……웃어?’
예상치 못한 행동에 심방의 머리가 복잡해지는 바로 그때였다.
단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감, 나이를 먹더니 감이 많이 죽었네."
"무슨 뜻입니까?"
"여기 거점에 구천회 무인이 어느 정도 있지?"
"천여 명은 족히 됩니다."
천 명이라는 숫자에 힘을 주어 말하는 심방의 의도를 단엽은 잘 알고 있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숫자의 무인들이 이곳에 있다는 걸 강조하려는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허나 그 숫자에 위축될 단엽이 아니었다.
그가 의자에 편히 기댄 채로 상대를 응시했다.
단엽의 입에서 심방을 당황케 할 말이 흘러나왔다.
"장담하지. 이각 안에 그 천 명 중 절반 이상은 죽을 거야."
"……농담이 심하시군요."
"농담? 내가 지금 농담하는 걸로 보여?"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과연 이 싸움의 승자는 누가 될까?
이곳이 구천회의 본거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이곳은 분타다. 무인들의 숫자가 꽤 많은 특별한 분타이긴 했지만 전체적인 수준은 본거지와 비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다.
숫자로 본다면 분명 구천회가 압도적이다.
천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에 비해 별동대 무인들은 고작 육십여 명.
그걸로만 봤을 때는 누가 봐도 승패가 뻔한 싸움이다.
허나 단엽 본인을 포함해 그 안에 있는 몇몇의 인물들이 문제였다.
현 무림을 대표하는 최고 고수들을 일컫는 우내이십일성.
그런 우내이십일성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최소 둘, 어쩌면 셋 이상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건 자신과 천무진이다.
둘은 이미 우내이십일성과 같은 수준에 놓아도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한 명 그 정도의 경지에 있는 것 같다 짐작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한천이다.
누군가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테고, 직접 보고도 쉬이 믿기 어려웠지만…… 이상하게 단엽은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잠깐 보았던 한천의 무위는 분명 우내이십일성 수준에 들어섰거나, 아니면 그에 아주 근접한 수준은 될 거라는 판단이 내려진 상황이다.
거기다 아직 정확한 실력을 알지 못하는 백아린까지.
물론 그녀가 우내이십일성의 수준에 올랐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실력이 좋은 것 같다는 천무진의 말을 듣고 추측컨대 최소 백대고수 이상의 무위는 갖췄을 것이다.
우내이십일성 수준의 고수 셋과 백대고수는 될 것으로 예상되는 백아린까지.
거기다 별동대를 이끄는 세 명의 인물들 또한 그리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본거지에 있는 정예 무인들이 아닌 이곳 분타에 있는 자들로 막아 내기엔 우내이십일성 수준의 고수 세 명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심방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부련주께서 아무리 대단하시다고 하셔도 저희를 너무 우습게 보시는군요. 혼자서 감당하는 건……."
"난 혼자가 아니거든."
"큭, 설마 무림맹의 별동대라도 믿으시는 겁니까? 저보고 감이 죽었다고 하시는데 그건 부련주님이 들으셔야 할 말인 것 같군요."
명백한 비웃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엄연한 힘의 차이를 보여 주고 싶었다.
물론 그런 마음과는 달리 어쩔 수 없이 참아야만 했고, 그걸 알기에 단엽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라 여겼다.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심방을 향해 단엽이 자신의 상체를 들이밀었다.
그가 히죽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설마. 저 별동대들은 기껏해야 시간 끌기뿐이지. 하지만 말이야…… 저 안에는 영감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있거든."
"……감당할 수 없는 사람?"
"당연히 그게 누군지는 알려 줄 생각 없으니 물어봐도 안 가르쳐 줄 거야."
말과 함께 몸을 다시금 의자에 확 기댄 단엽이 팔짱을 낀 채로 계속해서 의문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심방을 바라봤다.
심방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젠장!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겠군.’
허나 분명한 건 이 도발조차도 단엽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맘에 안 든다는 듯 입술만 깨물고 있는 그때.
툭툭.
단엽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고, 자연스레 심방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단엽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언제 보내 줄 거야?"
웃고 있는 능글맞은 모습이 무척이나 얄밉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상부에 다시 보고하도록 하지요."
더 길게 말을 섞어 봤자 자기만 피곤해질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심방이 곧장 답했다.
이미 한 차례 무림맹 별동대에 대한 보고를 올려 둔 상황이었지만 이번에 새로 올라갈 말은 아까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곧바로 풀어 주는 쪽으로 조치를 취할 생각이니까.
단엽이 물었다.
"보고하면 결과는 언제쯤 나와? 시간이 좀 없는데 그냥 영감 선에서 해결 안 돼?"
"그건 무립니다. 아무리 저라도 이런 일을 제멋대로 처리할 순 없으니까요. 이르면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이면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뭐 그 정도면."
단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루 정도의 시간이 낭비될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면 기다려 줄 수 있는 수준이다.
거기다 이미 구천회와 이렇게 된 이상, 아예 대놓고 관도를 따라 움직여 이동 속도를 높이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서 그냥 날리게 된 하루의 시간을 버는 것도 가능하다.
상황이 정리되자 단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괴성을 내지르던 그가 피곤하다는 듯 탁자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침상으로 다가가 벌렁 누워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단엽의 모습에 심방이 당황한 듯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야기가 끝났으니 당장 자리를 비워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서 도리어 그가 자신의 방 한쪽을 점령해 버리는 이 모습이 선뜻 납득이 갈 리가 없었다.
당황하며 묻는 심방의 질문에 단엽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받았다.
"영감 방에서 잠깐만 쉬다가 가려고. 저기 가면 날 쉬지도 못하게 들들 볶을 귀찮은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한두 시진 정도만 쉬다 갈게. 괜찮지?"
이미 편안하게 쉴 자세까지 취해 놓고 물어보는 단엽의 모습에 심방은 손으로 이마를 감싸 안았다.
‘저 망할 인간을 어쩌다가 다시 만나 가지고 내가 이런 고생을…….’
들끓는 속내와 달리 심방은 애써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푹 쉬다 가시지요."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무림맹 무인들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상부에 다시금 보고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단엽을 이곳에서 내보내고 싶었기에 그는 서둘러 자신의 방을 빠져나왔다.
거처를 빠져나와 꽤나 먼 곳까지 이르러서야 심방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 끔찍하군."
예상은 했지만 단엽과의 재회는 심방의 입장에서 상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하늘에 간절히 빌었다.
앞으로 다시는 저자와 만날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