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57화 (57/293)

57화. 적화신루 ― 루주님을 뵙습니다 (1)

억지로 어교연과 함께하게 된 식사 자리.

유쾌하지 않은 식사 자리였기에 한천은 평소와 달리 빠르게 음식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어교연이 말했다.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급해. 내가 술도 한잔 살 테니 좀 마시고."

말을 끝냄과 동시에 어교연은 술을 주문하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향해 한천이 빠르게 대답했다.

"아뇨, 저 술 끊었습니다."

"그래? 분명히 아까 전에 들어오면서 술 달라고 소리를 쳐 댔던 것 같은데……."

"그거야 저희 대장 몰래 한잔하려고 했던 건데 이렇게 들켜 버렸으니 이제는 무리죠."

"백 총관이 꽤나 쥐고 흔드나 봐? 그래도 나이는 부총관이 훨씬 많은데 말이야. 한참은 어린 상관 말에 곧이곧대로 따라야 하니 기분이 좀 그렇겠어."

백아린을 바라보며 농담처럼 내뱉고 있지만 한천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은근슬쩍 백아린을 폄하하며 그녀를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게끔 만들려는 거다.

한천이 곧바로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대장 능력이 워낙 출중하신 걸 어쩝니까. 당연히 모자란 제가 따라야죠.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래도 지낼 만합니다. 저희 대장이 그래도 저한테 이 새끼 저 새끼 거리시는 분은 아니시라서요."

웃으며 내뱉는 그의 말에 어교연은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힘들어졌다.

어교연 또한 적화신루의 총관 중 한 명이었기에 휘하에는 부총관이 있었고, 그자 또한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런 그에게 어교연은 종종 거친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한천은 은근히 그 부분을 끄집어내며 어교연을 뭉개 버린 것이다.

화가 치솟았지만 여기서 기분 나쁜 티를 낸다면 오히려 자신만 우습게 되는 상황.

어교연은 속으로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정말 맘에 안 드는 조합이야.’

백아린이나 수하인 한천이나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의 속을 뒤집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거기다가 적화신루의 루주가 두 사람을 무척이나 애지중지하니 함부로 대하기도 어려워, 어교연으로서는 둘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하며 애써 화를 참고 있는 어교연을 보자니 백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교연은 왈칵 치솟은 짜증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객잔의 입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체 나간 게 언젠데 아직까지 안 오는 거야? 하여튼 느려 터져 가지고선."

"누구요? 경 부총관님이요?"

"네, 아까 전에 뭐 하나 시킨 게 있는데 뭘 하는지 올 생각을 안 하네요. 슬슬 올 때가 지난 것 같은데."

백아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교연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객잔 문이 벌컥 열리며 막 오가던 이야기의 당사자인 경패(京敗)라는 중년 사내가 들어섰다.

사십 대 중반 정도 되는 나이에 덩치도 제법 크고, 얼굴에서는 거친 야성미가 풀풀 풍겼다. 흡사 녹림도를 연상케 하는 막 다듬은 수염과 떡 벌어진 어깨는 그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눈을 부라리며 안으로 성큼 들어서던 경패를 향해 어교연이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야."

눈을 크게 치켜뜨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경패는 어교연의 목소리를 듣고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한천에게 박혀 있었다.

‘하, 한천?’

오랜 시간 적화신루에 몸담아 온 경패니 두 사람을 모를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척이나 놀라는 눈치였다.

그가 한천을 발견하고 이토록 긴장하는 건 오래전에 있었던 남들은 모르는 둘 사이의 일 때문이었다.

거친 호랑이처럼 객잔 안으로 들어섰던 그가 한천을 발견하는 순간 비 맞은 개처럼 처량한 모습으로 몸을 움츠리고 서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어교연이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뭐 해? 내가 불렀잖아! 하여튼 덩치가 곰 같아서 그런가 왜 이렇게 미적거려?"

다른 이들도 아닌 백아린과 한천의 앞에서 자신의 수하가 저처럼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자 어교연은 괜스레 더 짜증이 났다.

화들짝 놀란 경패가 세 사람이 자리한 탁자로 다가갔다.

그가 긴장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총관님."

"전하라는 건 제대로 전했어?"

"예, 시간은 조금 걸릴 것 같지만 잘 처리해 보겠다고 전해 달라 하십니다."

"참내, 매일 그 소리라니까. 하여튼 요새 일 처리하는 걸 보고 있자면 답답해 죽겠네. 최근 들어 본루 중간책들의 일하는 모양새가 영 별로예요. 그렇지 않아요, 백 총관?"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오랜만에 뵙네요, 경 부총관님?"

"예, 두 분 모두 한 반년 만에 뵈는 것 같습니다."

말과 함께 경패가 공손하니 포권을 취하며 두 사람에게 예를 취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어교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천이 자신에게 하는 것에 비해 경패의 행동이 훨씬 더 예의가 발랐으니까. 마치 자신이 백아린의 아랫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이에 대해 경고를 했지만…… 다른 말은 다 듣는 그가 이 말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귓등으로 넘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경패가 처음부터 두 사람에게 공손했던 건 분명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엔 윗사람인 백아린에게조차 적당한 선 안에서 툴툴거리며 나름 어교연의 마음을 충족시켜 줬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부터인지 갑자기 변했다.

‘또 저러네. 예전엔 잘하더니만 대체 왜 저래?’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지를 않으니 그녀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경패가 이렇게 변한 건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한천 때문이었다.

총관이 된 백아린에게까지 예의 없게 굴던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찾아온 한천이 정말 비 오는 날 먼지가 난다는 것이 뭔지를 알 정도로 그를 두들겨 팼던 것이다.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말은 못 했지만 당시에 경패는 정말 죽기 직전까지 맞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었다.

그 경험 때문일까?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천만 보면 괜히 오금이 저렸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백아린에게 예의를 차리는 걸 확인한 후에야 한천이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경패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여, 오랜만."

"자, 잘 지내셨소?"

"말 놓으라니까 그러네. 우리 나이도 비슷하잖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천이 경패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곰처럼 큰 덩치의 경패가 어깨를 움츠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이라고 어찌 성격 더러운 어교연에게 욕을 들으면서까지 이처럼 한천에게 조심스럽고 싶겠는가. 허나 그날의 일로 인해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천이 자리에서 일어난 걸 보고 백아린이 서둘러 말했다.

"식사 잘 했어요. 시간이 늦었으니 저희는 이만 올라가서 쉬도록 하죠."

"조금 더 드시지 않고요."

"이미 많이 먹어서요. 먼 거리를 왔더니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요. 아, 그리고 저희는 내일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가는 건 따로 해야 할 것 같네요."

백아린은 혹시나 적화신루로 갈 때도 함께하자는 말을 할까 봐 미리 선수를 쳤다.

굳이 자신들을 헐뜯을 기회만 노리는 어교연과 같이 자리하며 괜한 심력 소모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백아린의 말에 어교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내일 회의장에서 뵙죠."

"그럼 이만."

말과 함께 백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옆에서 엉거주춤 서 있던 경패가 다시금 포권과 함께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살펴 가십시오."

"네, 경 부총관도 식사 잘 하시고요."

"예.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경패를 지나쳐 간 두 사람은 곧장 객잔의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백아린과 한천이 사라지고도 그 자리에서 계속 예를 갖추고 서 있는 경패를 바라보던 어교연이 기가 막혔는지 소리를 내질렀다.

"야! 너 뭐하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아주 충신 나셨네."

자신을 향한 그녀의 고함 소리를 듣고서야 경패가 엉거주춤 고개를 들어 올리며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아 앞에 놓여 있는 만두를 집어 입에 가져다 댈 때였다. 그런 경패를 바라보며 어교연이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넌 지금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 * *

어교연과 동행을 하지 않기 위해 예정보다 반나절 가까이 빠르게 객잔을 나서야 했던 탓에 백아린과 한천은 예정에도 없던 관광을 해야만 했다.

마차를 타고 인근을 돌며 시간을 보내다가, 총회 시간에 맞춰 적화신루의 총회가 열리는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애초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탓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금황상단(金皇商團)이라는 장소였다. 사천과 맞닿아 있고 지리적으로 꽤나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어 중원에서 나름 이름을 알리고 있는 상단 중 하나였다.

평범한 상단으로 알려져 있는 금황상단.

하지만 사실 이곳은 적화신루의 비밀 세력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오늘의 총회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금황상단의 입구에 이르러 마차가 점점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무인 하나가 빠르게 마차로 다가왔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하루에 수백 명에서 많게는 천여 명이 오고 가는 큰 상단, 많은 이들이 오고 가는 만큼 출입하는 절차 또한 확실하게 잡혀져 있었다.

물어 오는 상대를 향해 백아린이 마차의 창을 가리고 있는 휘장을 슬며시 걷었다. 그러고는 이내 바깥에 있는 상대를 향해 말했다.

"우 노인을 뵈러 왔어요."

백아린이 지금 내뱉은 건 적화신루 총회에 참석한 이들만 알 수 있는 밀어(密語)였다. 매번 모임 때마다 밀어는 바뀌었기에 유출이 될 확률은 극히 적었다.

그리고 밀어와 함께 신분을 증명할 물건 또한 있어야 할 정도로 적화신루의 총회는 엄중한 관리 속에 이루어졌다.

백아린 또한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가지고 온 녹색의 장신구를 꺼내어 내밀었다.

슬쩍 장신구의 밑면을 확인한 무사가 이내 그걸 다시금 백아린을 향해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시겠습니다."

말과 함께 그가 뒤편에 있는 수하들을 향해 왼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안쪽에 있던 누군가가 나와 마차의 고삐를 잡고 안쪽으로 움직였고, 이내 어떠한 장소에 이르자 그가 멈춰 섰다.

"여기서 내리셔서 따라오시면 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에 자리하고 있던 백아린과 한천이 아래로 내려섰다. 마차와 마부는 그 자리에 남은 상황에서 백아린과 한천만이 앞장서는 사내의 뒤를 쫓았다.

그는 곧바로 옆에 있는 자그마한 길을 통해 어딘가를 향해 움직였다.

점점 좁아지는 길목.

그렇지만 총회에 오는 것에 익숙한 탓인지 두 사람은 이런 안내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움직여 마침내 도착한 장원의 입구.

입구에 선 사내가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제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두 분만 들어가실 수 있으십니다."

"고마워요."

백아린이 짧게 말하고는 앞에 있는 문을 열며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꽤나 한적해 보였지만 백아린과 한천 모두 알고 있었다.

곳곳에 몸을 감추고 있는 무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백아린이 슬쩍 뒤편에 선 한천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가자고, 부총관."

"그러시죠."

말을 끝낸 두 사람이 성큼 성큼 정면에 위치한 큰 건물을 향해 움직였다. 장원 안에 있는 단 하나의 건물, 그곳이 바로 오늘의 목적지였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던 그녀가 건물의 입구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췄다.

건물의 입구는 보통 거처로 보기 어려운 커다란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백아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까 전 입구에서 무인에게 확인시켜 줬던 녹색 장신구를 높게 치켜들며 아래쪽을 노출시켰다.

그곳에는 그녀의 직위인 사 총관을 뜻하는 사(四)라는 글자가 자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장신구를 확인시켜 주는 바로 그 순간 손도 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입구를 막고 있던 철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크르르릉.

묵직한 울림과 함께 밀려 나간 철문. 그리고 이내 안에 있는 이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에는 먼저 이곳에 도착한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적화신루의 총관들과 부총관들, 그리고 그 외 몇몇의 핵심 인물들까지.

그들은 각자 양쪽으로 길게 도열해 있었고, 그 가운데 길에는 붉은 비단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비단이 끝나는 장소.

그곳에는 계단 두어 개 정도 높이의 단상이 있었고, 그 앞에는 붉은 휘장이 처져 있었다.

붉은 휘장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안쪽에서는 그저 그림자 하나만이 흔들렸다.

저 붉은 휘장 안에 있을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적화신루의 루주뿐이다.

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선 백아린과 한천의 뒤로 열렸던 문이 다시금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있었다.

쿠웅.

열렸던 문이 닫히는 바로 그때 백아린과 한천이 한쪽 무릎을 땅에 가져다 대며 부복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적화신루 사총관 백아린, 루주님을 뵙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