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반조 ― 변하고 있다 (2)
백아린과 한천이 탄 마차는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현재 적화신루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사천을 벗어나, 섬서에 들어서 있는 상황이었다.
경공을 펼치며 달리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를 반복하는 꽤나 뻑뻑한 일정이었다.
한천이 다리를 두드리며 죽는소리를 해 댔다.
"아이고, 삭신이야."
"얼마나 달렸다고 그렇게 죽는소리야."
"대장도 제 나이 되어 보십쇼. 그런 말이 나오나."
"자기도 청춘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험험."
생각지도 못한 백아린의 반박에 허를 찔렸는지 한천이 헛기침을 해 대기 시작했다. 딴청을 부리던 그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총회는 오랜만이군요."
적화신루는 일 년에 적게는 두 번, 많게는 네 번의 대대적인 총회가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모두가 참석해야 해서, 총관급인 백아린 또한 빠지지 않고 자리에 나가고 있었다.
총회의 장소는 자주 변했는데, 이번엔 섬서성 녕강(寧强) 쪽에 자리가 마련됐다. 섬서성이긴 하지만 사천성과 밀접한 지역이기에 백아린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오고 가는 것이 수월했다.
허나 총회를 향하는 백아린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며칠의 시간이 낭비되는 것도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에휴, 보기 싫은 얼굴들이 벌써부터 아른거리네."
백아린이 총회에 참석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은 몇몇 이들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총회에 참석하는 건 의무였고, 굳이 분란을 만들 이유가 없었기에 백아린 또한 최대한 참으며 마찰을 피해 왔다.
마차를 타고 달리던 와중에 백아린이 슬쩍 바깥을 내다봤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사라지는 것이 조금 있으면 밤이 찾아올 모양이다. 옆에 놓아 둔 봇짐에 한천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안에 들어 있는 말린 고기를 꺼내며 말했다.
"식사하시죠, 대장."
"됐어."
"아무리 보기 싫은 얼굴이 떠올라서 입맛이 없으셔도 식사는 하셔야죠."
"그게 아니고 인근 마을에서 하루 쉬었다가 갈 생각이니까 식사는 거기서 하자고."
"엥? 쉬고 가신다고요? 죽어라 달리면 새벽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한천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평소 빠릿빠릿한 성격 탓에 절대 미적거리지 않는 그녀였기 때문이다.
밤새서 달리면 새벽에는 충분히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거늘 굳이 객잔에서 하루를 쉬고 가려는 백아린의 행동이 평소의 그녀와는 너무도 다르게 느껴졌다.
그의 질문에 백아린이 답했다.
"어차피 총회는 내일 밤이잖아. 굳이 먼저 가서 그 보기 싫은 얼굴들을 보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아……."
그제야 한천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잘됐다는 듯 방금 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말린 고기들을 보따리 안에 쑤셔 박았다. 그러고는 이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꼴 보기 싫은 놈들한테 고마울 때가 다 있네요."
"너무 좋아하지 마. 그래도 술은 안 되니까."
"에엑? 이왕 하루 쉬는 건데요?"
"내일 총회에 또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들어갈 거야?"
"에이,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아직도……."
말을 하던 한천은 자신을 쏘아보는 백아린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오래전에 밤새 술을 마시고 총회에 참석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결국 그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달리던 마차는 간신히 해가 사라지기 전에 인근 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다.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관도를 잇는 길목과 가까운 곳이었기에 외부에서 온 듯한 여행객들이 꽤나 많았다. 백아린은 한 객잔에 이르러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녀가 한천에게 말했다.
"우선 부총관이 들어가서 방 두 개랑 식사 좀 준비시켜 둬. 난 마차를 다른 장소에 두고 곧바로 따라 들어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장."
은근슬쩍 미리 술을 시켜 둘 생각에 한천이 서둘러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백아린은 이내 마차를 뒤편으로 이동시키고는 객잔 입구로 다가갔다.
문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선 백아린이 얼굴을 가리는 휘장을 손으로 가볍게 젖혔다.
그렇게 안으로 성큼 들어서며 그녀는 한천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움찔.
한천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녀를 확인하는 순간 백아린은 멈칫했다.
삼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인은 무척이나 화려한 복식의 소유자였다. 새하얗게 화장을 한 얼굴과, 그랬기에 더욱 도드라지는 붉게 물들인 입술까지.
긴 머리카락을 반쯤 올리고, 나머지 반 정도는 부드럽게 어깨로 내린 여인에게서는 아찔한 색기가 흘러넘쳤다.
그 여인은 백아린 또한 잘 아는 인물이었다.
‘아, 이런.’
들어오는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몸을 돌리며 바깥으로 나가려는 그 찰나.
"어머, 이게 누구야."
들리는 목소리에 백아린은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애초에 한천과 함께 있는데 자신이 올 거라는 걸 몰랐을 리가 없다.
뒤편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백아린은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는 이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이제야 봤다는 듯이 말이다.
다가온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다 만나네요?"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상대를 보며 백아린 또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여기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적화신루의 총관 중 하나인 어교연(魚嬌燕)이라는 인물이었다.
백아린이 개인적으로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인물이 바로 이 여인이었다.
굳이 하루 먼저 만나고 싶지 않아 이곳 객잔에서 머물기로 한 것인데, 우습게도 그 당사자를 이곳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다.
어교연이 몸을 비틀며 슬쩍 떠보듯 말을 흘렸다.
"절 보고 몸을 돌려서 나가려고 하시는 것 같던데……."
알면서도 물어 오는 그녀를 향해 백아린은 전혀 동요 없이 받아쳤다.
"그럴 리가요. 마차에 놓고 온 게 생각나서 가지러 가려 한 거예요."
"아, 그래요?"
"그런데 저희 부총관이 왜 거기에 있죠?"
"들어오다가 저랑 시선이 딱 마주쳤지 뭐예요. 호호, 부총관도 꼭 총관님처럼 뭘 마차에 놓고 왔는지 몸을 황급히 돌리시던데……."
말을 하며 재미있다는 듯 어교연이 웃음을 흘렸다.
백아린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뒷간이 급하다고 하던데 그거 때문이겠죠. 말이 나온 김에 잠시 나갔다가 와도 될까요?"
"그럼요."
"부총관!"
백아린이 어서 오라는 듯 자리에 앉아 있는 한천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백아린을 향해 달려왔다.
한천이 어교연을 향해 합장을 하듯 손을 들어 올리며 짧게 말했다.
"그럼 전 대변이 마려워서 이만."
더러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를 보며 어교연이 미간을 구기며 뒷걸음질 쳤다.
이윽고 나가기 위해 문을 밀어 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어교연의 눈빛에는 싸늘함이 감돌았다.
‘건방지긴.’
예전부터 저 둘 모두를 싫어하는 그녀다.
특히나 어교연은 백아린을 무척이나 견제하고 미워했는데, 자신이 그녀에게 적화신루 내에서 많은 걸 빼앗기고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이번 일도 그랬다.
천룡성과 관련된 의뢰.
그걸 적화신루의 루주는 백아린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들과 끈이 생긴다는 건 정보 단체의 인물로서 그 어떠한 것과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강호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조절할 수 있는 절대자였으니까.
당연히 어교연은 그 일에 욕심을 가졌다.
백아린에게 임무가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몇 차례고 루주에게 자신이 더 적임자라며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대답은 언제나 거절이었다.
‘루주가 아낀다 해서 세상이 모두 네 것 같더냐, 백아린.’
보이지 않는 적화신루 내부에서의 암투.
결국 두 사람 중 하나만이 적화신루에 남을 수 있다. 어교연은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 승자는 자신일 거라고도.
‘내가 이길 거야. 그리고 너희 둘 모두…… 적화신루에 발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지.’
어교연의 눈동자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객잔을 빠져나와 제법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야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아니,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
"그러게 말입니다. 어 총관을 피하려고 왔는데 하필 그 객잔에 당사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식겁했다는 듯 한천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 그를 향해 백아린이 불만을 쏟아 냈다.
"대체 어쩌다가 걸린 거야?"
"뭐 피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곧바로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거든요."
"아니, 그러면 그냥 아는 척 인사라도 하던가. 왜 거기서 눈을 마주치고 그냥 몸을 획 돌리셨대?"
"그거야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어나서…… 하하!"
어색하게 웃는 한천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백아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평상시 자신들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기를 쓰는 그녀가 아니었던가.
백아린을 적이라 여기는지 계속해서 흠집을 내려 달려들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어교연이라는 인물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마주치기 짜증 나는 상대 정도로만 여길 뿐.
백아린이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만났는데 그냥 도망칠 순 없잖아."
"아무래도 그러기는 좀……."
"식사만 하고 갈까? 소면 같은 걸로 간단하게 때우면 시간도 얼마 안 걸릴 테고 말이야. 지나가는 길에 식사를 하러 들린 거라고 둘러대면 되니까. 식사 정도 같이하고 가도 뭐 크게 트집 잡을 만한 건……."
말을 하던 백아린의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건 눈앞에 있는 한천이 이상하게 눈치를 보며 딴청을 부려 대기 시작해서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뭔데?"
"예? 뭐가요?"
"부총관 뭐 또 사고 쳤잖아. 빨리 말해."
백아린의 재촉에 한천이 눈치를 살피다 대답했다.
"저희가 여기서 자고 가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걸 저 여자가 어떻게 알아?"
"그게…… 제가 들어가면서 말했거든요."
대답을 들은 백아린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향해 한천이 서둘러 변명을 해 대기 시작했다.
"제가 안에 어 총관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전 대장이 시키시는 대로 방과 식사를 주문하려고 한 것뿐이라고요."
"대체 어떻게 했는데?"
"음. 그냥 들어가면서 곧바로 점소이를 향해 잠 잘 방이랑 술 내놓으라고 소리를 좀……."
"하아. 범인이 여기 있었네."
"버, 범인이라뇨?"
"그렇게 소리를 질러 대면서 들어갔는데 못 알아보면 바보 아냐? 나 여기 있소, 하면서 들어갔으니 그 여자가 부총관을 곧바로 알아보지. 그리고 내가 분명히 술은 안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 하하. 딱 한 병만 마시려고 했습니다. 한 병이요."
어수룩하게 웃는 한천을 보며 백아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또한 더는 이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책임을 묻기보다는 방법을 찾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야."
"그게 뭡니까?"
가까이 다가오며 한천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그녀가 답했다.
"객잔에 방이 꽉 차 있게 만드는 거야. 그러면 어차피 우리는 여기서 못 잘 거 아냐. 그 핑계를 대고 식사만 하고 스리슬쩍 나가는 거지."
"오! 역시 우리 대장, 묘책이십니다."
박수를 쳐 대며 평소보다 더욱 격하게 호응하는 한천의 모습에 백아린이 피식 웃었다. 괜히 찔리는 것이 있어서 이처럼 행동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천이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럼 어떤 식으로 그렇게 만들까요? 사람들을 좀 불러와서 객잔에 미리 투숙객으로 만들면 될 것 같은데요."
"그래도 되긴 한데 시간도 좀 걸리고 번잡스러우니 객잔 점소이만 포섭하는 걸로 가자고. 방이 있냐고 물어보면서 전음을 날리는 거지. 돈은 두 배로 지불할 테니까 빈방이 없다고 해 달라고 말이야."
"괜찮은 계획이군요. 그럼 곧바로 실행할까요?"
"그러자고. 시간 너무 끌면 또 그 특유의 화법으로 사람 들들 볶아 댈 테니까."
어교연과 길게 이야기를 섞고 싶지 않았기에 작전을 준비하기 무섭게 백아린은 한천과 함께 객잔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어교연이 다시금 일어나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기다렸다는 듯 백아린이 점소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방 두 개 남는 게 있나요?"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예정대로 막 전음을 날리려는 그 찰나였다.
옆에서 어교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더라고요. 제가 나가시고 미리 방을 잡아 뒀죠."
"……."
백아린은 움찔하며 전음 보내는 걸 멈췄다.
이 핑계를 대고 어떻게든 객잔을 빠르게 빠져나가려 했는데…… 하필이면 이미 어교연이 방을 잡아 뒀다고 하니 더는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교연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하루 같이 보내게 됐는데 좋은 시간 한번 보내 봐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한천을 슬쩍 노려보며 백아린이 답했다.
"그러죠."